시대데스크
[시대데스크]"싸움을 멈추라" 오디세이의 진짜 결말
최근 개봉한 영화 '오디세이'의 결말은 원작과 다르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각색 과정에서 원작의 중요한 장면들 중 일부를 걷어냈다. 대표적인 게 결말부에서 오디세우스와 청혼자 유가족들이 화해하는 장면이다. 영화를 스포일하지 않기 위해 여기선 원작의 내용만 다룬다.약 3000년 전 호메로스가 썼다고 알려진 원작 '오디세이아'의 종반부는 현대의 시각에서 보면 다소 잔혹하다. 돌아온 이타카의 왕 오디세우스는 왕위를 노리고 자신의 아내에게 청혼하던 108명을 모두 처단한다. 그러자 청혼자의 유가족들이 오디세우스에게 복수하기 위해 몰려온다.이때 개입에 나선 게 지혜의 여신 아테나다. 여신은 "고통스러운 싸움을 멈추라"며 "피를 흘리지 말고 서로 화해하라"고 명령한다. 오디세우스의 손에 가족을 잃은 이들의 입장에선 억울했겠지만, 신에게 맞설 순 없는 노릇이다. 아테나의 중재 아래 양측은 평화의 맹약을 맺는다. 오디세우스의 서사는 귀환이나 복수가 아니라 화해의 순간 비로소 완성된다.미국의 정치철학자 J. 피터 유벤은 "정치적 정의는 철학적 정의와 다르다"고 했다. 유벤에 따르면 철학적 정의가 옳고 그름인 반면 정치적 정의는 '타자와의 화해'다. 여기서 타자는 상대 정당일 수도 있고, 같은 정당 내 다른 계파일 수도 있다. 선거 등 승부가 끝난 뒤에도 함께 어울려 살아가야 하는 존재다.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면서도 타자를 공동체의 일원으로 포용하는 것이 정치적 정의다. 17일 더불어민주당의 새로운 지도부가 탄생했다. 김민석 전 국무총리가 정청래·송영길 전 대표를 누르고 집권여당의 사령탑에 앉았다. 전당대회 기간의 치열한 공방은 친명(친이재명)계와 친청(친정청래)계 모두에 깊은 상흔을 남겼다. 2028년 총선 공천 문제가 걸린 만큼 양쪽의 절박함을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그러나 이후에도 서로를 적대시한다면 향후 총선과 대선에서 공멸할 수밖에 없다.미국 제4대 대통령 제임스 매디슨은 '연방주의자 논고'에서 '계파'(faction)의 폐해를 경고했다. 그는 계파를 없애는 건 불가능하다고 봤다. 매디슨의 처방은 계파들이 서로를 절멸시키지 못하도록 제도적 견제 장치를 갖추는 것이었다. 경쟁하되 서로를 말살하진 않는 것이 선진 정치다.안타깝게도 증오는 정치인들을 움직이는 큰 동력 가운데 하나다. 자신의 조언을 받아들이지 않고 모욕했다고 비난하고, 자신을 공천에서 배제했다고 정치적으로 반대편에 선다. 모두 사적인 감정이다. 감정은 자유지만, 그 감정이 공익을 흔드는 건 다른 이야기다. 공과 사를 가르는 경계선을 지키는 건 정치인이 시민과 맺은 최소한의 약속이다.프랑스의 정치사상가 알렉시 드 토크빌은 저서 '미국의 민주주의'에서 결사(結社)의 기술이야말로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힘이라고 했다.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이들이 함께 일하는 법을 익히지 못하면 자유는 무질서로 전락하고, 무질서는 독재를 부르는 명분이 된다고 그는 경고했다. 실제로 고대 로마와 20세기 독일, 스페인에서 이런 식으로 공화정이 무너졌다.'오디세이아'에서 청혼자 유가족들이 화해를 받아들인 건 정의가 실현됐거나 복수를 완수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피의 악순환이 이어질 경우 공동체가 붕괴될 수 있다는 인식에 기반한 결단이었다. '이재명 정부의 성공'이란 대의 앞에 누가 정통인지, 누가 '찐명'(진짜 친명)인지 뭐가 중요한가. 내부갈등은 접어두고 집값과 청년 실업 등에 대한 해법을 찾기 위해 머리를 맞대는 집권여당을 기대한다.
[시대데스크]빌라를 살리자, 주거 가치 높여서
국내 2250만 가구 중 11%(248만 가구)는 다세대·다가구·연립주택(빌라)에 거주한다. 아파트(54%)의 약 5분의 1 수준이다. 공동주택 공급과 수요가 아파트로 편중된 건 이유가 있다. 단지 규모와 인프라의 편리성, 자산 가치 등에서 다세대·다가구·빌라를 압도한다. 재테크 목적으로 빌라를 매수했을 때 감가상각을 반영한 건물 가치가 하락해 재매각도 쉽지 않다.주택용지가 부족한 서울 도심의 특성과 3~5년 이상이 소요되는 아파트 선분양 제도를 감안할 때 빌라는 공동주택 정책의 한 축이어야 한다. 8·13 대책은 아파트에만 편중됐던 주택공급 정책의 초점을 자금 문턱이 낮은 비아파트로도 돌리려 한 점에서 의미가 있다.빌라는 아파트의 공사기간 대비 절반 이상 짧은 1~2년 만에 지을 수 있다. 브랜드 아파트 대비 낮은 공사비와 분양가, 빠른 입주가 가능하다는 점은 큰 장점이다. 주로 후분양을 하기 때문에 즉시 입주가 가능하다.정부는 빌라 공급 확대를 위해 건축면적(바닥면적) 제한을 현행 660㎡에서 1000㎡ 미만으로 상향 조정한다고 밝혔다. 건축물 규모를 키워 공급 수를 늘리는 것이다. 단독 등기만 가능한 다가구주택은 3층에서 4층으로, 구분 등기된 다세대주택은 5층에서 6층으로 층수 제한을 높였다. 건설자금 대출금리는 3.5%에서 3.2%로 인하했고 대출한도를 가구당 7000만원에서 9000만원으로 올렸다. 주택매매·임대사업자가 준공 1년 내의 비아파트를 매입할 때 기존에는 주담대가 금지됐지만 앞으로는 LTV(주택담보대출비율)이 적용된 주담대를 활용할 수도 있게 됐다.실수요자들의 반응은 뜨뜻미지근하다. 온라인 부동산 커뮤니티에서는 내 집 마련의 문턱이 높아 거주 목적으로 빌라 매수를 고민하는 이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정부 차원에서 혹여나 발생할 전세사기를 엄단하겠다고 선언하고 이번 8·13 대책으로 실수요자들을 위한 각종 금융지원책을 마련했음에도 실수요자들이 빌라를 거주지로 선택하기에는 여전히 한계가 있다.빌라는 개인 건축주가 사업 주체인 경우가 많다. 건축주가 금융권의 대출이자를 계속 부담하는 대신 세입자로부터 받은 전세금으로 공사비를 상환하는 구조가 대부분이다. 과거 이같은 구조를 악용해 전세사기가 횡행하기도 했다. 반면 수천억원에서 조 단위 규모의 PF(프로젝트파이낸싱)를 승인받아 건설되는 아파트 선분양 사업은 보증 의무와 분양권 심사 등 제도권의 관리감독을 받는다. 전세사기와 같은 범행이 어려워 거주자들이 두텁게 보호받을 수 있다.빌라는 일반적으로 거주환경 면에서 아파트에 밀린다. 누수와 결로로 인한 곰팡이 발생은 임대인-임차인 분쟁으로 비화되는 경우가 많다. 주차장 부족과 시공 하자, 관리 부실 등 불만들도 허다하다. 다수 빌라는 의무 감리 대상이 아닌 경우가 많고 감리가 이뤄진다더라도 대규모 아파트와 달리 형식적인 감리로 인한 안전 리스크도 있다. 이같은 불만들이 적절히 해소되지 않는다면 빌라 공급대책은 현실에 겉돌 수밖에 없다.법인 주도로 운영되는 강남·서초·용산 등 업무지구의 고가 빌라와 타운하우스는 성공 사례의 모델이 될 수 있다. 테라스와 정원, 복층 구조 등 설계기준의 규제가 낮아 개성 있는 주거지로서 고소득층 수요 시장이 형성돼 있다. 빌라의 시공 품질 관리, 공동주택 커뮤니티 강화로 주거지로서의 가치를 올리자. 그게 자연스럽게 수요를 늘리는 길이다.
[시대데스크]K치킨 60년 진화의 비밀
말복이 코앞이다. 삼복더위에 지친 사람들에게 치킨은 대표적인 복날 음식이 됐다. 익숙한 나머지 잊고 지내지만 K치킨은 60여년에 걸친 진화의 결과물이다. 국내 치킨 시장에는 400개 안팎의 브랜드가 경쟁하고 있을 만큼 치킨은 한국인의 일상 깊숙이 자리 잡았다.시작은 '통닭'이었다. 1960년 명동에 문을 연 영양쎈타의 전기구이 통닭은 당시를 대표하는 외식 메뉴였다. 1970년대 들어 통닭 문화는 재래시장과 호프집을 중심으로 전국에 퍼져나갔다. 외식이 귀하던 시절 통닭 한 마리는 온 가족이 나누던 특별한 음식이었다. 영화와 드라마 속 노란 종이봉투가 추억의 상징으로 등장하는 이유다.1980년대 들어 통닭은 '치킨'으로 진화했다. 국내 프라이드치킨의 효시로 불리는 림스치킨이 등장했고, 페리카나와 멕시칸 등이 양념치킨을 선보이며 새로운 시장을 열었다. 1990년대 교촌과 BBQ가 산업화의 기반을 닦았고 2002년 월드컵은 치킨을 국민 음식 반열에 올려놓았다.치킨과 맥주를 함께 즐기는 치맥은 한국의 대표 음식 문화로 자리 잡았고 2021년 'Chimaek'은 옥스퍼드 영어사전에 이름을 올렸다. 음식을 먹는 행위를 넘어 응원과 축제, 위로와 공감의 순간을 함께하는 문화로 확장된 것이다.60년 동안 치킨은 끊임없이 변했다. 통닭은 프라이드치킨이 됐고, 양념치킨이 등장했으며, 치맥 문화는 국경을 넘어 세계로 확산했다. 변하지 않은 가치가 하나 있다. 가장 맛있는 순간에 치킨을 내놓겠다는 고집이다.글로벌 무대에서 K치킨의 차별점은 양념이나 소스가 아니다. 핵심은 '갓 튀겨냄'에 있다. KFC를 비롯한 글로벌 프랜차이즈가 미리 조리한 제품을 보온 상태로 판매하는 방식으로 성장한 반면 한국 치킨은 주문 직후 닭을 튀겨내는 길을 선택했다. 소비자들은 15~20분의 기다림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그 결과가 '겉바속촉'이다. 바삭한 껍질과 촉촉한 속살은 갓 튀겨냈을 때 가장 완벽하게 살아난다. 양념은 모방할 수 있다. 가장 맛있는 순간을 고객에게 전달하려는 문화는 쉽게 흉내 내기 어렵다. K치킨의 경쟁력은 레시피가 아니라 조리 방식과 철학에 있다.이 같은 경쟁력은 글로벌 시장에서 성과로 이어지고 있다. 대표 주자인 BBQ는 2003년 중국 진출을 시작으로 현재 57개국에서 800여개 매장을 운영하고 있다. 미국 시장 소비자 매출은 2021년 700억원에서 최근 3400억원 규모로 커졌다. 4년 만에 5배 가까운 성장이다.K콘텐츠의 확산은 K치킨의 해외 인지도를 높이는 촉매제가 되고 있다. 드라마와 영화 속 치맥 문화가 자연스럽게 노출되면서 K치킨은 음식이자 문화 경험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갈 길은 남아 있다. 피자와 파스타처럼 세계 어디서나 쉽게 접하는 음식으로 자리 잡으려면 현지화와 정체성 사이에서 균형을 찾아야 한다. 다양한 소스와 메뉴로 현지 입맛을 공략하면서 K치킨의 본질은 지켜야 한다.통닭에서 치킨으로, 치킨에서 K치킨으로 이어진 60년의 진화는 진행 중이다. 긴 변화의 과정에서 흔들리지 않은 원칙이 있다. 가장 맛있는 순간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 언젠가 K치킨이 세계인의 일상 속 음식으로 자리 잡는다면 성공의 비결은 화려한 양념이 아니라 원칙에 있을 것이다.
[시대데스크]레버리지 ETF 물타기 막는 정부, 62조 천재의 교훈
지난주 캘리포니아 휴양지의 토스카나풍 별장. 하객 대상 토론회에 숲속 스파 피로연까지, 며칠에 걸쳐 이어질 결혼식 준비가 한창이었다. 신랑은 24세의 AI 전문 헤지펀드 설립자, 신부는 AI 선두 기업 앤스로픽 CEO의 비서실장이다. 신부가 주문한 콘셉트는 '유럽식 정원에 특이점 직전의 분위기'였다. 미국 경제매체 포천은 이들을 'AI 파워 커플'이라 불렀다.같은 시각 신랑은 자신을 스타로 만든 펀드가 보유한 상장 주식 전량을 헐값에 팔아치우고 있었다.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아는 사람은 극소수다." 신랑 레오폴드 아셴브레너가 2024년 인터넷에 공개한 165쪽짜리 에세이의 한 구절이다. 제목은 '상황 인식(Situational Awareness)', 그가 세운 펀드의 이름이기도 하다. 논문도 보고서도 아닌 이 글은 공개 직후 실리콘밸리의 필독서가 됐다.석 달 뒤 그는 펀드를 세웠다. 운용 경험은 전혀 없었지만 컬럼비아대 19세 수석 졸업, 오픈AI 연구원 출신이라는 이력 앞에서 돈은 쉽게 모였고 성과가 남은 논란을 잠재웠다. 대표 보유 종목이던 미국 낸드플래시 업체 샌디스크는 1년여 만에 40배 넘게 올랐다. 2억2500만달러로 시작한 펀드는 2년도 안 돼 450억달러(약 62조원)가 됐다. 저명한 창업자들과 월가의 운용사들까지 돈을 맡겼고, 개인투자자들은 분기마다 나오는 공시를 뒤져 그가 산 종목을 따라 샀다.AI 시대의 아이콘으로 추앙받은 펀드의 구조는 허술했다. 반도체와 데이터센터 등 AI 인프라에 '몰빵'했다. 여기에 4배의 레버리지를 썼다. 포트폴리오가 25%만 빠져도 '녹는' 구조다. 무엇을 들고 있는지는 분기마다 공시로 드러났고, 어느 종목을 흔들면 그가 팔 수밖에 없는지 시장은 알고 있었다.7월 들어 반도체주가 꺾이자 자금을 대주던 투자은행들이 추가 담보를 요구했다. 그는 담보를 마련하기 위해 보유 종목들을 던졌다. 그중에는 SK하이닉스도 있었다. 버티지 못한 그는 결국 백기를 들었다. 인수자는 헤지펀드 시타델, 시가보다 10% 넘게 싼 값이었다.파도는 쓰나미가 되어 태평양을 건넜다. '삼전닉스'가 시총 절반을 차지하는 코스피는 27거래일 만에 39% 하락하며 IMF 외환위기 때 세운 기록을 깼다. 펀드 청산이 마무리된 것은 코스피가 저점을 찍은 날 밤이었다. 이튿날 지수는 18% 가까이 반등했다.두 달 앞서 한국 정부는 개인에게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에 2배로 걸 수 있는 단일종목 레버리지 ETF를 허용했다. 내건 명분은 해외로 나간 자금을 국내로 돌리겠다는 것이었다. 김용범 청와대 정책실장이 1월 인터뷰에서 "나스닥에서는 가능한 것을 왜 국내에서는 못 하게 하느냐"고 한 뒤 속도가 붙었다. 금융위원회 내부 문건상 하반기였던 출시는 5월 27일로 앞당겨졌다. 시장이 폭락하자 정부는 '대책'이라는 이름의 '규제'를 내놨다. 표적은 그렇게 서둘러 도입한 ETF였다. 신규 상장은 중단됐고 개인 예탁금은 3000만원으로 올랐다. 시행일은 지수가 바닥을 찍은 다음 날이었다. 고점 대비 4분의 1 토막이 난 상품을 들고 있던 개인은 반등 국면에서 추가 매수 길이 막혔지만 '대책'은 강행됐다. 6월 한 달 외국인 순매도가 49조원으로 역대 최대였는데도 시가총액의 1%도 안 되는 ETF가 하루아침에 사달의 범인이 됐다. 지수를 지키는 일이 그만큼 급했다. 대책의 정확성은 차치하고, 정부가 지수를 올리고 지킨다는 명제는 성립할까. 1세대 증권맨 윤재수가 『대한민국 주식투자 100년사』에 1989년의 기록을 남겼다. 4년 만에 일곱 배가 오른 코스피가 그해 3월 1000을 찍고 흔들리자 노태우 정부는 한국은행 발권력까지 끌어다 투자신탁회사에 자금을 대고 주식을 사들이게 했다. 지수를 떠받치기 위해서였다.시장은 정부가 개입할수록 더 내렸다. 정부가 무리수까지 동원한다는 것 자체가 사태의 심각성을 알리는 신호였다. 정부가 매수호가를 깔아주자 투자자들은 앞다퉈 팔았다. 매도가 매도를 불렀고 정부는 결국 손을 들었다. 지수는 1992년 500선이 무너진 뒤에야 방향을 바꿨다. 그 전에 1만3000여 개의 '깡통 계좌'가 일괄 정리됐다. 코스피가 1000선 박스를 벗어난 것은 그로부터 16년이 지난 2005년이다.삼성전자의 지난 분기 영업이익은 전 세계 1위다. 그 뒤를 SK하이닉스가 쫓는다. 원칙 없이 흔들리고 시도 때도 없이 개입하면 정작 필요한 순간에 쓸 카드가 사라진다는 정부의 '상황 인식'이 절실한 시점이다. 글로벌 1등 기업을 가진 대한민국의 시장 감독관에게 요구되는 최소한이다.
[시대데스크]다 팔고 문 닫는 게 낫다?…코스닥 동전주의 그림자
"차라리 회사를 다 팔고 문을 닫는 게 낫겠네요"최근 코스닥 상장사 대표들 사이에서 자조 섞인 탄식이 흘러나온다. 7월의 마지막 날, 코스피는 전장보다 1001.89포인트(17.91%) 뛴 6595.45로, 코스닥은 11.63% 상승한 719.76으로 장을 마감했다. 코스닥은 하루 만에 700선을 회복했지만 전날 고점 대비 반토막 수준인 644.78까지 주저앉았던 공포장을 고려하면 이날의 폭등은 극심한 변동성의 또 다른 단면일 뿐이다.하루 만에 지수가 11% 넘게 튀어 올랐음에도 상장사 절반 이상은 여전히 주가순자산비율(PBR) 1배 미만의 바닥권에 머물러 있다.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31일 기준 코스닥 전체 상장사(1810여개) 중 54%에 달하는 980여 개 기업의 PBR이 1배를 밑돈다. 코스닥 평균 PBR 역시 0.8배 수준의 저평가를 벗어나지 못했다.주가가 1000원 언저리를 맴도는 '동전주' 신세로 내몰린 기업도 상당하다. 특히 PBR이 0.5배 밑으로 떨어진 곳들은 회사의 전체 시가총액이 기업이 보유한 현금과 부동산 등 당장 청산한 자산가치에도 한참 못 미치는 기형적 상태다. 기업의 펀더멘털을 가늠하는 PER(주가수익비율)이 '벌어들이는 돈'의 가치라면, PBR은 기업 자산의 '마지노선'이다. 지수는 반등했을지언정 시장은 코스닥 상장사 절반 이상에 "사업을 계속하는 것보다 문을 닫는 게 낫다"는 상처뿐인 성적표를 매긴 셈이다.시장이 기업을 청산가치 이하로 냉정하게 평가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본업에서 지속적인 성과를 내지 못해 자본을 갉아먹는 데다, 대주주와 경영진이 자산을 사실상 독점한 채 주주 환원에는 담을 쌓고 있어서다.독자적인 기술력이나 확실한 실적도 없이 '기술특례'나 '테마'를 앞세워 증시에 진입한 뒤, 무분별한 유상증자와 무상증자로 연명하는 '좀비 기업'들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코스닥의 신뢰를 무너뜨리고 건전한 투자 자금을 오염시키는 진열대의 '썩은 사과'다.하지만 동전주로 전락한 기업들이 모두 '썩은 사과'인 것은 아니다. 본 가지에서 억울하게 떨어진 '낙과'(落果)도 분명 존재한다. 나름의 독보적인 기술력과 견고한 재무 구조를 갖췄음에도, 시장의 수급 가뭄과 대형주 쏠림 현상 탓에 동전주 신세가 된 경우다.진짜 코스닥의 체질을 바꾸려면 정부와 거래소의 정교한 '핀셋 대응'이 시급하다. 실적 없이 시장을 어지럽히는 부실기업은 과감히 퇴출해 진열대의 신뢰를 회복하되 매크로 외풍에 일시적으로 갇힌 정직한 기업에는 숨통을 터줘야 한다.모든 동전주에 '단칼 상폐'라는 일률적 칼날을 대기보다는 자율적 M&A와 구조조정 통로를 넓혀 기술력과 고용이 유기적으로 연착륙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줄 필요가 있다. 썩은 사과는 과감히 솎아내되 싱싱한 과일이 상하지 않도록 지켜내는 정교한 조율. 체질 개선의 기대가 또 다른 시장의 공포로 변하지 않게 하는 정책의 깊이가 필요한 시점이다.
[시대데스크]나눌 궁리, 만들 궁리
월 수출 1000억달러. 지난 6월 우리나라 수출은 1022억5000만달러를 기록했다. 독일, 중국, 미국에 이어 세계 네 번째로 월 1000억달러 고지를 밟았다. 주역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다. 올해 6월 반도체 수출은 448억2000만달러로 1년 전보다 199.5% 늘었다. 전체 수출의 43.8%다.지난 20일 새벽(한국시간) 막을 내린 2026 북중미 월드컵의 처음과 끝도 한국 가수가 장식했다. 지난달 멕시코시티 아스테카 스타디움 개막식에서 가수 이재(EJAE)는 세계적 테너 안드레아 보첼리와 공식 주제가 'DNA'를 한국어 노랫말로 이어 불렀다. 결승전 하프타임 쇼에서는 방탄소년단(BTS)이 '다이너마이트'를 열창했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원조받던 나라가 원조하는 나라로 바뀐 곳이 우리나라다. 국력과 위상은 그 어느 때보다 높아졌다. 불굴의 의지로 역경을 넘은 기업과 기업인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1983년 2월 삼성그룹 창업주 이병철 회장이 반도체 사업 진출을 알린 '도쿄선언'을 내놓았을 때 세계는 비웃었다. 일본 미쓰비시연구소는 '삼성이 반도체를 할 수 없는 다섯 가지 이유'까지 제기했다. 작은 내수시장, 취약한 관련 산업, 부족한 사회간접자본, 열악한 기업 규모, 빈약한 기술이 근거였다. 그해 12월 삼성은 64K D램 자체 개발에 성공했고 우리나라는 미국, 일본에 이어 세계 세 번째 반도체 기술 보유국이 됐다. 삼성전자는 세계에서 돈을 제일 많이 버는 회사로 우뚝섰다. 500원 지폐의 거북선 그림으로 영국 은행을 설득하고 조선소와 유조선을 동시에 지어낸 현대그룹 창업주 정주영 회장의 도전도 같은 계보다. SK하이닉스의 뿌리도 정 회장이 세운 현대전자다.최태원 SK그룹 회장이 하이닉스를 품을 때도 논란이 컸다. 2011년 인수를 결정하고 이듬해 2월 3조4000억원을 들여 채권단 손에 있던 하이닉스를 계열로 편입하자 회사 안팎에서 우려가 쏟아졌다. 그 하이닉스는 AI 시대 핵심인 고대역폭메모리(HBM) 세계 1위 기업이 됐다.굴곡의 성장사에는 눈을 감은 채 지금 우리 사회는 천문학적 이익을 어떻게 나눌지에만 몰두하고 있다. 성과급을 둘러싼 논란, 초과 이익과 초과 세수 논의가 대표적이다.최태원 회장은 지난 15일 대한상공회의소 제주 포럼 기자간담회에서 "성장이 필요하다면서도 성장하는 기업을 도와주는 제도는 많지 않다"고 토로했다. 최종 팹 완공을 최대 12년 앞당기기로 한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조차 전기와 용수 확보가 관건이다.지금의 호황은 미국의 중국 견제가 만들어낸 지정학적 특수(特需)에 가깝다. 온기는 반도체 산업에만 머물고 있다. 지난 6월 고용률은 63.4%로 석 달 연속 내려앉았고 청년층 고용률은 43.9%로 26개월째 내리막이다.경쟁 기업의 실탄 확보는 위기감을 키운다. 중국 창신메모리(CXMT)는 지난 27일 상하이증권거래소에 상장해 579억2000만위안, 한화 약 12조5000억원을 조달했다. 초과배정옵션이 전량 행사되면 조달액은 14조원을 넘는다. CXMT의 세계 D램 점유율은 지난해 4분기 4.7%에서 올해 1분기 7.6%로 뛰었다.중국 기업은 국가 자본에 자본시장 실탄까지 얹어 반도체에 쏟아붓는데 우리 기업이 처한 현실은 다르다. 경영권 방어 수단을 잇달아 걷어낸 '상법 3종 세트', 연구개발 현장에도 획일적으로 적용되는 주52시간제, 처벌 요건이 모호한 중대재해처벌법 등 기업 경영을 옥죄는 제도는 더 늘었다. 경제학자 조지프 슘페터는 자본주의를 앞으로 밀고 가는 힘이 자본과 제도가 아닌 낡은 것을 부수고 새 길을 여는 기업가의 '창조적 파괴'라고 했다. 도쿄선언이 그랬고 하이닉스 인수가 그랬다. 이병철 회장이 반도체에 도전하지 않았다면, 최태원 회장이 하이닉스를 품어 키우지 않았다면 월 수출 1000억달러는 없었다. 이익 분배의 셈법을 논하기보다 창조적 파괴가 일어날 토양을 만드는 것이 먼저다. 상황이 바뀌면 제도가 바뀌어야 한다. 제도를 만드는 사람과 따르는 사람의 태도 역시 변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미래 세대에게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없다.
[시대데스크]ETF만 문제가 아니다
최근 증시 변동성의 주범으로 삼성전자·SK하이닉스 단일종목 레버리지 상장지수펀드(ETF)가 지목됐다. 금융당국은 상장폐지, 진입장벽 강화, 레버리지 배수 조정 등 대책 마련에 분주하다. 그런데 이 상품만 잡으면 정말 증시 변동성은 잦아들까?아닐 것 같다. 한국 증시가 단 두 종목에 시장 전체가 휘둘리는 구조가 된 이유를 따져봐야 한다.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코스피에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차지하는 시가총액 비중은 지난해 말 34%대에서 올해 들어 50%를 넘어섰다. 한때 60%에 육박하는 수준까지 치솟기도 했다. 두 종목의 주가 변동에 코스피 전체가 흔들리는 구조가 돼 버린 것이다.이같은 쏠림은 다른 나라와 비교할 때 더 두드러진다. 미국 증시 대표 반도체 종목인 엔비디아조차 비중은 7%대에 그친다. 브로드컴, 마이크론은 각각 3%, 2%가 채 안 된다. 애플·마이크로소프트·아마존 등 여러 대형주가 함께 미국 주요 지수를 떠받치고 있다. 일본도 마찬가지다. 최근 일본 증시 시가총액 1위에 오른 반도체 대장주 키옥시아홀딩스도 비중은 4%대 정도에 불과하다.메모리 반도체 한 업종에, 그것도 단 두 종목에 시장이 걸려 있는 나라는 한국뿐이다. 실제로 올해 코스피는 두 차례 큰 폭으로 흔들렸다. 3월4일에는 지정학적 리스크로 12.1% 급락했고 6월 23일에는 반도체 업황 우려로 9.99% 빠졌다. 삼성전자, SK하이닉스라는 두 반도체 대형주의 하락세가 지수 전체의 낙폭으로 이어진 사례다.이같은 구조에서 단일종목 레버리지 ETF는 쏠림을 증폭시키는 장치일 뿐, 쏠림 자체를 만들어낸 원인은 아니다. ETF를 상장폐지하거나 규제를 강화해도 삼성전자·SK하이닉스에 시장이 묶여 있는 구조는 그대로 남는다. 반도체 업황이 다시 꺾이면 증시는 또 한 번 크게 흔들릴 수밖에 없다.문제의 뿌리는 산업 다각화의 실패에서 찾을 수 있다. 정부는 국민성장펀드를 150조원에서 200조원으로 늘리고 국가전략기술에 장기 자금을 공급할 한국전략기술파트너스(KSTP)까지 새로 만들기로 했다. 돈 주머니는 확실히 커졌다. 그런데 정작 이 돈을 어디에 쏟아부어야 할지, 어떤 산업을 다음 성장동력으로 키울지 그림은 잘 보이지 않는다.돈은 200조원이나 긁어 모았는데 이 돈을 어떻게 우리나라를 먹여 살릴 산업으로 육성할지가 보이지 않는다는 얘기다. 금융위원회가 자금을 공급하는 역할을 한다면 어디에 투자할지 방향을 제시하는 건 산업통상부의 몫이다. 반도체 사이클이 침체 국면에 접어들었을 때 그 자리를 대신할 제2, 제3, 제4의 챔피언을 키워내는 일이야말로 산업진흥 당국의 존재 이유다. 그런데 그런 전략은 잘 보이지 않는다는 지적이 업계 안팎에서 나온다.반도체 기업이 거둔 초과이익을 어떻게 써야할지를 두고서도 정부 내에서 의견이 모아지지 않은 듯하다. 최근 잇따른 정부 주최 토론회에서 산업통상부는 미래를 위한 투자로 돌려야 한다고 밝혔고, 고용노동부는 공정한 분배가 먼저라고 맞선다. 반도체가 벌어들인 돈을 미래 투자와 분배 중 어디에 먼저 쓸지를 놓고는 목소리가 오가지만, 정작 그 미래 투자가 구체적으로 어떤 산업을 향해야 하는지에 대한 논의는 없는 모습이 아쉽다.레버리지 ETF를 둘러싼 논쟁이 뜨거운 사이 정작 필요한 산업전략 논의는 뒷전으로 밀려나 있는 것이다. ETF 규제는 변동성을 잠시 누르는 진통제는 될 수 있어도 근본 처방은 아니다. 지금이라도 정부가 반도체 이후를 대비한 산업 다각화 전략을 짜는 데 집중해줬으면 좋겠다.
[시대데스크]지방정부 경쟁력 후퇴시키는 인사 리스크
6·3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정치 드라마를 새로 쓴 오세훈 서울시장이 취임 일주일 만에 인사 태풍을 몰고 왔다. 오 시장의 재선으로 조직 안정을 기대했던 서울시 내부는 예상 못한 인적 쇄신에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연초 행정1부시장을 포함한 주요 고위직의 교체가 이뤄졌고 시정 연속성을 위해서는 인사 폭이 크지 않을 것이라는 세간의 예상이 엎어진 배경에 '정치 인선'의 논란이 있었다. 선거 운동 과정에서 일부 고위 공무원이 오 시장의 상대 후보였던 정원오 측에 지지 의사를 표시한 것으로 알려지며, 대규모 인사의 빌미를 제공했다는 해석이 공공연히 나왔다.선출직 광역단체장이 새 임기를 시작하며 시정 철학을 공유하는 진용을 구축하고 이를 위해 인사권에 많은 권한과 책임이 있다는 사실은 부인하기가 어렵다.다만 인사는 인재를 중용하는 것이 본질이며 타당성이 있어야 한다. 인사의 과정과 결과가 숙청이라는 프레임에 갇히면 쇄신의 명분도 빛을 잃게 된다. 재선 시장의 진정한 위엄은 힘을 과시하는 인사가 아닌, 반대편을 포용하는 리더십에서 나올 수 있다. 서울시는 대한민국 최대 지방정부이자 중앙정부에 버금가는 중요 행정기관이다. 4년마다 바뀌는 선거 결과에 따라 인사 후폭풍을 피하지 못하고 조직 내부가 혼란과 눈치보기로 흔들리는 현 상황을 가볍게만 봐선 안된다. 서울시 조직 규모는 본청 공무원 약 2만명과 구청, 산하 공공기관 6만~7만명을 포함해 8만~9만명에 달한다. 3급 이상에 해당하는 본청 44개 실·본부·국의 30개 장이 지난 13일자로 교체됐다. 서울시와 정책 업무를 조율하는 구청과 산하기관 직원들도 인사를 앞두고 술렁였다는 게 관가 안팎의 말이다.이 같은 인사의 여파는 과거 전임 시장 때도 겪어온 지방정부의 한계점을 보여준다는 지적이다. 인사 단행 후 조직 정비까지 길게는 수개월이 소요된다.━소신 있고 봉사정신 투철한 공무원 조직 필요━행정기관 인사는 경쟁력 있는 구성원을 이끄는 리더의 능력을 보여준다. 민주주의 꽃인 선거가 정당성을 얻으려면 정치적인 기여도나 줄서기에 의해 인선이 좌우되지 않아야 한다.서울시 공무원의 맨파워는 선진국의 어느 나라에도 뒤처지지 않는다고 평가한 외부 인사가 있다. 이렇게 능력 있는 공직 사회가 정치성에 따라 움직이면 소신 있게 일할 수 있는 관료는 줄어든다. 정권의 입맛에만 맞추려는 기회주의 문화가 팽배해진다.지금 서울시에 필요한 것은 인적 청산보다, 시정의 안정과 발전을 목적으로 한 시스템 인사가 아닐까.오 시장은 서울시를 글로벌 톱3 도시의 반열로 올려놓겠다는 구상을 내놨다. 국제사회에서 이미 하나의 브랜드가 되어버린 서울은 아시아 허브이자 글로벌 시티로 인정받고 있다.경기 침체와 민생 위기 속에서 서울시가 흔들림 없이 나아가려면 지금 필요한 건 당파를 떠난 조직의 안정과 협치다.정치적인 계산이나 대립보다 오로지 능력과 시민을 향한 봉사 정신이 존중되는 탕평 인사가 향후에 이뤄졌으면 한다.
[시대데스크]"어색한 사투리 쓰면 안 되노?"
"어디 가노?" vs "어디 가나?"영남 방언에서 이 두 표현은 완전히 다른 질문이다. '어디 가노?'는 행선지를 묻는 반면 '어디 가나?'는 단순히 어딘가로 이동 또는 외출하는지 여부를 묻는다.이 고유한 언어 체계에서 의문형 어미 '노'와 '나'는 다른 용법을 지닌다. 대개 '노'는 어디, 언제, 왜, 뭐 등 의문사가 있는 의문문 끝에 붙는다. 의문사 없는 의문문에 '노'가 붙으면 어색하다. 예컨대 '느그 아부지 뭐 하시노?'는 흔히 쓰이지만, '느그 아부지 하시노?'는 전통적 영남 방언으로 보기 어렵다.필자를 비롯한 영남 네이티브 스피커들 입장에선 의문사 없는 '가노?' '하시노?' 등의 표현은 가끔 불편함을 유발한다. 외국인이 뜨거운 된장찌개에 찬물을 붓는 장면을 보는 느낌이랄까. 피자에 파인애플을 올리거나 스파게티 면을 부러뜨리는 모습을 본 이탈리아인이 이런 기분일까.그러나 어쩌겠나. 위화감은 주지만 직접적 피해를 끼치는 건 아닌데. 그냥 듣고 넘길 수밖에 없다. 만약 이런 상황에서 오지랖을 부려 "가노는 일베식 표현"이라고 몰아세운다면 일종의 폭력이 될 수도 있다. 상대방은 정치적 의도 없이, 맥락에 대한 이해 없이 말했을 수도 있으니 말이다.스위스 출신의 정치 사상가 뱅자맹 콩스탕은 "근대적 자유(liberty)의 핵심은 사생활을 국가와 다수의 시선으로부터 지켜내는 데 있다"고 했다. 콩스탕은 '고대인의 자유'와 '근대인의 자유'를 구분했다.그에 따르면 '고대인의 자유'는 고대 그리스 아테네나 공화정 시대 로마에서처럼 정치에 참여할 권리를 말한다. 반면 '근대인의 자유'는 국가로부터 간섭받지 않을 권리를 뜻한다. 이는 훗날 영국의 정치철학자 이사야 벌린이 주창한 '타인의 간섭으로부터 내버려질 자유', 즉 '소극적 자유'라는 개념으로 발전했다. 어법에 맞지 않는 표현이라도 그 말을 쓰는 건 개인의 자유다. 그러나 그 표현이 누군가에게 상처나 피해를 준다면 얘기가 달라진다."개인의 자유는 타인의 자유가 시작되는 곳에서 끝난다." 19세기 영국의 철학자 존 스튜어트 밀이 역작 '자유론'에 남긴 이 문장은 개인이 누릴 수 있는 자유의 범위가 어디까지인지에 대한 통찰을 담고 있다. 다른 사람의 자유를 침해하는 자유까지 허용할 순 없다는 얘기다.차별과 혐오의 언어, 피해자와 소수자의 상처를 의도적으로 들쑤시는 행동을 '표현의 자유'라는 미명으로 감싸주긴 어렵다. 지난 4일 미국 건국 250주년 독립기념일을 맞아 백인우월주의 단체 '애국전선(Patriot Front)' 회원 400여 명이 복면을 쓴 채 남부연합기를 앞세우고 워싱턴 D.C. 한복판을 행진했다. 과거 흑인들을 폭행·살해한 KKK단을 떠올리게 하는 이런 행동까지 표현의 자유라며 품어줄 수 있을까.오스트리아 출신 철학자 칼 포퍼는 저서 '열린 사회와 그 적들'에서 '관용의 역설(paradox of tolerance)'을 강조했다. 무제한의 관용은 결국 불관용한 세력이 사회를 통째로 차지하게 만들어 결과적으로 관용 그 자체를 파괴하고 만다는 경고다.자유와 관용의 경계는 사람마다 다르다. 그걸 누군가 획일적으로 정하는 순간 독재가 된다. 그러나 간극을 좁힐 순 있다. 사회적 숙의를 통해서만 가능한 일이다. 최근 걸그룹 리센느(RESCENE) 원이를 둘러싼 '무섭노' 논쟁과 배재고 등의 '스타벅스' 논란이 갈등만 증폭시키는 소모적 해프닝으로 끝나지 않길 바란다. 대신 표현의 자유를 어디까지 인정할 것인지에 대한 사회적 논의의 출발점이 되길 기대한다.
[시대데스크]"조금 더 두고보자"
남도 어느 집이든 사람이 임종을 맞으면 곧장 관으로 들어가지 않는다. 방 한쪽에 병풍을 두른 뒤 대나무로 엮은 칠성판을 펴고 그 위에 망자를 모신다.대나무의 성질은 차다. 살아 있는 체온의 흔적을 지우듯 서서히 식어가는 육신을 받아낸다. 바람이 통하고 습기가 빠지는 칠성판 위에서 몸은 더 이상 인간이 아닌 쪽으로 넘어갈 준비를 한다.그 시간은 단순한 정리의 시간이 아니다. 남도에서는, 적어도 필자가 본 그 장면에서는, 그 시간을 확정된 죽음의 이후라고 부르지 않았다.누군가는 숨이 정말 끊어진 것인지 다시 살피고 누군가는 혼이 아직 떠나지 않은 건 아닐까를 말없이 가늠한다. 아무도 크게 입 밖에 내지는 않지만 그 묘한 침묵 속에는 하나의 공통된 태도가 흐른다."조금 더 두고보자."칠성판은 그래서 기묘한 자리다. 이미 끝난 것 같지만 아직 끝났다고 단정하지 않는 자리. 보내기 전 마지막으로 머물게 하는, 어쩌면 돌아올 가능성까지 완전히 닫지 않는 경계의 공간이다. 그 위에 놓인 존재는 명확하게 규정되지 않는다.산 자도 죽은 자도 아닌 채, 시간만이 조용히 판가름을 대신하는 상태로 머문다. 오래전 그 장면을 보며 죽음이란 단번에 끝나는 일이 아니라 사람들이 둘러앉아 조금씩 받아들이는 과정이라는 사실을 배웠다.홈플러스 사태는 '치료'와 '연명'의 경계가 불분명해 보였다. 다시 살릴 의지인지 시간을 벌기 위한 버팀인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어느 순간부터는 기업을 살리려는 노력보다 상태를 유지하는 데 더 가까워 보였다.칠성판 곁에는 끝까지 눈을 떼지 않는 사람이 있다. 살아날 가능성이 희박해 보여도 마지막 순간까지 자리를 지키는 사람 말이다. 홈플러스를 둘러싼 시간에는 그런 기척이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마치 칠성판 위에 올려놓고는 끝까지 지켜보는 사람이 사라진 형국처럼 말이다. 기업의 실패에도 끝까지 감당해야 할 시간이 있다. 그러나 그 과정을 함께 책임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실패가 아니라 방치에 가깝다.이제는 그 긴 시간마저 끝을 향해 가는 듯하다.홈플러스가 보여주는 풍경은 단순한 경영 실패가 아니다. 책임의 부재가 어떤 상태를 만들어내는지를 드러낸다. 아직 보내지도, 되살리지도 못한 채 그대로 놓여 있는 것. 그것이 지금 홈플러스가 올라앉아 있는 자리이며 MBK가 남긴 자리다.
[시대데스크]언더독, 아웃사이더, 파이터에게 열린 미래
2014년 업무차 세콰이어 캐피탈을 방문했다. 세콰이어는 유망 스타트업을 골라 초기에 투자하는 벤처캐피털(VC) 중에서도 세계 최고로 꼽히는 회사다. 사무실은 독특했다. 샌프란시스코 외곽의 골프장을 인수해 개조한 곳으로, 클럽하우스가 곧 일터였다. 압권은 로비였다. 로비의 가장 넓은 벽으로 그들이 투자한 회사 창업자들의 사진이 흘러갔다. 스티브 잡스(애플), 래리 페이지와 세르게이 브린(구글), 래리 엘리슨(오라클), 젠슨 황(엔비디아)…. 실리콘밸리의 역사가 벽 위를 지나가고 있었다.미팅 상대는 다리에 깁스를 하고 목발을 짚고 나왔다. 스위스에서 스키를 타다 다쳤다며, 대단히 재밌는 일이라도 겪은 듯 웃었다. 한국에 돌아와 이 회사가 궁금해 찾아봤다. 성과는 분위기보다 더 남달랐다. 21세기 IT 산업이 세콰이어의 자본을 먹고 자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 바탕에 깔린 철학은 홈페이지에 걸린 '우리의 신조(Our Ethos)'라는 글에 담겨 있었다."창의적인 영혼들. 언더독들. 결연한 자들. 굳센 자들. 지치지 않는 자들. 아웃사이더들. 굴하지 않는 자들. 독립적으로 사고하는 자들. 파이터들. 그리고 진정한 신봉자들."타임지 기자로 실리콘밸리를 취재하다 투자자가 된 마이클 모리츠가 쓴, 세콰이어가 '파트너로 삼고 싶은 창업자상'이다. 모리츠는 곧장 "이런 사람은 극히 드물다"고 덧붙였다.드문 데는 이유가 있었다. 그날 세콰이어 로비를 장식했던 얼굴들은 기질만 남달랐던 게 아니다. 상당수가 코딩에 능통하거나, 그런 공동창업자를 곁에 둔 이들이었다. 의지와 아이디어만으로는 혁신의 문턱을 넘을 수 없었다."가장 '핫한' 새 프로그래밍 언어는 영어다." 요즘 AI 업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인물, 안드레이 카파시가 2023년 한 말이다. 오픈AI 공동창업자이자 테슬라의 자율주행을 이끈 그는 파이썬 같은 프로그래밍 언어가 아니라 사람의 말로 컴퓨터를 부리는 시대가 온다고 내다봤다. 3년이 지난 지금 그의 '예언'은 현실이 됐다.카파시는 지난해 이 새로운 방식에 '바이브 코딩'이라는 이름도 붙였다. 영국 콜린스 사전은 지난해 이 신조어를 올해의 단어로 선정했다.카파시는 2025년 강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갔다. "LLM은 기술이 확산하는 방향을 뒤집는다." 전기와 컴퓨터, 인터넷까지 거의 모든 기술은 정부와 대기업이 먼저 쥐었다가 한참 뒤에야 대중에게 흘러왔다. 반면 AI는 평범한 개인들이 먼저 썼다.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개인에게 먼저 도착한 기술'인 셈이다.세계 최고 개발자로 꼽히는 카파시조차 올해 "프로그래머로서 이렇게 뒤처졌다고 느낀 적이 없다"고 했다. AI 도구가 그만큼 좋아져, 전문가의 우위마저 빠르게 무너진다는 뜻이다. 최고와 보통의 거리가 좁혀지는 것, 그것이 '기술 민주화'의 가장 선명한 증거다.'바이브 코딩' 덕에 한 사람이 만들 수 있는 임팩트가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이 커졌다. 이스라엘의 한 개발자는 말로 설명하면 앱을 통째로 만들어주는 서비스를 혼자 개발해, 외부 투자 없이 6개월 만에 1000억원 넘는 금액에 매각했다. 예전 같으면 엔지니어 수십명이 매달렸을 일이다. 한국에서도 같은 장면이 펼쳐지고 있다. Z세대 사이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영상 일기 앱 '셋로그'는 AI 시대 1인 창업의 산물이다. 입소문만으로 애플과 구글 앱마켓 SNS 부문 1위에 올랐고, 지금도 두 마켓 모두 1위다. 데이터 분석 업체 와이즈앱·리테일 집계로는 5월 월간활성이용자(MAU)가 778만명에 달했다. 이렇게 코드가 흔해질수록 귀해지는 건 '질문'이다. 와이어드를 공동창업한 기술사상가 케빈 켈리는 2016년 저서에서 AI가 발전할수록 "답은 값싸지고 질문은 값비싸진다"고 내다봤다. 답은 기계의 몫이 됐고, 질문은 인간의 몫으로 남았다. 무엇을, 왜 만들 것인가. 그 답은 현실의 문제에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으로부터 나온다. 젠슨 황 엔비디아 CEO가 2024년 아이들에게 코딩 대신 생물학과 제조업, 농업 같은 현장 전문성을 가르치라고 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제 프로그래밍 언어는 인간의 언어"이고 "모두가 프로그래머"이기 때문이다.12년 전 세콰이어 로비의 벽을 채웠던 얼굴들을 기억한다. 그들처럼 되는 데 기술은 더 이상 필요조건이 아니다. 더 절실해진 건 현실을 이해하는 깊이, 그리고 더 나은 무언가를 만들려는 의지다. 거창한 무대도 필요 없다. 변화는 각자의 일터에서, 눈앞의 문제를 스스로 풀어내는 순간마다 일어난다. 혁신의 문은 이제 더 많은 언더독과 아웃사이더, 파이터들에게 열려 있다. 불합리·모순과 타협하지 않는 이단아들이여 그 문으로 들어서라. 기다리던 시간이 왔다.
[시대데스크]바이오 데스밸리, 대출로는 못 건넌다
국민성장펀드의 첫 바이오 지분투자 소식을 듣고 판교테크노밸리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한국의 실리콘밸리로 불리는 판교의 한 창업지원시설. 정부와 공공기관, 민간 지원을 받는 이곳은 자금난으로 어려움을 겪는 기업이 적지 않다. 현장에서 만난 바이오벤처 대표는 "입주 당시 기업 중 지금까지 자리를 지키는 곳은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라며 "정책자금이 바이오 스타트업(창업초기 기업)에도 숨통을 틔워주는 신호가 되길 바란다"고 했다. 다른 바이오벤처 한 연구원도 "연구보다 투자설명회(IR) 준비가 먼저인 현실이 안타깝다"고 털어놨다.정부 주도의 국민성장펀드가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올해부터 5년간 150조원 규모로 추진되는 이 펀드는 AI, 반도체, 이차전지, 바이오·백신 등 첨단전략산업에 재정을 마중물 삼아 장기 자금을 공급하는 민관 합동 정책금융 프로그램이다. 바이오·백신 분야에도 11조6000억원이 배정됐다. 최근 금융위원회 기금운용심의회는 리가켐바이오사이언스에 5000억원 규모의 직접 지분투자를 승인했다. 앞서 올해 비티젠에 850억원, SK바이오사이언스에 3000억원 규모의 장기·저리 대출 지원도 이뤄졌다.첫 단추는 의미가 있다. 국민성장펀드가 대출뿐 아니라 직접 지분투자도 병행하겠다는 신호를 시장에 보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짜 시험은 이제부터다. 첫 투자의 규모보다 다음 투자, 그다음 투자가 어디로 향하느냐가 국민성장펀드의 성격을 결정한다.물론 대출도 필요하다. 생산시설을 늘리거나 상업화 단계에 들어선 기업에는 저리 자금이 큰 힘이 된다. 비티젠의 생산시설 증설, SK바이오사이언스의 글로벌 임상과 상업화 준비가 그런 사례다. 그러나 대출은 결국 갚아야 할 돈이다. 담보와 현금흐름, 상환 능력이 있는 기업일수록 문턱을 넘기 쉽다. 매출도 담보도 부족한 초기 바이오벤처에겐 초저금리 대출조차 그림의 떡이다.초기 바이오벤처가 필요한 것은 또 하나의 빚이 아니라 시간을 버틸 자본이다. 후보물질은 있지만 임상 1상에 들어갈 자금이 없어 연구 일정을 늦추는 기업은 적지 않다. 신약 개발은 흔히 '돈을 태워 시간을 사는 과학'이라고 한다. 후보물질 발굴부터 임상 1상, 2상, 3상으로 갈수록 필요한 자금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기술보다 먼저 돈이 바닥나는 순간 혁신은 연구실 문턱을 넘지 못한다.정책금융의 존재 이유도 여기에 있다. 민간 자본이 충분히 접근할 수 있는 기업에만 정책자금이 반복적으로 집중된다면 정책금융의 의미는 반쪽에 그친다. 진짜 필요한 곳은 민간이 선뜻 들어가지 못하는 위험 구간이다. 비임상에서 임상 1상으로 넘어가는 초기 바이오벤처의 데스밸리를 메우는 일이야말로 국민성장펀드가 해야 할 역할이다.투자중심 지원도 만능은 아니다. 신약 개발은 상업화까지 10년 이상 걸리지만 정책 자펀드의 운용 기간은 대체로 5년 안팎이다. 펀드 만기 안에 투자금을 회수해야 하는 위탁운용사(GP) 입장에서는 초기 바이오벤처보다 회수가 쉬운 후기 임상 기업이나 상장사에 눈길이 갈 수밖에 없다.결국 관건은 돈의 크기가 아니라 성격이다. 150조원이라는 펀드 숫자보다 중요한 것은 자금이 가장 절실한 초기 바이오벤처까지 내려가느냐다. 국민성장펀드는 대형 기업 몇 곳의 성공 사례를 만드는 장식이 돼선 안 된다. 대출은 상업화를 앞둔 기업의 숨통을 틔울 수 있지만 데스밸리 한복판의 초기 바이오를 살리는 데는 한계가 있다. 바이오 생태계가 기다리는 것은 위험을 함께 견디는 인내자본이다.정부가 바이오를 미래 성장전략의 핵심 축으로 삼겠다는 방향은 맞다. 이제 중요한 것은 돈을 얼마나 많이 빨리 집행하느냐가 아니라 어디에 어떤 방식으로 흘려보내느냐다. 국민성장펀드가 판교의 작은 연구실까지 활력을 불어넣을 때 K-바이오는 또 다른 신화를 쓸 수 있다. 바이오 데스밸리(창업 후 자금난)는 대출로만 건널 수 없다.
[시대데스크]반도체 공장 유치, 압박보다 명분을 만들어야
반도체 공장 유치에 사활(死活)이 걸렸다. 반도체 초격차 사수와 지역균형발전을 둘러싼 지방자치단체들의 '인재와 영토 전쟁'이 본격화하고 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반도체 신공장의 호남권 유치를 둔 구애가 뜨겁다. 2026년 7월 예정된 광주전남특별시의 탄생이 맞물리며 관련 논의가 속도를 내고 있다.지자체와 정치권은 장밋빛 청사진을 제시하며 해당 기업을 향해 투자를 독려하고 있지만 이 같은 행동을 구애보다 압력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명분과 성과에 쫓겨 억지로 공장만 덩그러니 지어놓는다고 해서 지역 경제가 저절로 살아날 수는 없다. 첨단 산업의 기업 유치란 단순히 건물을 세우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해당 기업의 경영 활동에 불편함이 없어야 하고 그곳에서 땀 흘릴 인재들의 '삶'도 만족스러워야 한다.이와 관련된 구체적인 논의는 없기에 반도체 업계가 호남행을 바라보는 시선에는 현실적 우려가 짙게 깔려 있다. 가장 큰 장벽은 공장 가동에 필수적인 '공업용수'와 '전력'이다. 평택 캠퍼스 수준의 공장은 하루 수십만 톤의 초순수가 필요하다. 평택 P3 라인 기준 전력 수요만 약 1GW에 달하는데 광주광역시 전체 가정용 전력 소비량과 맞먹는다.과거 극심한 가뭄으로 제한 급수 위기까지 몰렸던 호남의 수자원 인프라로는 감당하기 벅찬 규모다. 신재생에너지(RE100) 발전 비율이 높다지만 순간의 정전도 허용되지 않는 반도체 공장 특성상 안정적인 기저발전망 확보는 필수다.'인재 남방한계선'도 문제다. 수도권을 넘어선 지역으로 우수 연구 인력과 숙련된 엔지니어들은 떠나려 하지 않는다. 반도체 업계에선 대전 이남 발령은 사실상 퇴사 통보로 받아들이는 분위기다. 수도권 메가 클러스터와의 물리적 단절도 수백 개의 소재·부품·장비(소부장) 협력사들과의 실시간 대응 능력을 떨어뜨린다. 글로벌 경쟁력을 약화시킬 수 있는 요인이다.새로 출범하는 광주전남특별시가 전남의 자원과 광주의 인프라를 원스톱으로 제공한다는 것은 매력적이지만 선언만으로는 부족하다. 기업이 입지를 결정할 때 따지는 것은 감성적 구애가 아니라 경영 타당성이다. 용수·전력의 안정적 공급을 국가가 책임지는 특별법적 근거, 소부장 협력사의 동반 입주를 유도하는 클러스터 조성, 인허가 원스톱 처리와 세제 혜택 패키지 등이 먼저 테이블에 올라야 한다.수도권 메가 클러스터와의 물리적 단절에 따른 조달 리드타임(부품·장비 확보부터 실제 투입까지 걸리는 시간) 증가와 수율 리스크는 기업이 호남행을 주저하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다. 협력사 없는 공장은 고립된 섬에 불과하다.몇 년 전 일본 구마모토현에서 대만 TSMC 공장 유치에 성공해 화제가 됐다. 일본은 막대한 보조금과 규제 철폐는 물론 소니반도체솔루션즈와 덴소 등을 합작 파트너로 끌어들여 안정적인 생태계를 제공했다. 구마모토현은 자부심 강한 대만 엔지니어들이 기꺼이 일본행을 택할 수 있도록 '정주(定住) 인프라'도 이식했다.TSMC 임직원 자녀를 위한 국제학교를 확충했고 인근 병원에는 전담 통역을 배치해 불편함을 느끼지 못하게 했다. 직원 이직 없이 공장 가동률과 수율이 유지돼야 글로벌 경쟁력도 지킬 수 있기 때문이다. 기업을 압박해 공장을 짓게 한 것이 아니라 기업과 직원이 겪을 애로사항을 선제적으로 해결에 나섰다. 넓은 부지를 줄 테니 공장을 짓고 지역을 살리라는 식의 1차원적 접근으로는 글로벌 첨단 생태계를 품을 수 없다. 정치가 기업의 주소를 바꿔 공장을 세운다고 해서 초격차가 저절로 유지되지는 않는다. 호남을 진정한 반도체 거점으로 만들려면 압력보다 '이유'를 만들어야 한다. 기업이 자발적으로 뿌리내릴 수 있는 경영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먼저다. 진정한 구애는 그렇게 시작된다.
[시대데스크]홈플러스 유감
주말마다 아이를 데리고 가던 홈플러스 문화센터가 지난달 문을 닫았다. 환하게 웃으며 아이에게 손을 흔들어주던 창구 직원도 보이지 않았다. 다른 문화센터로 발길을 돌리자 아이는 "거기 왜 없어졌어요? 망했어요?"라고 묻는다. 어디서부터 대답하는 게 좋을까 고민했다. PEF(사모펀드), 법인회생, DIP(긴급운영자금) 금융, 관계인 집회, 분식회계 등 어른들에게도 어려울 수 있는 얘기를 어떻게 설명할지가 막막했다.홈플러스 사태가 불거진 지 1년이 넘었다. 2025년 법인회생 절차를 신청한 뒤 홈플러스는 지금도 출구를 찾지 못한 채 표류하고 있다. 전국 37개 매장이 잠정 휴점에 들어갔다가 결국 폐점으로 확정됐다. 5년 연속 적자에 당기순손실만 1조 원. 직전 연도에 1조5000억원에 달했던 자본총계는 2391억원으로 줄었다. 납품업체 대금이 밀리자 매장 매대가 텅 빈 채로 고객을 맞았고, 직원들은 월급을 받지 못한 채 농성을 벌였다. 노동조합 지도부가 세 차례나 무기한 단식에 들어가야 했던 이유다.이 사태의 뿌리는 오롯이 대주주의 실패에 있다. MBK파트너스는 홈플러스를 인수한 뒤 대형마트 업황이 구조적으로 침체하는 동안 실질적인 체질 개선 없이 경영을 이어갔다는 지적을 받는다. 적자가 쌓이는 상황에서도 제때 구조조정에 나서지 않았다. 검찰은 MBK가 1조 원대 분식회계로 재무제표를 조작한 뒤 회생 신청을 했다고 발표했다. 사실이라면 채권자와 시장 전체를 기만한 행위다. 구속영장은 기각됐지만 수사는 현재진행형이다. 수만 명 직원의 생계와 수백 개 협력업체의 운명이 걸린 기업을 이 지경으로 만든 책임은 무엇으로도 덮이지 않는다.위기가 터진 뒤 행보에서도 아쉬움이 남는다. 직원들이 월급을 받지 못하고, 납품업체가 물건을 공급하지 않았다. 매대가 비어가는 동안 MBK의 자구 노력은 법원과 여론의 압박이 정점에 달한 뒤에야 모습을 드러냈다. 김병주 회장이 자택을 담보로 내놓고 1000억원을 투입했다고는 하지만 사태 초기에 마땅히 했어야 했던 일이었다. 뒤늦은 결단을 책임의 이행으로 포장하는 모습 때문에 되레 질타를 받기도 했다.MBK는 메리츠를 탓한다. 메리츠의 DIP 자금 지원이 늦어진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메리츠는 채권자다. 담보가치 하락을 이유로 추가 지원에 신중한 태도를 취한 것은 채권자 본연의 역할 범위 안에 있다. 이번 사태를 만든 원인 제공자와 같은 선상에 놓는 것은 무리다. 경영 실패와 회계 조작 의혹을 안고 있는 대주주의 책임과 비교할 수 없다.7월 초 관계인집회를 앞두고 양측이 여론전을 벌이는 동안 정작 급여를 기다리는 직원들의 시간은 멈춰 있다. 지금 당장은 자금이 풀려야 한다. 메리츠와의 2000억원 협상이 속히 마무리되고, 홈플러스 익스프레스 매각 대금 1206억 원이 현장에 투입돼야 매대가 채워지고 급여가 지급된다. 7월3일 회생계획안 가결 기한 안에 실질적 구조가 잡혀야 한다.책임을 지는 것도 당연히 뒤따라야 한다. 분식회계 의혹의 진상은 수사를 통해 낱낱이 밝혀져야 하고, 경영 실패의 몫은 경영진이 져야 한다. 노동자와 협력업체의 피해에 대한 실질적 보상도 빠짐없이 이뤄져야 한다.7월3일이면 회생계획안이 가결될지, 홈플러스를 청산할지, 가결 여부를 결정할 기한을 추가로 연장할지가 결정된다. 문화센터가 왜 문닫아야 하는지 묻는 아이에게 이렇게 답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잘못한 사람들이 책임을 졌고, 피해 입은 사람들이 회복됐다"고. 아직은 이같은 답을 할 때가 아닌 것 같다. MBK와 메리츠가 책임공방을 하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홈플러스 직원들의 시간은 흐르고 있다.
[발행인노트]더 많은 젊은 기자들이 필요합니다
두번째 발행인 노트입니다. 첫번째 발행인 노트에서 '공론의 장을 여는 숙의 미디어가 되겠습니다'라고 다짐했습니다. 이후 3개월간 나름의 노력을 해왔습니다.좋은 사람을 모으는 일이 가장 중요하면서도 어려웠습니다. 공론의 장을 열기위해서는 논설위원이 필요했습니다. 석 달 전 정용관 주필을 포함해 3명이던 논설위원실이 지금은 6명으로 진용을 갖추었습니다.정치담당 논설위원으로 박창억 전 세계일보 논설실장이 합류했습니다. 경제담당으로 박중현 전 동아일보 논설위원이 동참했습니다. 마지막 사회담당으로 김준술 전 Jtbc 보도국장이 함께 했습니다. 주요 언론사에서 남다른 역량을 축적해온 중진 기자들이 <동행미디어 시대>의 취지에 공감해 한 자리에 모인 셈입니다.사회부도 새로 만들었습니다. 사회부장은 동아일보 사건팀장 출신인 이재명 전 GS 상무보가 맡았습니다. 이재명 사회부장은 언론계를 떠나 다양한 경험을 하던 중 다시 기자의 자리로 돌아왔습니다. <시대>는 기자들의 다양한 경력을 존중합니다. 이상언 제도혁신연구소장은 중앙일보 논설위원 출신이지만 <시대>에 합류하기 직전 SPC 부사장이었습니다. 이상언 소장 역시 <시대>의 취지에 공감해 다시 언론인으로 돌아왔습니다.사회부 경력기자들도 외부에서 합류했습니다. 조선일보 자회사(조선NS) 출신, 통신사 뉴스1 출신 경력기자들입니다. 이들은 입사 하자마자 잠실올림픽공원 핸드볼 경기장으로 달려갔습니다. 지방선거 투표용지 부족사태에 항의하는 2030 시위 현장이었습니다.여러 집단이 뒤섞여 복잡한 양상이었지만 <시대> 사회부 기자들은 젊은이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였습니다. 당파성에 매몰될까 우려해 기성 정치권을 경계하면서, SNS를 이용해 자발적으로 움직이고, 자신들의 참정권을 분명히 주장하는 모습은 '새로운 정치의 시대'를 예고하는 듯 했습니다.<시대>는 일차적으로 현장 2030들을 인터뷰하면서 그 목소리를 전달했습니다. 나아가 이들 2030에게 '3가지 질문'을 던지는 형식으로 현상을 분석하는 기획시리즈를 연재했습니다. 숙의미디어 <시대>의 노력은 시위 이후에도 계속 이어질 것입니다. '2030이 우리 사회에 던지는 질문'이 무엇이고, 어떤 해법이 가능한지 따져보는 기획취재와 포럼 개최를 계획하고 있습니다.<시대>는 조직을 확대하고 취재영역을 넓힐 뿐 아니라 우리의 뉴스콘텐츠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플랫폼 확장도 노력해 왔습니다. 몇가지 뉴스 동영상 제작을 시작했습니다. 논설위원을 겸하고 있는 이상복 미디어랩 소장이 현장 취재기자들과 함께 주요 뉴스를 짚어보는 '뉴스언팩'이 대표적입니다. 취재현장에서 돌아와 스튜디오에 앉은 젊은 기자들의 눈빛엔 활기가 돕니다.<시대>엔 더 많은 젊은 기자들이 필요합니다. 모토 '존중받는 개인, 부강한 대한민국'을 함께 만들어갈 수습기자를 공모 중입니다. <시대>는 '언론의 공공성 회복 프로젝트'입니다. 언론 본연의 기능과 역할을 다하려는 시도입니다. 저널리스트의 꿈을 가진 젊은이라면 응당 도전해 볼만한 기회입니다.정치적 경제적 양극화로 사회적 갈등이 점증하는 상황이기에 언론 본연의 기능회복은 더 절실합니다. 쉽지 않은 길이지만 반드시 필요한 일이기에 <시대>는 소신 있게 나가고자 합니다.
[시대데스크]당신의 '인생라면'은 무엇입니까
신라면이 마흔 살이 된다. 1986년 9월29일, '매운맛'을 전면에 내세우고 등장한 이 라면은 1991년 국내 시장점유율 1위에 오른 뒤 35년 넘게 정상을 지켜왔다. 유행이 수없이 바뀌고 입맛이 변해도 한 제품이 이렇게 오래 기준 자리를 지킨 경우는 드물다.신라면은 음식이 아니라 기준이었다. 출시 당시를 들여다보면 그 답이 보인다. 1986년 9월29일자 신문 광고에는 '사나이 대장부가 울긴 왜 울어!'라는 문구와 함께 '우리나라 전통의 매운 입맛을 돋워주는 새로운 라면'이라는 설명이 붙었다. 단순히 맵기만 한 제품이 아니라 한국적인 매운맛을 표방한 것이다. 같은 해 신문 기사에서는 표고버섯을 동결건조해 독특한 향을 냈다는 설명이 등장한다. 매운 맛과 향, 그리고 한국적 정체성이 처음부터 설계돼 있었던 셈이다.이후 벌어진 일은 누구나 안다. 신라면은 1등이 됐고 더 중요한 것은 '기준'이 됐다. 사람들은 '얼마나 맵냐'를 설명할 때 자연스럽게 신라면을 떠올렸다. 어떤 라면은 신라면보다 덜 맵고 어떤 라면은 더 맵다는 식으로 평가됐다. 특정 브랜드가 하나의 척도가 되는 순간, 그것은 상품을 넘어 문화가 된다.도전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2010년대 초반, 닭고기 육수를 앞세운 '하얀 국물 라면'이 시장을 휩쓸었다. 매대가 뒤집히고 유통 현장에서는 "대세가 바뀌었다"는 말까지 나돌았다. 당시 한 선배 기자는 단언했다. "신라면은 끝났다." 그때 이렇게 되물었다. "하얀 국물 라면만 일주일 먹을 수 있습니까? 신라면은 가능한데요."그 질문은 결국 시간을 향한 것이었다. 유행은 강하지만 짧고 기준은 조용하지만 오래 간다. 시간이 지나자 답은 명확해졌다. 하얀 국물은 '한 시기의 기억'으로 남은 반면 신라면은 여전히 '현재형'이다.신라면의 위상은 이제 음식의 영역을 넘는다. 빅맥지수, 라테지수처럼 물가를 체감하는 기준으로 '신라면지수'가 거론된다. 100개국 이상에서 팔리는 제품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한 나라의 즉석식품이 글로벌 생활 기준이 되는 현상은 흔치 않다. 신라면은 그만큼 한국인의 입맛을 넘어 세계인의 감각 속으로 들어갔다.그럼에도 이 라면을 설명하는 가장 정확한 방식은 결국 하나다. '기억.' 마르셀 프루스트는 마들렌 한 조각으로 잊고 있던 시간을 되살려낸다. 신라면도 크게 다르지 않다. 김이 서린 뚜껑을 열 때 올라오는 후추 향, 뜨거운 국물을 한 모금 들이켰을 때 목을 타고 내려가는 감각. 그 순간에 묶여 있던 감정과 장면이 함께 돌아온다.누군가에겐 혹한 속 철책 근무를 마친 뒤 먹던 컵라면일 것이다. 누군가에겐 밤새 회식 후 뒤집힌 속을 간신히 붙잡아주던 해장라면일 수도 있다. 어쩌면 알프스 융프라우 정상에서 세찬 바람을 맞으며 호호 불어먹던 그 한 그릇일지도 모른다.필자의 '인생라면'은 조금 더 적막한 장면에 있다. 해외 출장 중 히터도 시원치 않던 낯선 호텔 방이었다. 먼저 귀국한 선배가 남겨두고 간 신라면 컵라면 세 개. 늦은 밤, 물을 붓고 뚜껑을 덮은 채 3분을 기다리는 시간이 유난히 길었다.뚜껑을 여는 순간 올라오던 익숙한 향. 한 젓가락을 입에 넣었을 때 그제야 몸이 풀리듯 긴장이 내려앉았다. 그건 단순한 식사가 아니라 '버틸 수 있다'는 신호였다. 그날 이후 출장길이나 여행길 가방 한켠에는 늘 컵라면 세 개가 들어간다. 배를 채우기 위함이라기보다 언제든 나를 원래의 자리로 되돌려놓을 수 있는 작은 장치다.40년이라는 시간은 길다. 한 제품이 살아남기에도 한 나라의 입맛을 바꾸기에도 충분한 시간이다. 그리고 그 시간에는 수없이 많은 개인의 기억이 쌓여 있다. 그래서 묻게 된다. 당신의 그 한 그릇은 언제였는가. 당신에게 '돌아갈 수 있는 맛'은 무엇인가. 당신의 '인생라면'은 무엇입니까.
[시대데스크]전세는 이미 사라진 게 맞다
전세금을 안 올리는 집주인은 좋은 집주인이 아니라는 말이 있다. 우스갯말이 아니라 실제 십수 년 동안 물가와 부동산 가격은 올랐는데 임대료만 제자리다 보니 퇴거 후 갈 데가 없어진 지인 사례들을 봤다.최근 서울 강동구의 서울주택도시개발공사(SH) 공공임대아파트에서 입주자단체가 계약 연장과 분양전환을 요구한 사태를 지켜보며, 10년 전 1기신도시 한국토지주택공사(LH) 아파트의 입주자로부터 메일 제보를 받아 인터뷰한 일이 다시 생각났다.이들의 공통점은 10~20년 거주 후 계약만기 시점에 이르러 분양가의 기준이 되는 감정가와 인근 아파트 시세가 예상 밖의 수준으로 상승했다는 것이다. 일부 계약자는 계약 이행을 거부하며 LH와 민간 건설회사를 상대로 법정 다툼 끝에 패소했다.심지어 SH가 공급한 20년 공공임대는 계약 당시 재계약이나 분양전환을 선택하는 것이 불가했다. 다음 세대의 신혼부부·청년을 대상으로 공급하도록 돼 있다.전세는 저성장 고금리 시대에 발달한 특수 사금융 시장이다. 입주자에게 경제적 기회비용에 따른 자산 축적의 시간을 보장했지만 현재는 높은 전세금과 대출 의존, 이자 지출로 인해 사실상 전세가 월세로 전환되는 과도기의 상태다. 설령 대출 없이 전세금을 마련한 세입자라고 해도 수억원의 투자 기회를 포기한 것과 다름없다.법원의 판단을 떠나 이러한 기회비용을 통해 자산 축적의 시간을 보장받은 입주자들은 계약상 의무와 원칙을 위반해선 안 된다. 다만 분쟁의 원인을 '예측할 수 없는 집값 차이'에서도 찾을 수 있다.공공임대 갈등이 발생한 지역은 집값이 급등한 서울 송파·강동구와 경기 분당·판교신도시 등이다. 지난 10년 동안 전셋값이 4배 뛴 신도시도 있지만 같은 기간 일산 등은 50~60%의 안정된 상승률을 보였다.주거 안정을 목적으로 설계된 공공임대제도가 경제 상황으로 인해 주거권을 침해해선 안 된다는 호소에 사적인 공감, 그리고 자산 격차의 리스크를 계약 일방이 온전히 책임져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약간의 의문이 든다. '어느 지역의 공공임대에 당첨됐는가'라는 운에 의해 누군가에게는 내 집 마련으로 가는 주거 사다리로, 반대의 경우는 이주 리스크를 더 미룬 결과만 됐다.그래서 집을 사지 그랬냐는 사회의 조롱과 질타는 현 사태의 논점을 흐릴 수밖에 없다. 단순 비판을 넘어 제도 개선을 고민해야 할 때다.입주자가 지분을 분할 취득하거나(지분적립형) 매각 차익을 공공과 나누는(이익공유형) 구조를 확대 적용할 수 있다. 분양전환이 불가한 SH 공공임대의 경우 퇴거 위기 가구에 대출 지원이 가능할 것이다. 형평성 논란이 예상되지만 정부는 청년 세대에 생애최초 LTV(주택담보인정비율) 70~80%의 정책대출을 제공한 사례가 있다.분양전환가격 산정 기준이 되는 '감정평가 방식'도 조정해야 하는 대상이다. 10년 공공임대는 법적으로 '분양전환 시점의 감정평가 금액'에 의해 분양가가 책정된다. 감정가를 깎아달라는 무리한 요구 대신, 타협과 제도 보완이 필요하다. 입주자들은 사회가 수용 불가한 큰 틀의 전제를 바꿀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공공 재원을 공급에 재투자해야 선순환 구조를 유지할 수 있다.
[시대데스크]"한 아이의 눈물로 온 세상이 행복할 수 있다면"
"단 한 명의 순진무구한 어린이의 눈물로 온 인류가 영원한 행복을 누릴 수 있다면 그 아이를 울리는 데 동의하겠는가."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의 마지막 걸작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이반이 동생 알료샤에게 던진 질문이다. 알료샤는 "동의하지 않는다"고 답한다. 단 한 명의 인간도 다수의 행복을 위한 수단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이 짧은 문답은 '공리주의'와 '권리론'의 차이를 단적으로 드러낸다. 6·3 지방선거 투표용지 부족 사태에 대한 재선거 논란 위에 이 철학적 논쟁이 오버랩된다. 제러미 벤담으로 대표되는 공리주의는 전체 구성원의 최대 행복을 추구한다. 공리주의에 따르면 당선자가 바뀌지 않는 한 재선거는 비효율적이고 불필요하다. 수백억 원의 재선거 비용뿐 아니라 정치적 혼란과 행정 공백까지 수반된다. 오세훈 서울시장 취임 이후 재선거가 결정된다면 그는 4선 연속 도전자가 돼 출마 자체가 불가능해질 수도 있다. 공리주의의 냉정함은 소수 피해자의 권리를 묵살한다는 데 있다. 공리주의자는 한 아이의 눈물로 세상을 구할 수 있다면 그 선택에 동의한다. 공리주의에선 심지어 노예제도 정당화될 수 있다.임마누엘 칸트와 존 롤스의 권리론은 다르다. 단 한 명의 유권자라도 부당하게 참정권을 박탈당했다면 반드시 구제받아야 한다. 롤스가 저서 '정의론'에서 설파한 '최소 극대화 원칙'에 따르면 사회는 언제나 가장 불리한 처지에 놓인 이를 최대한 배려하는 선택을 해야 한다. 투표용지가 부족해 투표권을 행사하지 못한 유권자를 위해선 재선거라도 해야 하다는 얘기다. 당위적으론 맞는 얘기지만 현실성은 떨어진다. 현행 법상 재선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공직선거법에 따르면 투표용지 부족은 재선거 사유가 아니다. 선거가 무효화되려면 선거 결과가 바뀔 정도의 중대한 결함이 있어야 한다. 아무리 개인의 권리가 중요해도 법치주의를 포기할 수는 없다. 재선거를 하려면 국회가 법을 바꾸거나 특별법을 만들어 소급 적용해야 한다. 광장의 요구를 담아내는 것이 결국 제도권 정치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2030세대가 주도한 잠실 시위에서 부실선거는 트리거였을 뿐이다. 집값 급등과 삼성전자 성과급 등에 따른 자산 격차, 미래 세대에 전가된 연금·재정 부담 등에 대한 분노가 터진 결과다. 기성 정치권이 자신들의 요구를 방기하는 데 따른 정치적 무력감도 한몫했다.만약 여의도 정치권이 앞으로도 청년들을 위한 실질적 대안을 내놓지 못한다면 2030이 독자적 정치세력화를 시도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프랑스의 1968년 반(反)권위주의 혁명을 이끈 이른바 68세대는 지도자 다니엘 콩방디를 중심으로 정치세력화에 성공, 프랑스와 독일에서 녹색당을 창당했다. 한국에서도 비례대표 제도 등 청년 세대가 독자적으로 정치세력화할 수단들이 있다. 다만 지역구의 경우 소선거구제 등 넘어야 할 장벽이 적지 않다. 독자적 세력화가 어렵다면 기성 정당 차원에서 청년에 대한 공천 확대 등 2030이 정치권에 들어올 문을 넓혀주는 것도 대안이 될 수 있다."위기란, 낡은 것은 죽어가는데 새로운 것이 태어날 수 없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이런 권력 공백 상태에선 매우 다양한 병적 징후가 나타난다." 이탈리아의 좌파 사상가 안토니오 그람시가 파시스트 정권의 감옥에서 쓴 '옥중수고'의 한 대목이다.2030은 기성 세대 중심의 제도권 정치 앞에서 무력감을 느낀다고 호소한다. 대신 광장에서 비로소 정치적 효능감을 느낀다. 청년들이 현실의 모순을 감내하고 분노를 속으로 싶어 삼키는 세상은 끝났다. 거리로 나온 2030세대의 열망을 받아내지 못한다면 기성 정치권은 여야를 막론하고 위기에 빠질 수밖에 없다.
[시대데스크]'초과이윤'이라는 신기루
'호미(homie)'라는 말이 있다. 한 골목에서 자라 총알도 대신 맞아줄 사이를 부르는 미국 흑인 은어다. 그 세계에는 글로 적히지 않은 규칙이 있다. 떠서 큰돈을 만지면 남은 호미들을 돌봐야 한다는 것이다.래퍼 MC 해머는 그 규칙을 끝까지 지킨 사람이었다. 1990년 'U Can't Touch This'로 세계를 흔들고 이듬해에만 3300만달러를 벌어들인 그는, 고향의 '호미' 200여 명을 직원으로 들이고 매달 50만달러를 지급했다. 호시절은 오래가지 않았다. 1996년 그는 거액의 빚을 안고 파산했다. NBA 전설 앨런 아이버슨은 한때 50명에 이르는 식솔을 거두다 2억달러 가까운 돈을 날렸다. 학자들은 성공한 한 사람에게 공동체가 청구서를 내미는 문화에 블랙 택스(black tax)라는 이름을 붙였다. 한국에서는 반도체 '초과이윤'이라는 말이 블랙 택스의 유령을 불러낸다. 김용범 대통령실 정책실장은 지난 5월 반도체 호황의 과실을 "전 국민에게 구조적으로 환원"하자며 '국민배당금'을 말했다. 김영훈 고용노동부 장관은 반도체를 두고 "공공재"라 했다. 김 장관은 최근 한발 더 나아갔다. 로이터 인터뷰에서 그 과실을 협력업체와 나누는 방법으로 '단가 조정'을 제시하며, 이를 "공산주의가 아닌 명백한 재투자"라 했다.문제는 그 밑에 깔린 생각이다. '국민배당금'이든 '공공재'든, 두 말이 딛고 선 전제는 같다. 기업이 거둔 이익의 일부는 애초에 그들의 것이 아니라는 믿음이다. 두 사람은 그 몫을 '초과이윤'으로 규정했다. 그러나 이 산업을 지배하는 것은 초과이윤이 아니라 '초과위험'이다.메모리 반도체는 호황과 불황이 극단을 오가는 세계다. 기업은 수십조원을 먼저 투자하고, 그 결실은 몇 해가 지나서야 거둔다. 잘 된다는 보장은 없다. 불과 3년 전인 2023년만 해도 SK하이닉스는 7조원이 넘는, 삼성전자 반도체 부문은 15조원에 가까운 적자를 냈다. 지금의 이익은 그 위험을 견디고 살아남은 자에게 주어진 보상이다.경제학은 이 점을 일찍이 정리해뒀다. 훗날 시카고학파의 뿌리가 된 프랭크 나이트는 1921년 펴낸 '위험과 불확실성, 그리고 이윤'에서 오랜 수수께끼를 풀었다. 기업이 큰 이윤을 남길 수 있는 배경에는 '불확실성'이 있다는 것이다. 몇 해 뒤의 일은 누구도 장담할 수 없고, 그 위험은 끝내 누군가 떠안아야 한다. 이윤은 그 짐을 짊어진 자에게 돌아가는 보상이다. 조지프 슘페터도 같은 결론에 닿았다. 이윤이란 남보다 먼저 새 길을 연 혁신가의 차지이며, 경쟁자가 뒤따르는 순간 허물어진다는 것이다. 메모리 기업이 받은 것이 정확히 이것이다. 그러니 이를 '정상을 넘어선 초과'라 부르는 건 번지수가 틀렸다. 이윤은 본래 들쭉날쭉한 불확실성의 대가일 뿐, 따로 잘라낼 '초과분'은 없다.그렇다면 남은 몫은 누구의 것인가. 위험을 짊어진 투자자와 그 성과를 만들어낸 임직원의 것이다. 그것을 나누든 다시 투자하든 그들이 정할 일이다. 지난달 삼성전자가 내놓은 5년간 5조원의 사회 환원 계획도 회사가 스스로 택한 것이다. 같은 환원이라도 기업이 정해 내놓는 것과 국가가 '모두의 몫'이라며 떼어 가는 것은 전혀 다르다.정부의 몫은 따로 있다. 호황은 이미 법인세라는 이름으로 나라 곳간을 채운다. 정부가 들여다볼 것은 그렇게 늘어난 '초과세수'를 어떻게 쓰느냐이지, 기업의 이익을 전 국민이 나눠 갖는 일이 아니다. 이재명 대통령이 8일 취임 1주년 회견에서 초과세수와 초과이윤은 "완전히 다르다"고 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메모리의 왕좌는 세습되는 자리가 아니었다. 1980년대 D램을 호령하던 일본은 90년대 들어 한국에 그 자리를 내주었고, 마지막까지 버티던 엘피다는 2012년 무너져 미국 마이크론의 품에 안겼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중국이 막대한 보조금을 뿌리며 우리의 뒤를 바짝 쫓는다. 미국은 칩스법으로 5년간 527억달러를 자국 반도체에 쏟아붓는다. '초과이윤'을 거둬 나누자는 발상이 어떻게 귀결되는지는 1970~80년대 스웨덴이 보여줬다. 노조가 연대임금제로 산업 전체에 똑같은 임금을 매기자, 잘나가는 기업일수록 덜 치른 임금만큼 이윤이 쌓였다. 노조 경제학자 뤼돌프 메이드네르는 그 이윤을 초과이윤이라 불렀다. 1975년 그가 내놓은 안은 대기업이 해마다 이익의 20%를 새 주식으로 찍어 임노동자기금에 넘기는 것이었다. 1983년 반대 시민들이 스톡홀름 거리를 메웠고, 누더기가 된 기금은 이듬해 도입됐다가 7년 만에 폐지됐다. 하지만 기업들은 그 결말을 기다리지 않았다. 테트라팩은 1981년 본사를 스위스로 옮겼고, 이케아는 1982년 회사 지분 전부를 네덜란드 재단으로 넘겼다.해머는 돈이 영원히 넘쳐날 줄 알고 호미들에게 퍼주다 파산했고, 스웨덴은 존재하지 않는 '초과이윤'을 나눠 가지려다 나라의 간판 기업을 해외로 내몰았다. 둘 다 허상을 좇은 대가였다. 위험은 지지 않으면서 있지도 않은 몫을 나누려 들면 정작 있던 과실도, 그것을 만들 사람도 사라진다.
[시대데스크]코스피 1만 시대의 마지막 퍼즐
"회사의 본질 가치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솔직히 믿고 기다려 주시는 수밖에 없습니다." 최근 기자와 만난 제약·바이오 기업 대표의 하소연이다.코스피가 연일 최고치를 경신하고 있지만 정작 바이오업계의 온도는 사뭇 다르다. 공매도 거래가 급증하면서 일부 종목은 연일 롤러코스터 장세를 반복하고 있다. 공매도 과열종목 지정 사례가 잇따르고 기업들은 R&D(연구·개발)보다 주가 방어에 더 신경 써야 하는 상황에 내몰리고 있다.공매도 논란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특히 제약·바이오 업종은 늘 중심에 서 있었다. 신약 개발과 기술수출, 임상 등 미래가치에 대한 기대가 주가에 선반영되는 특성상 변동성이 크기 때문이다. 기대가 커질수록 공매도 세력의 표적이 되기 쉽고 작은 악재에도 주가는 크게 흔들린다.실제 바이오업계를 이야기할 때 공매도를 빼놓기 어려울 정도다. 국내 대표 바이오기업인 셀트리온의 서정진 회장이 한때 공매도에 맞서 "차라리 경영권을 내려놓겠다"고 한 발언은 상징적이다. 최근에도 알테오젠, 삼천당제약, 에이비엘바이오 등 시장의 관심을 받는 바이오 종목들은 공매도 확대 국면마다 투자심리 위축 논란의 중심에 서곤 한다.냉정히 말하면 문제는 공매도 자체가 아니다. 공매도를 바라보는 시장의 불신이다. 공매도는 시장경제가 만든 자정 장치다. 과도하게 오른 주가의 거품을 걷어내고 부실 기업을 걸러내는 역할을 한다. 그래서 상당수 전문가들은 공매도를 시장의 청소부라고 부른다. 세계 주요 선진국 대부분이 공매도를 허용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그럼에도 한국에서 공매도는 늘 논란의 대상이다. 개인투자자들은 기관과 외국인에 비해 불리한 거래 환경에 놓여 있다고 느낀다. 기관과 외국인은 공매도를 위해 방대한 주식 대여시장을 활용할 수 있지만 개인이 빌릴 수 있는 주식 물량은 여전히 제한적이다.개인투자자들이 문제 삼는 것은 공매도 자체보다 접근성의 차이다. 국내 증시 거래의 상당 부분을 개인이 차지하고 있지만 공매도 시장만 놓고 보면 기관과 외국인의 영향력이 압도적이다. 개미가 거래의 70%를 떠받치는 나라에서 정작 공매도 시장에서는 기관과 외국인이 98% 이상을 독점하는 기형적 구조다. 공매도 거래가 특정 주체에 집중돼 있다는 인식은 시장의 뿌리 깊은 불신을 키우는 요인이다. 과거 잊을 만하면 적발된 무차입 공매도 사건도 시장 신뢰를 크게 훼손했다. 일부 글로벌 투자은행(IB) 등이 규정을 위반해 적발됐음에도 투자자들 사이에서는 "과연 같은 잣대가 적용되고 있는가"라는 의문이 사라지지 않았다. 공매도 자체보다 규칙을 어긴 거래가 반복됐다는 사실이 개인투자자들의 반감을 키웠다. 금융당국이 지난해 공매도 재개 과정에서 상환기간 통일, 담보비율 조정, 중앙점검시스템(NSDS) 도입 등 개선책을 내놨지만 시장의 평가는 여전히 엇갈린다. 투자자들이 원하는 것은 공매도 폐지가 아니라 누구나 납득할 수 있는 공정한 규칙과 엄정한 집행이다.역설적이게도 공매도의 순기능을 살리는 길 역시 신뢰 회복에서 시작된다. 신뢰를 잃은 제도는 시장의 외면을 받을 수밖에 없다. 공매도에 대한 불신을 걷어내는 일은 특정 투자자의 이해관계를 넘어 한국 자본시장의 경쟁력을 높이는 출발점이다. 꿈의 코스피 1만 시대를 여는 마지막 퍼즐은 공매도 존폐 논쟁이 아니라 시장 신뢰 회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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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언팩] 수도권 23만 가구 공급/부동산세제개편안/오세훈vs박원순 책임공방](https://i.ytimg.com/vi/9SG7xLYbfJs/hqdefault.jpg?width=1920&quality=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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