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데스크
[시대데스크/박찬규]중국 자본은 쓰되 주도권은 지키자
유럽의 중국 활용법이 달라지고 있다. 중국 업체들이 유럽에 공장을 짓고 현지생산으로 방향을 틀자 유럽연합(EU)은 생산 장소뿐 아니라 부품 조달과 고용, 기술, 지분구조까지 유럽 산업에 얼마나 기여하는지를 따지기 시작했다. EU는 2024년 10월부터 중국산 순수전기차에 7.8~35.3%의 상계관세를 추가로 부과해 왔는데 올해부터 관세 외 다른 수단을 병행하려는 움직임이 본격화했다.EU 집행위는 올해 3월 산업가속화법(IAA)을 제안했고 현재 유럽의회와 EU 이사회가 심의 중이다. 원안은 공공조달이나 보조금 등 공적 지원을 받는 전기차에 대해 EU 역내 최종 조립과 함께 배터리를 제외한 부품 가액의 70% 이상을 EU산으로 채우도록 했다. 배터리는 핵심 부품을 단계적으로 역내산으로 바꾸고, 전기 파워트레인과 주요 전자시스템도 시행 3년 뒤부터 각각 역내산 50%를 채우도록 하는 방안이 담겼다.이런 변화는 유럽 자동차산업이 처한 현실과 맞닿아 있다. 폭스바겐그룹은 2030년까지 독일에서만 약 5만개 일자리를 줄이는 계획을 진행 중이다. 이달 초에는 그룹 전체에서 약 5만개 직무를 추가로 조정해야 한다는 '퓨처플랜 2030'을 확정했다. 유럽 최대 자동차그룹조차 비용 부담과 경쟁 격화에 맞춰 기존 구조를 다시 짜는 상황이다.중국 업체들의 성장세는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다. 시장조사업체 데이터포스에 따르면 지난 8월 EU와 영국, 유럽자유무역연합(EFTA)을 합친 시장에서 중국 브랜드 점유율은 11.7%로 역대 최고를 기록했다. 등록 대수는 9만7639대로 1년 전보다 111% 증가했다. 중국 업체들은 EU의 관세 장벽을 피해 단순 수출 대신 현지생산과 합작사 설립으로 대응하고 있다.유럽은 중국의 전기차·배터리 경쟁력을 외면하기 어렵다. 그렇다고 완성차부터 배터리·부품·소프트웨어까지 중국에 내주고 유럽에서는 최종 조립만 하는 구조를 받아들일 수도 없다. 필요한 자본과 공급망은 활용하되 생산과 고용, 기술과 경영권에서 자국 산업의 몫을 남기겠다는 것이다. 협력 여부보다 협력의 조건이 관건이다.한국 자동차산업은 완성차를 중심으로 글로벌 경쟁력을 확보했지만 부품업체들의 미래차 전환은 아직 갈 길이 멀다. 산업통상부가 공개한 국가승인통계 '2025년 자동차 부품산업 실태조사'에서 사업전환·다각화를 추진하거나 계획 중인 업체는 전체의 6.1%에 그쳤다. 자금 조달과 기술 경쟁력 부족, 인력 확보 등이 주요 애로로 꼽혔다. 정부가 올해 부품업계 체질 개선에 9조7000억원의 정책금융을 공급하기로 한 것도 이같은 이유에서다.이런 상황에서 중국 자본과 공급망은 국내 부품사에 하나의 선택지가 될 수 있다. 중국 브랜드의 국내 진출이 이어지는 만큼 정비용 부품 일부를 국내 업체에서 조달하도록 유도하는 방안도 생각해볼 수 있다. 차만 팔지 말고 국내 산업 생태계에 기여하도록 하자는 것이다. 중국 업체로서도 국내에 공장을 새로 짓는 것보다 부담이 적다. 공동개발이나 해외시장 동반 진출로 국내 부품사가 새로운 거래처를 확보하는 방식도 가능하다. 중국 업체의 국내 진출을 부품업계 체질 개선의 계기로 삼을 수 있는 셈이다.전제는 있다. 기술력 있는 국내 부품사가 자금난 때문에 헐값에 넘어가거나 특정 중국 공급망에 종속돼서는 곤란하다. 완성차가 강해도 부품산업이라는 허리가 무너지면 산업 주도권을 오래 지키기 어렵다. 자본을 받는 대신 무엇을 내주고 무엇을 남길지에 대한 기준이 먼저다.중국을 경계하는 것과 활용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선택은 우리 몫이다. 자본과 공급망은 활용하되 핵심 기술과 경영권, 산업 주도권은 지켜야 한다. 한국 자동차산업이 아직 경쟁우위에 있을 때 협력의 원칙부터 세워 놓자.
[시대데스크/이재명]권력서열론으로 해결할 수 없는 난제
이재명 대통령의 인식은 명확하다. 선출 권력이 임명 권력보다 더 높다는 인식 말이다. 지난해 9월11일 취임 100일 기자회견에서 이런 생각을 거침없이 드러냈다. 더불어민주당이 추진하는 '내란 특별재판부' 위헌 논란을 두고 "그게 무슨 위헌이냐?"며 이런 논리를 폈다."모든 것은 국민 뜻에 달려있다. 국민 뜻을 가장 잘 반영하는 것은 국민이 직접 선출한 권력이다. 임명 권력은 선출 권력으로부터 2차적으로 권력을 나눠 받은 거다. 대한민국에는 권력 서열이 분명히 있다. 최고 권력은 국민이다. 그리고 직접 선출 권력, (이어) 간접 선출 권력."'권력서열론' 관점에서 보면 청와대가 대법관 제청을 두고 조희대 대법원장과 격렬하게 충돌하는 이유를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대통령이 임명하는 대법원장이 국민 뜻을 가장 잘 반영하는 선출 권력의 임명권을 무시하는 태도는 최상위 권력의 눈엔 '내란적 성격'(김민석 민주당 대표의 표현)으로 비칠 만하다. 그러니 타협할 수 없는 거다.청와대가 지난 8월 사전 협의 없이 조 대법원장이 제청권을 행사하자 "대법원장의 제청권은 대통령의 임명권을 뒷받침하는 권한"이라고 비판한 것도, 조 대법원장이 이 대통령의 재제청 요청을 거부하자 "대법원장의 제청권이 대통령의 임명권보다 우위에 있다는 인식"이라고 반격한 것도 '권력서열론'을 빼곤 설명이 어렵다.최상위 권력 의식은 조 대법원장이 "재제청을 요청하는 구체적 사유가 (청와대 문서에) 적혀 있지 않다"고 했을 때 나온 청와대 반응에서 정점에 이른다. 조 대법원장은 자신이 추천한 손봉기 판사가 왜 대법관으로 부적절한지 아무런 설명이 없다고 말한 건데, 청와대는 "국민이 다 아는 반려 사유를 유독 대법원장만 모르겠다는 의도를 가늠하기 어렵다"고 쏘아붙였다. 손 판사가 대법관이 되면 안 되는 이유를 아는 국민이 정말 있단 말인가? 청와대의 답변은 "내가 싫다잖아"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선출 권력은 임명 권력보다 민주적 정당성이 크다. 그러나 정당성의 크기를 비교해 작은 쪽이 큰 쪽을 따라야 한다는 건 전혀 다른 얘기다. 권력서열론은 헌법 어디에도 없는 개념일뿐더러 헌법정신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민주주의 헌법의 근간인 삼권분립은 수직 관계에선 성립 자체가 안 된다.이 대통령은 취임 100일 기자회견에서 권력서열론을 언급하기에 앞서 이렇게 말했다. "견제와 균형, 이게 삼권분립의 핵심 가치"라고. 견제와 균형이 상하 관계에서 이뤄지는 것을 봤는가? 오로지 각각의 권력이 병렬 구조 속에서만 견제할 수 있고, 그것이 균형을 이룰 때 민주주의가 시작된다.더욱이 사법권이나 대법원장의 제청권은 대통령이 나눠준 게 아니다. 헌법이 직접 부여한 권한이다. 사법부는 선출되지 않은 후순위 권력이 아니라, 여론의 흐름에 휘둘리지 말라고 일부러 선거로 뽑지 않는 권력이다.물론 민주적 정당성이 상대적으로 작은 사법부가 선출 권력에 어디까지 맞설 수 있느냐는 오랜 논쟁거리다. 사법부도 그 한계를 겸허히 인식해야 한다. 다만 대법원장을 대통령의 '하위 기관'으로 전제하는 한 대법관 재제청 사태는 현행 헌법상 풀 수 없는 난제가 된다.꼬일 대로 꼬인 매듭은 청와대가 손 판사 제청을 거부한 이유를 상세하게 설명하는 것으로 풀어야 한다. 만약 다른 후보를 염두에 두고 있다면 왜 그 판사여야 하는지 설명해야 한다. 그런 뒤에 판단은 국민과 대법원장의 몫이다.다시 대통령 얘기로 돌아가 보자. '모든 것은 국민 뜻에 달려있다. 국민 뜻을 가장 잘 반영하는 것이 선출 권력이다.' 국민 다수가 선택했다는 게 국정의 백지위임은 아니다. 선출 권력이 국민 뜻을 가장 잘 반영하는 건 국민을 설득할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그 책임을 다할 때 '모든 것은 국민 뜻에 달려 있다'고 말할 자격도 생기는 거다.
[시대데스크/홍정표]선의의 정책도 만기가 필요하다
정부의 정책은 선의에서 출발하지만 성공이 담보되지 않는다. 전제됐던 상황이 바뀌거나 예상치 못한 부작용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숙의를 거치고 부작용을 최소화하는 노력을 더해야 납득 가능한 결과가 만들어질 가능성이 높다. 시장의 자생력을 해치고 비용을 제3자에게 떠넘기면서 골칫덩어리로 전락하면 대가를 사회 전체가 치러야 할 때도 있다.지난 3월 정부는 물가를 안정시키기 위해 석유 최고가격제를 시행했다. 1970년 석유사업법 제정 때 마련된 규정을 근거로 56년 만이다. 산업통상부 장관이 석유 판매가격의 상한을 정해 고시하고, 정유사는 이 가격을 넘겨 팔지 못한다.미국-이란 전쟁이 터지고 호르무즈 해협이 봉쇄되면서 국제유가가 배럴당 100달러를 넘어서자 대통령이 도입을 지시했다. 지난 19일 10차 가격이 고시되면서 시행 6개월을 넘겼다. 제도 시행 이후 전국 주유소의 석유제품 가격은 안정세를 유지하고 주유 부담이 크게 늘지 않으니 중동 전쟁 소식에도 소비자는 무덤덤하다. 물가 상승폭을 억눌렀다는 평가를 받지만 청구서가 이월됐을 뿐이다.정유업계는 팔수록 손해 보는 구조가 돼 공급과 수요가 왜곡되고 국내외 가격 차로 손실이 쌓인다고 호소한다. 정부가 최고액을 지정해 정유사가 손실을 보면 재정으로 보전하기로 했지만 손실 산정 방식은 불투명하다.가격이 오르면 소비가 줄어야 정상인데 최고가격제는 이 신호를 가렸다. 미국-이란 전쟁으로 기름값이 올라 전 세계가 어렵지만 우리나라 석유제품 소비는 줄지 않고 견고하다. 7월 휘발유 소비량은 886만 배럴로 같은 달 기준 역대 최대를 기록했다. 물가 안정을 노린 정책이 석유 과소비를 낳고 있다는 지적을 받는 것도 이 때문이다.1984년 도입된 노인 지하철 무임승차 제도는 65세 이상 인구 비중이 4% 안팎에 불과하던 시절의 산물이다. 지하철이 놓인 일부 도시 어르신에게만 혜택이 돌아갔지만 불만은 크지 않다. 우리나라 고령화는 누구의 예상보다도 빨랐고 2024년 말 65세 이상 비중이 20%를 넘어 초고령사회가 됐다.우리나라를 일군 어르신들에게 '이동권 보장' 혜택을 드리기 위해 마련된 제도였지만 도시철도 공사의 천문학적 적자를 낳았고 국가 재정의 암초가 됐다. 무임승차 연령 상향이나 국비 지원을 둘러싼 논쟁이 매년 되풀이되지만 결론은 나지 않는다.석유 최고가격제와 노인 지하철 무임승차 제도 시행으로 발생하는 손실은 모두 세금으로 메운다. 일부는 누리지도 못하는 서비스의 청구서를 떠안아야 한다. 조용한 다수가 비용을 나눠 떠안는 구조를 그대로 두면 부담은 애먼 곳으로 넘어간다. 수익자가 관련 비용을 부담하는 것이 원칙인 사회에서 이 제도는 다음 세대가 갚아야 할 '세대전이적 부채'이기도 하다.선의의 목적을 위해서라도 값을 누르거나 공짜로 푸는 제도에는 출구 조건과 일몰 시한을 정해둬야 하는데 그렇지 않았다. 한 번 내준 혜택을 거두는 정치적 부담까지 작용한다. '상황을 봐가며' 연장을 거듭하다 보니 결단의 시점을 정하기 어렵다.선의의 정책도 만기가 도래한다. 시한을 정해 놓아야 결과를 좋게 매듭지을 수 있다. 정책에 따른 손실과 수혜 규모를 정확히 따지고 그 손실을 누가 어떻게 메울지도 설계 단계에서 명확히 해야 한다. 값을 묶는 손쉬운 처방은 뒤로 갈수록 치러야 할 비용이 비싸진다. 얇게 넓게 뿌리기보다 바우처(용도가 정해진 이용권)로 정작 필요한 이들을 돕는 게 낫다.제도는 만들기보다 고치기가 훨씬 어렵다. 표를 의식하는 정치권에는 더 고통스러운 선택이다. 특정 집단의 편익을 위해 다수 시민과 미래 세대에 짐을 지우는 불공정은 멈춰야 한다. 냉정한 경제 논리와 형평성으로 제도를 손보는 것, 그것이 다음 세대를 위한 최소한의 책임이다.
[시대데스크/박정웅]11년 뒤의 청구서
"담배는 참 부러운 상품입니다." 최근 만난 한 식품회사 임원의 말이다. 이유는 의외로 단순했다. 라면은 100원만 올려도 난리가 나는데 담배는 2000원씩 올리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농담처럼 들렸지만 쉽게 잊히지 않았다. 담뱃값 때문이 아니었다. 가격을 정하고 받아들이는 한국 사회의 방식이 그 한마디에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식품업계에는 농림축산식품부에 '라면과장'과 '빵과장'이 있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식품 가격이 원가와 수요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기업들은 대표 제품 대신 비인기 품목 가격을 먼저 올린다. 신제품에는 높은 가격표를 붙인다. 가격 인상 소식이 전해지는 순간 설명이 따라붙고 여론의 검증이 시작된다. 원가 부담을 말하는 일보다 인상의 필요성을 설명하는 일이 더 어려운 경우가 많다. 기업들이 가격을 정하는 시간보다 가격 인상을 해명하는 데 더 많은 공을 들이는 이유다.한국 사회에서 담뱃값은 다른 길을 걸어왔다.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다가 어느 날 큰 폭으로 뛴다. 논쟁은 늘 그때 시작된다. 2015년 담배 한 갑 가격은 2500원에서 4500원으로 올랐다. 사람들의 시선은 2000원이라는 숫자에 쏠렸다. 정작 눈여겨볼 대목은 따로 있었다. 그만큼 뛰어야 할 때까지 가격이 그대로였다는 사실이다.추석을 앞두고 담뱃값 이야기가 다시 나온다. 8000원, 1만원 같은 숫자가 소비 시장에서 소문으로 돌더니 정치권과 보건당국 안팎에서 오르내린다. 낯선 풍경은 아니다. 11년 전 가을과 장면이 겹쳐 보인다. 당시에도 담뱃값 인상론이 사회적 논쟁의 중심에 섰다. 사람들은 인상 폭을 놓고 갑론을박을 벌였다. 정부는 논란이 무르익은 뒤에야 명분을 설명했다.그사이 세상은 바뀌었다. 점심값이 올랐고 커피값이 올랐다. 최저임금과 물가는 해마다 새로운 기준선을 만들었다. 국민들은 새 기준선에 맞춰 소비를 조정하며 살아왔다. 담뱃값만 그 흐름에서 비켜나 있었다.해외의 방식은 다르다. 호주는 2017년부터 2020년까지 담배소비세를 매년 12.5%씩 인상했다. 흡연자들은 다음 해 가격이 얼마나 오를지 미리 알 수 있었다. 프랑스는 장기간에 걸쳐 담뱃값을 꾸준히 조정해 왔다. 한 번에 크게 올리기보다 단계적 인상을 반복하는 방식이다. 핵심은 인상 폭이 아니다. 예측 가능성이다. 작은 조정이 반복되면 충격은 분산된다. 시장은 새로운 가격에 적응할 시간을 확보한다.가격은 압력솥의 증기와 비슷하다. 조금씩 빼내면 큰 소리 없이 지나간다. 출구를 오래 막아두면 압력이 쌓인다. 뚜껑을 여는 순간 더 큰 소음과 충격이 뒤따른다. 가격 인상 자체보다 인상 폭을 둘러싼 파열음이 커지는 배경이다.한국의 담뱃값은 11년째 멈춰 있다. 인상 폭을 둘러싼 소문만 무성하게 쌓였다. 전기요금과 지하철 요금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움직여야 할 시점에는 그대로 둔다. 현실이 더는 버티지 못하는 단계에 이르면 한꺼번에 조정한다. 인상 폭이 커질수록 반발은 거세진다. 정치적 부담은 더 커지면서 가격 현실화에선 발을 뺀다. 익숙한 풍경이다.생각해 보면 한국 사회는 가격을 올리지 않는 나라가 아니다. 올려야 할 때 올리지 못하는 나라에 가깝다. 시장 가격은 비판 속에서 조금씩 움직인다. 정치의 영향을 크게 받는 가격은 오랜 시간 멈춰 있다가 어느 순간 크게 뛴다. 논란이 커지는 시점 역시 그때다.사람들은 8000원이냐 1만원이냐를 묻는다. 담뱃값 논쟁의 본질은 새 가격표가 아니다. 현실과 가격의 간격을 11년 동안 방치해 왔다는 사실에 있다. 가격은 오래 붙잡아둘 수 있지만 영원히 멈춰 세울 수는 없다. 미뤄둔 가격은 결국 현실을 따라온다. 청구서는 언젠가 도착한다. 11년의 공백에는 11년의 이자가 붙는다.
[시대데스크/김노향]고소득 전문직, 서울행 결심한 이유
얼마 전 지인 가족이 지방 광역시에서 서울로 이사했다. 나름 성공한 병원장과 공무원 부부, 두 자녀가 있는 가정이다. 큰아이는 해당 도시에 소재한 국내 유수의 명문 대학에 재학하고 둘째는 곧 수험생이 된다고 했다. 직업과 학업 기반이 둘 다 있는 주거지를 포기하고 큰 대출까지 받으면서 이들이 상경을 결심하게 된 것은 "미래를 위해 더 늦기 전 서울에서 살아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2000년대 전후에만 해도 대전·부산 등 지방 대도시에 사는 것이 '마이너 리그'라는 인식은 없었다. 소득 격차와 기회의 차별은 이전에도 있었다. 지금의 한국 사회에서 서울-비서울의 차이는 '계층 갈등'으로 확장됐다. 지방에 살면 돈을 아무리 많이 벌어도, 명예로운 직업을 가졌어도 박탈감을 지울 수 없다는 게 요즘 세대들의 말이다.역대 정부가 여야를 막론하고 추진해온 국토균형발전의 취지 자체를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2000년대 1차 공공기관 이전 과정에서 혁신도시 정책은 실패를 경험했다. 여러 전문가들은 교육·의료·문화 인프라를 구축한 후에 공공기관과 민간기업, 주거지를 이전해야 한다고 줄곧 주장했다. 제주영어교육도시와 송도국제학교 등으로 서울 강남·목동의 맹모들이 대거 이주하며 부동산가격을 올린 사례만 봐도 균형발전의 해법이 생각보다 멀리 있는 것은 아니다.평일 낮 용산역에 가면 호남선을 타고 상경한 노인들이 인파를 이룬다. 이들 대다수가 건강검진 등 진료를 위해 상급병원을 찾는다고 한다. 지방의 의료 인프라를 구축하고 지역 간 의료 격차를 해소하려면 수도권에 집중된 상급병원을 지방으로 이전하는 게 옳다는 점을 방증하는 모습이다.방탄소년탄(BTS) 광화문 콘서트나 서울세계불꽃축제가 세종·광주에서 열리면 지역 주민들의 자긍심이 될 것이다. 2024년 필리핀아레나에 취재 갔을 때 수도 마닐라에서 차로 한 시간을 가야 하는 거리와 황량한 주변에 놀랐지만 블랙핑크 콘서트가 열린 날 이곳은 10만명이 몰렸다고 했다.민간기업의 성장을 지원하는 세제 인센티브도 요구된다. 대덕연구단지와 같은 기술도시의 성공과 판교 테크노밸리, 송도 바이오클러스터 등은 비서울 도시들의 모델이 될 수 있다. 아울러 지방으로 이전하는 공공기관 임직원과 가족에게 아파트 특별공급, 생활 지원금 등 혜택을 주는 것은 좋은 유인이 될 수 있다.과거 세종특별자치시에 이주한 중앙부처 공무원들에게 아파트를 공공분양 한 것에 대해 특혜 논란이 있었다. 특혜가 없으면 직장을 포기하지 서울을 포기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수년 전 인터뷰한 국토교통부 산하 공기업의 한 팀장은 "가족들과 떨어져 원룸 크기의 집에 살면서 가장 힘든 순간은 외로움이 아니라, 주말이면 서울로 가는 전세버스의 긴 대기 줄을 보는 것이었다"고 했다.최근 SNS(소셜미디어)에서 발견한 AI(인공지능) 영상은 '지방 소멸이 곧 국가 위기'라는 경고를 매우 와닿게 했다. 100년 후 사람이 보이지 않는 폐역사로 변한 가상의 부산역이었다. 국가데이터처 조사에 따르면 수도권의 청년(19~39세) 인구 비중은 2000년대 48%에서 2020년대 55%로 상승했다. 정부와 기업의 노력에도 지방 도시는 후퇴했고 서울은 넘을 수 없는 벽이 됐다.가족의 분열과 개개인의 희생만을 요구하는 거대 담론은 공감을 얻기 힘들다. 균형발전이 미래 세대를 위해 반드시 이뤄야 하는 시대의 숙제라면 개인이 존중받는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권리를 보호하는 정책의 디테일에 더욱 진정성 있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가장 먼저 미완성 상태인 혁신도시의 발전을 고민했으면 한다. 2차 공공기관 이전 계획에서 이같은 문제의식이 일부 반영된 것은 다행이다. 법안 개정이 필요한 부분은 국회가 논의를 이어가야 한다.
[시대데스크/황정원]피자헛 패소, 프랜차이즈 마진도 유죄인가
"그럼 원가를 다 공개하라는 건가요? 세상에 그런 장사가 어디 있습니까?" 한국피자헛이 지난 1월 대법원에서 패소한 뒤 프랜차이즈 업계에서 나온 하소연이다. 피자헛은 2016년부터 7년간 가맹점주들에게 로열티를 받으면서 원부재료 공급가에 마진을 얹어 따로 챙겼다. 계약서에 없는 돈이었다. 대법원은 이 차액가맹금 215억원을 점주들에게 돌려주라고 확정했다. 이후 반환소송은 20여개 브랜드로 번졌다.판결 직후 업계에서는 원가를 공개해야 하느냐는 논란이 불거졌다. 마진을 계약서에 명시하라는 요구가 결국 원가 공개로 이어진다는 우려였다. 공정거래위원회는 2019년에 공식 자료를 통해 "그럴 필요 없다"고 못을 박았다. 점주가 부담할 돈과 필수품목의 거래조건은 알려야 하나 본사의 실제 매입가격과 품목별 마진은 공개 대상이 아니라고 했다.쉽게 말하면 이렇다. 본사는 가맹점주가 어떤 물건과 서비스에 돈을 내야 하는지 가맹 계약 때 명시해야 한다. 하지만 얼마에 사서 얼마를 남기는지는 영업비밀이다. 이 둘을 섞으면 안 된다. 그렇다면 피자헛은 왜 졌을까. 대법원은 차액가맹금을 받으려면 본사와 점주 사이에 '구체적인 의사의 합치'가 있어야 한다고 봤다. 액수가 아니라 계약서에 명시되지 않은 돈을 받은 게 문제였다. 차액가맹금. 이름부터 잘못됐다. '차액'이라고 하니 원가에 웃돈을 얹어 떼어가는 돈처럼 들린다. 정작 법적으로 중요한 단어는 '가맹금'이다. 가맹사업법이 인정하는 돈의 한 종류라는 뜻이다. 이쯤 되면 이름부터 바꿨으면 싶다. 무엇으로 부를지는 고민해볼 일이다. 선입견을 불러일으키는 이름은 아니어야 한다.이 어색한 단어의 기원은 한국 프랜차이즈 시장의 성장 과정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미국에서는 가맹본부가 받을 돈을 가맹비와 로열티로 계약서에 적어 받는 것이 일반적이다. 한국은 시작부터 사정이 좀 달랐다. 동네 식당과 치킨집 같은 자영업이 가맹사업으로 몸집을 키운 경우가 많았다.가맹점을 하나 여는 데 본사가 받아야 할 대가가 5억원이라고 가정해보자. 처음부터 이 돈을 전부 요구하면 가게 문을 열 사람이 줄어든다. 그래서 본사는 계약할 때 1억원을 받고 나머지 4억원은 계약기간 공급하는 식자재와 물품 가격에 나눠 붙이는 방식을 제안했다. 일종의 한국식 '할부'였다. 대신 로열티는 받지 않기로 했다. 점주는 목돈 부담을 덜고 본사는 빠르게 가맹점을 늘릴 수 있었다. 그때는 누이 좋고 매부 좋았다.글로벌 프랜차이즈는 셈법이 더 복잡하다. 국내 운영사가 해외 본사에 브랜드 사용료를 내야 하고 재료 수급과 물류 경로는 브랜드마다 다르다. 하나의 틀로 묶기 어렵다. 양자가 계약 당시에 가맹금 구조 일체를 합의했다면 문제 될 게 없다. 투명한 마진이란 본사가 "점주도 알고 있었다"고 주장하는 마진이 아니라 무엇을 어떻게 알렸는지 확인할 수 있는 마진이다.현재 진행 중인 프랜차이즈 소송은 이 관점에서 따져봐야 한다. 판결의 법리는 일반화할 수 있지만 사실관계는 일반화할 수 없다. 피자헛이 합의 없이 차액가맹금을 받았다고 다른 본사들도 그랬다고 볼 수는 없다. 하나씩 따져봐야 한다. 투명성을 요구할 때는 선이 있다. 본사의 매입원가와 품목별 이윤까지 알아야 계약의 정당성을 판단할 수 있는 건 아니다. 공정위가 이미 공개 대상이 아니라고 정한 것까지 요구할 이유는 없다. 투명성의 목적은 기업의 영업 비밀을 파헤치는 데 있지 않다. 정당한 이익과 부당한 수취를 가려내는 데 있다. 본사가 잘못 받은 돈을 돌려주는 것과 가맹점이 차액가맹금을 인정하는 것은 모순되지 않는다. 피자헛이 졌다고 기업의 마진까지 유죄가 된 것은 아니다.
[시대데스크/이상배]'청년 특혜인' 용혜인이 포기할 것
# 2006년 핀란드 남서부의 대도시 탐페레. 빵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21세 대학생 산나 마린이 사회민주당에 가입했다. 당 청년조직에서 활동하던 마린은 23세 때 탐페레 시의원 선거에 도전했지만 떨어졌다. 본인이 직접 전단지를 만들어 거리에서 돌렸지만 기성 정치권의 벽을 넘어서진 못했다. 이후 마린은 학생회 대의원, 사민당 청년조직 부위원장 등을 지내며 경력을 쌓았다.4년 뒤 다시 도전한 선거에서 마린은 탐페레 시의원으로 당선됐다. 이듬해 시의회 의장으로 뽑혔다. 2015년엔 국회의원이 됐고, 2019년 교통통신부 장관을 거쳐 그해 12월 총리가 됐다. 당시 34세였던 그녀에게 '핀란드 역사상 최연소 총리'란 수식어가 붙었다.마린은 2023년 총리직에서 물러날 때까지 비교적 높은 지지율을 유지했다. 국제 사회에서는 진보적 여성 리더의 아이콘으로 불렸다. 코로나19 팬데믹을 성공적으로 극복했고, 조국의 나토(NATO) 가입도 이뤄냈다. 재임 중 사적인 파티 영상이 유출돼 논란이 됐지만, 청년들은 "근무시간 이후인데 뭐가 문제냐"며 오히려 그녀에게 지지를 보냈다.36세 용혜인 성평등가족부 장관 후보 지명에 가장 크게 반발하는 계층이 청년이다. 2030세대에게 용 후보의 발탁은 '청년 우대'가 아닌 '불공정'이다. 능력에 따른 공정을 중시하는 청년들의 눈에 용 후보는 벼락출세한 '특혜인'일 뿐이다.용 후보는 한 번도 하기 어려운 비례대표를 두 번이나 했다. 지역구 선거를 한 번도 안 치르고 재선 의원이 됐다. 2016년 총선에서 낙선했지만 그때도 노동당 비례대표 1번이었다. 그런데도 장관직과 의원직을 겸직하겠다고 한다. 이 역시 이례적이다.다음 비례대표 순번이 더불어민주당 몫이라 의원직을 내려놓으면 기본소득당이 원외 정당이 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소수정당의 처지를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그러나 애초에 1개뿐인 의원 자리도 자력으로 따낸 게 아니다. 민주당 주도의 비례연합정당(위성정당)에 참여해 받은 것이다. 정말 용 후보 지명이 청년층 민심을 잡는 데 도움이 될 거라고 청와대는 기대했을까. 만약 그랬다면 정무감각 부족을 인정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용 후보가 이번 개각에서 희생양으로 낙점됐다는 이른바 '물소 떼 작전' 주장을 믿어야 할까. 독일 사회학자 막스 베버는 '근대 관료제'의 요건으로 전문 훈련과 기술적 자격에 따른 임용을 꼽았다. 장관 자리를 맡기려면 능력이 검증돼야 한다는 얘기다. 장관에게 필요한 능력이 정치력과 전문성이라면 용 후보는 그 가운데 무엇을 증명했나.핀란드의 마린이 30대에 총리가 되고, 청년들의 사랑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지역 선거 낙선이란 고난의 서사, 지방 정치 경력 등을 갖췄기 때문이다. 착실하게 바닥부터 밟아 올라가며 능력을 검증받고 경험을 쌓은 청년이 보다 큰 뜻에 도전할 때도 과연 한국 청년들은 '불공정'을 이야기할까.아리스토텔레스는 '수사학'에서 설득의 세 가지 방법으로 ▲로고스(logos·논리) ▲파토스(pathos·감정) ▲에토스(ethos·인격)를 꼽았다. 그는 이 가운데 에토스가 가장 중요하다고 봤다. 아무리 논리가 정교하고 감정을 자극해도 말하는 사람이 존중받지 못하면 소용이 없다.용 후보가 정치의 길을 계속 가겠다면 스스로 '에토스'를 증명해야 한다. 희생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다. 기본소득당도 '원내정당'과 '내각참여정당'이란 두 가지를 동시에 누릴 수는 없다. 둘 다 움켜쥐려 한다면 탐욕이고 그 끝은 정치적 몰락이다. 의원직과 장관직 가운데 무엇을 포기할지는 스스로 결정할 일이다.
[시대데스크/이무영]삼성DX, 600만원 보너스가 호시절일 수도
반도체를 만드는 DS 부문 메모리사업부는 1인당 6억원대 성과급을 받고, 스마트폰과 가전을 만드는 DX 부문은 600만원어치 자사주를 받는다. 100배 차이다. 노사갈등은 그렇게 타결됐고, 삼성전자는 '감사 페스티벌'을 열었다. 구매금액의 20%를 온누리 상품권으로 주는 행사다. 때마침 가전을 새로 장만하려던 터. 쾌재를 부르며 오프라인 가전 양판점으로 향했다. '기왕이면 성과급 잔치에서 소외된 DX 도와주자'는 다짐은 매장을 반바퀴 정도 도는 시점에 온데간데없어졌다.반값의 중국 브랜드들은 성능도 디자인도 훌륭했다. 할부와 페이백 등 각종 혜택도 붙었다. 매장 직원의 끈질긴 권유도 계속됐다. "로고만 가리면 삼성이랑 진배없어요." 프리미엄 라인에서는 라이벌 LG가 유혹하고, 소형가전에서는 쿠쿠나 코웨이에 더 눈길이 갔다. 결국 그날 구매한 6개 중 냉장고와 로봇청소기, 2개만 삼성 제품이었다.두 달을 써보니, 온누리 상품권의 달콤한 유혹에 넘어간 게 후회된다. 로봇청소기는 자꾸 문턱에 걸린다. 설치기사가 원래 주문한 모델이 문턱 넘기 어려울 거라 해서, 한참 돈을 더 주고 바꾼 최신 모델이다. 냉장고는 그럭저럭인데, 그렇다면 이 가격은 잘못됐다. 둘 다 모바일 앱으로 제어가 가능하다는데, 이 앱이 와이파이를 못 잡아 여전히 불통 상태다. 상품권의 유혹을 뚫고 간택된 제품들은 매일 기특하게 DX(Device eXperience)를 설파한다. '당신이 지금까지 쓰던 가전은 잘못됐다, 첨단 과학 기술이란 좋은 것이다'.'심리적 본전 치기'를 위해 온누리 상품권 신청을 서둘렀다. 일단 삼성닷컴에 가입했다. 여기서만 신청이 가능하다. 가입은 정부24보다도 어렵고 구석에 숨겨놓은 '감사 페스티벌' 메뉴 찾기도 험난했지만, 진짜 문제는 다음부터였다. 카테고리, 구매처, 모델코드, 시리얼 번호, 구매일자, 주문번호, 구매금액을 직접 입력하란다. 구매내역서와 영수증, 명판 사진도 올려야 한다. 제품 한 대에 열 개다. 명판을 찍으려고 냉장고 문을 다 열었고, 로봇청소기는 뒤집어 바닥을 살폈다. 처음 보는 항목이 있어 설명 버튼을 눌렀더니 화면을 덮는 팝업창이 뜬다. 닫기 버튼은 안 보인다. 뒤로 가기를 누르니 적어놓은 항목이 다 사라져 있다. 처음부터 다시 적어 겨우 하나의 '온누리 과업'을 마쳤다. 상품권은 신청일로부터 18일이 지난 후에야 지급된다고 한다. 다음 제품 몫을 신청할 차례다. 한 번 해봤으니 수월할 거라는 기대는 헛됐다. 입력이 안 된다. 공란이어야 할 입력창엔 아까 입력한 내용들이 굳건하다. 챗봇은 '감사 페스티벌'이 금시초문이라는 듯 딴소리만 한다. 결국 콜센터를 찾았다. 5분 이상 대기가 있다는 안내. 그 다음 말이 기막히다. "이 안내 전화는 대기가 5분 30초를 경과하면 자동으로 끊어질 수도 있습니다". 과연 5분 30초가 경과하자 뚜뚜뚜 소리만 들린다. 1초의 말미를 주지 않는 디지털의 정확함, 이것이야말로 수백만원을 지불하고도 느끼지 못했던 '삼성전자의 DX(Digital eXperience)'였다.1995년 이건희 선대 회장은 불량 휴대전화와 팩시밀리 등 15만대, 500억원어치를 임직원 2000여명 앞에서 태우게 했다. 이른바 '애니콜 화형식'이다. '품질은 나의 인격이요, 자존심!' 현수막이 걸린 구미사업장 운동장, '정성품질 고객만족' 어깨띠를 멘 직원이 제품 더미에 불을 붙였다. 같은 시기 '가전의 일본'은 잘나갔지만, 큰 내수 시장과 브랜드력을 믿고 안일했다. 그로부터 30여년이 지난 올해 8월, 아키하바라 요도바시 카메라와 이케부쿠로 빅카메라를 방문했다. 어느 층에서나 가장 좋은 자리를 차지한 것은 중국 브랜드였다. 1층 입구에는 일본 국민 배우 기무라 타쿠야를 내세운 화웨이 광고가 큼지막하게 걸려 있었다. 한산한 일본 브랜드 매대에는 '일산'이라는 푯말이 붙어 있었다.남의 일도, 먼 미래의 일도 아닌 것 같다. DX 부문 올 상반기 영업이익은 2조원, 지난해 같은 기간의 4분의 1 수준이다. 2분기엔 8000억원 적자를 냈다. 부문이 생긴 이래 첫 분기 적자다. 같은 기간 DS 부문은 89조원을 벌었다. 지난 8월 19일 노태문 DX부문장은 임직원 설명회에서 추가 보상은 어렵다며 "우리가 성과를 만들어 특별보상을 받도록 같이 노력하자"고 했다. 몇 해 뒤 DX 직원들은 이렇게 회상할지 모른다. 그때는 600만원이라도 받았다고.
[시대데스크/박찬규]자율주행 개방 앞에 놓인 데이터 주권 시험대
중국은 자율주행 분야에서 미국 다음으로 기술력을 갖춘 국가로 평가받는다. 사실상 무제한에 가까운 실증을 허가하는 정부 차원의 전폭적 지원에 힘입어 자율주행 기업들이 기술 수준을 빠르게 끌어올렸다. 시험운행 단계를 넘어 유상운송을 통해 수익을 올리는 단계로 성장한 데다 자율차의 대량생산으로 제품 가격경쟁력마저 갖췄다.중국의 선두 업체는 '바이두 아폴로 고'다. 누적 주행거리가 3억5000만km를 넘어섰고 이 중 무인 주행은 2억4000만km에 달한다. 최근 빠르게 세를 키운 '포니.ai'가 국내업체와 손잡고 한국 시장 진출 계획을 발표해 주목받는다. 합작법인을 세워 10대로 자기인증을 마친 뒤 1년 내 190대를 추가해 200대 규모를 갖추고 2028년 상용화에 나선다는 목표다. 국내 파트너 퓨처링크는 포니.ai의 기술력 외에도 중국산 자율차의 경제성을 강조했다. 기술 수준이 높고 가격경쟁력을 갖춘 중국 제품을 통해 국내 자율차 시장을 키우면 국내 산업에도 이득이 된다고 주장한다. 국내에 들여올 7세대 자율주행 키트의 부품 원가는 직전 세대보다 70% 저렴하다. 미국 상무부는 2025년 1월 중국·러시아와 연계된 커넥티드카의 VCS 하드웨어와 VCS·자율주행(ADS) 소프트웨어가 국가안보에 위험을 초래할 수 있다고 판단해 수입·판매를 단계적으로 제한하는 규제를 확정했다. 소프트웨어는 2027년형, 하드웨어는 2030년형 모델부터 적용된다. 각종 센서를 통해 민감한 정보가 수집될 수 있고 외부 연결 시스템을 통한 악의적 접근으로 데이터 탈취나 자동차 원격 조작 가능성까지 국가안보의 위험 요소로 본 것이다. 중국 자율주행 시범 운행(로보택시 포함) 기업은 운행 데이터를 중국 역내에 저장하고 당국 요구에 따라 제출해야 한다. 자율주행을 고도화하기 위해선 무엇보다 데이터 수집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도 지난 6월 18일 시행된 개정 자율주행자동차법에 따라 임시운행허가 사업자가 원본 주행영상을 연구개발에 활용할 수 있도록 했지만 해외 이전까지 허용하지는 않았다. 자율주행차가 수집하는 라이다·카메라의 미가공(raw) 데이터가 해외 서버로 이전될 경우 어떻게 통제할지에 대해서는 추가 검토가 필요하다. 구글의 자율주행 자회사 웨이모도 한국법인을 세운 뒤 연구개발 가치가 높은 사고·사건 주행영상을 가명처리해 해외에서 활용하는 방안을 개인정보보호위원회에 문의했다고 한다. 자율주행차가 수집한 모든 데이터의 국내 보관을 의무화하고 백도어를 통한 원격 제어와 데이터 유출을 막을 시스템 도입이 필수로 꼽힌다. 중국 우한에서 로보택시 100여대가 동시에 멈춘 것과 같은 사고에 대비한 비상 대응 매뉴얼과 원격 안전관리 기준도 먼저 구체화해야 하는데 정부 정책 기조는 일단 시장의 판을 키우는 데 있다. 과거 전기차 시장이 개화할 때 테슬라 등 해외 기업에 안방을 내주는 결과를 낳은 보조금 정책이 겹쳐 보인다. 자율주행 시장에서도 전기차 시장의 과오를 되풀이할 것인가.자율주행 시대 환상에 기댄 시장 개방은 기술 종속과 안전 사고의 방아쇠가 될 수 있다. 스타트업과 지방자치단체를 축으로 싹을 틔운 국내 생태계는 단 한 번의 치명적 사고에도 흔들릴 만큼 취약하다. 기술력을 갖춘 해외 업체의 진입을 맹목적으로 차단할 수는 없지만 안보와 안전에 대한 대비를 철저히 할 필요가 있다. 토종 자율주행 생태계를 지켜내고 키울 방안 마련이 시급하다.
[시대데스크/이재명]경찰 불신, 누가 만들었나
제목이 빤하다고 느낄지 모르겠다. 불신이 곧 지옥이라면, 경찰은 지금 지옥문 앞에 섰다.엊그제 지인들과의 식사 자리에서 오간 대화다. 한 지인이 연락도 없이 오지 않았다. 일행 한 명이 말했다. "경찰에 실종 신고라도 해야 하는 것 아냐?" 곧바로 다른 일행이 받아쳤다. "신고해도 소용없는 거 알면서!"경찰은 1954년 형사소송법 제정 이후 72년 만에 이뤄진 형사사법 체계 대변화의 최대 승자다. 축포를 쏴도 모자란 판에 마치 승자의 저주에 걸린 듯 비틀댄다. 장윤기 사건은 강간살인이란 강력범죄마저 증거인멸하고 사건을 축소할 수 있음을 전 국민 앞에 보여줬다.[시대]는 천안 교회 아동학대 사망사건을 4차례에 걸쳐 조명했다. 12번의 신고, 12번의 방관…. 열두 살 현수(가명)가 숨지기까지 5년여간 이어진 경찰의 한결같은 무신경함과 무책임함은 취재기자들을 절망케 했다. 현수는 죽기 한달여 전 생면부지 어른을 붙잡고 경찰을 불러 달라고 했지만, 출동한 경찰은 현수를 학대해 처벌받은 전력이 있는 외할머니에게 다시 돌려보냈다.제주 장모 씨와 60대 남성 A씨 실종사건을 멋대로 종결해버린 부 경장에게서는 무책임함을 넘어 남의 고통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조커'를 보는 듯해 소름이 돋는다. A씨 유가족은 A씨가 자살할 가능성이 있다고 절박하게 호소했지만, 부 경장은 "연락이 닿았다"는 뻔뻔한 거짓말과 함께 신고 자체를 없애버렸다.13만 경찰 중 일부의 문제일 것이다. 다만 특정 지역에서만 근무하는 '향찰(鄕察)'을 없앤다고, 실종 시스템의 결재권을 상급자로 바꾼다고 또 다른 '부 경장'이 나오지 않을까.다시 첫 질문으로 돌아가보자. '경찰 불신, 누가 만들었나.'불신은 역설적으로 반드시 믿어야만 할 때 생기는 두려움이다. 처음부터 믿을 필요가 없다면 불신할 일도 없다. '경찰 불신, 누가 만들었나'라는 질문은 '누가 경찰을 믿어야만 하는 기관으로 만들었나'와 같은 의미다. 다시 말해 경찰을 믿지 못해도 하소연할 곳이 없게 만든 이들이 경찰을 '불신 지옥'에 내던진 저승사자인 셈이다.오는 10월 검찰청이 사라지면 경찰은 가장 큰 권력을 행사하게 된다.(이건 지난 25일 이재명 대통령이 국무회의에서 한 말이다) 모든 권력기관은 타락한다. 권력이 클수록 빨리 타락한다. 역사의 진리다. 대통령경호처가 그랬고, 안기부·국정원이 그랬고, 검찰이 그랬다. 그렇다면 다음은? 당연히 경찰이다. 내부 통제로, 임시 개혁기구로 그걸 막을 수 있다면 국정원과 검찰이 오늘날처럼 수술대 위에 오르진 않았을 것이다.불신이 믿어야 할 때 생기는 역설이듯, 권력기관의 타락을 막는 유일한 방법도 역설적이다. 권력기관은 반드시 타락한다는 믿음만이 그 타락을 막을 수 있다.야망은 야망으로만 제어된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은 230여년 전 권력기관의 타락을 막고, 권력기관 간 균형을 이룰 방법을 거기서 찾았다. 권력을 휘두르고 싶은 어느 기관의 야망은 오로지 그 꼴을 보지 못하는 다른 기관의 야망을 통해서만 억제되는 것이다. 가장 큰 권력을 행사하게 될 경찰의 주체할 수 없는 야망 역시 경찰을 속속들이 들여다보는 다른 기관이 있어야만 통제 가능하다.김민석 민주당 대표는 "(제주 실종 허위 종결은) 일각의 이야기와 달리 현재 검찰의 보완수사권이 작동하는 상태에서 벌어진 일"이라고 했다. 번지수를 한참 잘못 짚었다. '검찰에 보완수사권이 있어도 저런데, 그것마저 없어지면 경찰은 누가 통제하나' 하며 걱정하는 시민들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가.공소청이 경찰의 모든 사건을 들여다보는 것 이상의 경찰 개혁 방안은 없다고 확신한다. 거듭 말하지만 공소청을 믿어서도, 공소청이 착해서도 아니다. 야망은 야망으로만 제어되기 때문이다. 제주 실종사건 피해자들이 묻고 있다. '경찰 불신, 어떻게 막을 것인가.'
[시대데스크/홍정표]증거를 없앤 쪽이 이긴 통신사 해킹 사고
솔직했지만 과징금은 더 많이 부과됐다. 지난해부터 올해 이어진 국내 통신 3사 해킹 사고의 결말이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지만 자신의 과오를 스스로 밝혔을 때 책임도 무거워졌다.AI 등 첨단 기술이 발전하면서 해킹을 원천적으로 막는 것은 역부족이다. 사후 대책을 신속히 마련해 피해를 최대한 줄이는 것이 최선이다. 사고를 인지한 즉시 관련 기관들과 공조해야 하지만 현행법상 자신의 과오를 스스로 밝히면 중죄, 덮으면 무죄다.최대 과징금을 부과받은 SK텔레콤은 스스로 신고했지만 KT는 숨겼다. LG유플러스는 과징금을 피했다. SK텔레콤은 지난해 4월 해킹 정황을 인지한 지 이틀 만에 당국에 신고했다. 통신 3사 중 유일한 자진신고였다. 다만 해커가 내부망에 처음 침투한 시점은 2021년 8월, SK텔레콤이 이를 알아챈 건 2025년 4월이었다. 탐지까지 4년가량 걸렸다. 개인정보보호위원회는 유출 탐지와 통지가 모두 늦었다고 판단하고, 통지 지연으로 피해를 키웠다고 봤다. 과징금은 1347억9100만원, 통신 3사 중 최대다. 이후 고객 보상과 정보보호 투자, 신뢰 회복을 위해 SK텔레콤이 투입한 금액은 2조원을 웃돈다고 전해진다. KT는 다른 길을 걸었다. 이번 해킹은 소액결제 피해가 잇따르고 난 후에야 세상에 알려졌다. 조사가 시작되자 서버 로그부터 지웠다. 보존 자료가 없다고 진술하다가 삭제 정황이 드러나자 말을 바꿨다. 소액결제 피해에도 과징금은 539억7900만원만 부과됐다. KT는 2024년 3월에도 서버가 악성코드에 감염된 사실을 알고도 신고하지 않았다. LG유플러스도 비슷한 논란을 겪고 있다. 정부로부터 해킹 정황을 통보받았지만 개인정보위 조사가 시작되기 전 서버 운영체제와 장비를 교체했다. 침해 경로와 유출 규모를 확인할 수 없도록해 과징금을 매길 근거가 없어졌다. 결국 개보위는 경찰에 수사를 의뢰했다. 여러 의심 정황은 있지만 경찰 수사 결과에 따라 과징금 부과 여부도 결정될 것으로 보인다.2016년 인터파크의 대규모 개인정보 유출 사고 때도 배상은 상징적 수준에 그쳤다. 1030만명의 정보가 빠져나갔지만 과징금은 44억8000만원만 부과됐다. 실제 배상받은 사람은 소송에 나선 극소수뿐이었다. 기업 입장에서 개인정보 유출은 오래전부터 감당할 만한 '싼 사고'였다.이번 통신 3사 사고는 오래된 계산법에 신고와 은폐라는 변수가 더해졌고 정직하면 손해라는 사실을 처음으로 구체적인 처분 사례를 통해 확인시켰다. 신고는 확실한 손해지만 은폐는 확률 높은 도박이란 인식을 명확히 했다. 위기관리 대응력이 부족한 중소기업일수록 이 같은 행동이 노골적으로 작동하지는 않을지 우려된다. 2018년 시행된 유럽연합 개인정보보호 통합규정 GDPR(General Data Protection Regulation)은 유출을 인지한 뒤 72시간 안에 신고하지 않으면 그 자체를 별도 위반으로 본다. 신고 의무를 게을리하는 것만으로도 처벌 대상이 된다. 유출을 막지 못한 책임과 별개로 알리지 않은 책임을 따로 묻는다.우리나라도 문제를 인식하고 뒤늦게라도 움직인 것은 다행이다. 조사 착수 전 증거인멸을 형사처벌하고 전체 매출액의 3%를 과징금으로 물리는 방안이 개인정보위의 연내 입법 과제로 제시됐다. '증거가 없으니 책임도 없다'는 인식을 그대로 두면 다음에도 같은 패턴이 반복될 가능성이 크다. 기업의 선택은 제도에 따라 결정된다. 신고가 손해고 은폐가 사실상 면책 받을 수 있는 구조에선 침묵이 합리적 선택이다. 과징금 액수를 올리는 것만이 능사도 아니다. 증거를 없앤 쪽이 유리해지는 판을 뒤집어 감출수록 불리해지는 구조로 바꾸는 것이 먼저다.
[시대데스크]158만호 공급대책, 와닿지 않는 이유
"135만호를 공급하겠다고 한 게 1년이 안됐는데 또 23만호 이상을 공급하겠다고 하네요. 그런데 실제로 그렇게 공급될지는 봐야죠. 나중에 어떻게 바뀔지 몰라요."정부가 지난해 9월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에 135만호에 달하는 주택을 공급하겠다는 내용의 9.7 대책을 내놓은 지 채 1년도 안 됐다. 올 1월에도 수도권에 5만9000호를 공급하는 내용의 1.29 대책이 나왔다. 이달 13일에는 23만호를 더 얹은 8.13 수도권 주택공급 종합대책이 발표됐다. 135만호에 23만호를 더하면 무려 158만호에 달하는 물량이다. 앞서 발표된 8.3 세제개편안도 있다. 집값을 잡겠노라는 정부의 의지가 공급과 세제, 금융규제까지 전방위적으로 가해지는 모습이다.시장의 반응은 아직 미적지근하다. 수십억에서 100억원을 넘는 초고가 주택의 호가가 떨어지는 등 관망세가 나타나고 있기는 하지만 집값이 실거래가에 반영돼 떨어지고 있다는 소식은 아직 들리지 않는다. 공급 대책은 태생적으로 사업 시행계획과 인허가, 시공사 선정 등을 제외하고 공사기간만을 최단으로 예상해도 3~5년이 걸린다. 지금 정부의 공급대책은 실제 10년 이상이나 걸려야 현실화될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몇 년 뒤 물량이 쏟아지니 일단 무주택으로 버텨보자"는 계산이 성립하려면 그 약속이 최소 3~5년, 길게는 10여년 뒤에도 그대로 지켜진다는 믿음이 전제돼야 한다. 공급 대책은 시장 심리에 즉각 작동하는 정책이 아니라 오랜 시간에 걸쳐 신뢰가 쌓여야 비로소 힘을 발휘하는 정책이라는 얘기다.주택 공급은 주택난이 심할 때는 물론 시장이 잠잠한 시기에도 꾸준히 추진돼야 집값 안정의 효과를 낸다는 게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그러나 역대 정부의 대규모 공급 대책은 대개 집값이 치솟아 발등에 불이 떨어졌을 때만 등장하는 소방수 역할만 하는 데 그쳤다. 그마저도 정권이 바뀌면 쉽게 뒤집혔다. 이명박 정부가 야심 차게 추진한 보금자리주택은 박근혜 정부 초기 주택시장 침체를 이유로 전면 폐지됐다. 문재인 정부의 공급 대책들도 정권 교체와 함께 동력을 잃었다. 2018년 발표된 3기 신도시 역시 우선순위에서 밀리며 고양 창릉 등 핵심 지구는 아직 첫 삽조차 뜨지 못했다.이번 8.13 대책은 다를까. 용산공원 부지를 주택 용도로 돌릴지, 그린벨트를 어디까지 풀지를 놓고 정부와 서울시, 여야가 팽팽히 맞서는 모습이 뭔가 불안하다. 발표는 요란했지만 정작 핵심 쟁점은 결론이 나지 않은 것이다. 주택시장 안정을 위한 충분한 숙의와 공론화 없이 대책부터 던졌다는 인상을 지우기 어렵다.정책은 신뢰를 먹고 자란다. 정권이나 시장 상황이 바뀌면 이번에도 흐지부지될 거라는 의구심이 가시지 않는 한 23만호가 아니라 200만호를 약속해도 그 긴 시간을 믿고 버틸 수요자는 많지 않다. 단기적으로 세제개편이나 대출규제로 집값이 떨어지는 효과가 있기는 했지만 집값은 이내 반등하곤 했다. 공급대책에 대한 신뢰가 부족했던 탓이다.업계와 전문가들이 한목소리로 주문하는 것도 결국 하나다. 정권이 바뀌고 여야 구도가 달라져도 흔들리지 않을 예측가능성이다. 대책을 내놓을 때마다 정치적 셈법에 휘둘리는 구조는 통하기 어렵다. 합의되지 않은 카드를 그때그때 불 끄듯 내놓을 게 아니라, 지금이라도 정부와 서울시, 여야가 머리를 맞대 실현 가능하고 지속 가능한 공급 로드맵을 만들어줬으면 좋겠다.
[시대데스크]"싸움을 멈추라" 오디세이의 진짜 결말
최근 개봉한 영화 '오디세이'의 결말은 원작과 다르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각색 과정에서 원작의 중요한 장면들 중 일부를 걷어냈다. 대표적인 게 결말부에서 오디세우스와 청혼자 유가족들이 화해하는 장면이다. 영화를 스포일하지 않기 위해 여기선 원작의 내용만 다룬다.약 3000년 전 호메로스가 썼다고 알려진 원작 '오디세이아'의 종반부는 현대의 시각에서 보면 다소 잔혹하다. 돌아온 이타카의 왕 오디세우스는 왕위를 노리고 자신의 아내에게 청혼하던 108명을 모두 처단한다. 그러자 청혼자의 유가족들이 오디세우스에게 복수하기 위해 몰려온다.이때 개입에 나선 게 지혜의 여신 아테나다. 여신은 "고통스러운 싸움을 멈추라"며 "피를 흘리지 말고 서로 화해하라"고 명령한다. 오디세우스의 손에 가족을 잃은 이들의 입장에선 억울했겠지만, 신에게 맞설 순 없는 노릇이다. 아테나의 중재 아래 양측은 평화의 맹약을 맺는다. 오디세우스의 서사는 귀환이나 복수가 아니라 화해의 순간 비로소 완성된다.미국의 정치철학자 J. 피터 유벤은 "정치적 정의는 철학적 정의와 다르다"고 했다. 유벤에 따르면 철학적 정의가 옳고 그름인 반면 정치적 정의는 '타자와의 화해'다. 여기서 타자는 상대 정당일 수도 있고, 같은 정당 내 다른 계파일 수도 있다. 선거 등 승부가 끝난 뒤에도 함께 어울려 살아가야 하는 존재다.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면서도 타자를 공동체의 일원으로 포용하는 것이 정치적 정의다. 17일 더불어민주당의 새로운 지도부가 탄생했다. 김민석 전 국무총리가 정청래·송영길 전 대표를 누르고 집권여당의 사령탑에 앉았다. 전당대회 기간의 치열한 공방은 친명(친이재명)계와 친청(친정청래)계 모두에 깊은 상흔을 남겼다. 2028년 총선 공천 문제가 걸린 만큼 양쪽의 절박함을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그러나 이후에도 서로를 적대시한다면 향후 총선과 대선에서 공멸할 수밖에 없다.미국 제4대 대통령 제임스 매디슨은 '연방주의자 논고'에서 '계파'(faction)의 폐해를 경고했다. 그는 계파를 없애는 건 불가능하다고 봤다. 매디슨의 처방은 계파들이 서로를 절멸시키지 못하도록 제도적 견제 장치를 갖추는 것이었다. 경쟁하되 서로를 말살하진 않는 것이 선진 정치다.안타깝게도 증오는 정치인들을 움직이는 큰 동력 가운데 하나다. 자신의 조언을 받아들이지 않고 모욕했다고 비난하고, 자신을 공천에서 배제했다고 정치적으로 반대편에 선다. 모두 사적인 감정이다. 감정은 자유지만, 그 감정이 공익을 흔드는 건 다른 이야기다. 공과 사를 가르는 경계선을 지키는 건 정치인이 시민과 맺은 최소한의 약속이다.프랑스의 정치사상가 알렉시 드 토크빌은 저서 '미국의 민주주의'에서 결사(結社)의 기술이야말로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힘이라고 했다.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이들이 함께 일하는 법을 익히지 못하면 자유는 무질서로 전락하고, 무질서는 독재를 부르는 명분이 된다고 그는 경고했다. 실제로 고대 로마와 20세기 독일, 스페인에서 이런 식으로 공화정이 무너졌다.'오디세이아'에서 청혼자 유가족들이 화해를 받아들인 건 정의가 실현됐거나 복수를 완수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피의 악순환이 이어질 경우 공동체가 붕괴될 수 있다는 인식에 기반한 결단이었다. '이재명 정부의 성공'이란 대의 앞에 누가 정통인지, 누가 '찐명'(진짜 친명)인지 뭐가 중요한가. 내부갈등은 접어두고 집값과 청년 실업 등에 대한 해법을 찾기 위해 머리를 맞대는 집권여당을 기대한다.
[시대데스크]빌라를 살리자, 주거 가치 높여서
국내 2250만 가구 중 11%(248만 가구)는 다세대·다가구·연립주택(빌라)에 거주한다. 아파트(54%)의 약 5분의 1 수준이다. 공동주택 공급과 수요가 아파트로 편중된 건 이유가 있다. 단지 규모와 인프라의 편리성, 자산 가치 등에서 다세대·다가구·빌라를 압도한다. 재테크 목적으로 빌라를 매수했을 때 감가상각을 반영한 건물 가치가 하락해 재매각도 쉽지 않다.주택용지가 부족한 서울 도심의 특성과 3~5년 이상이 소요되는 아파트 선분양 제도를 감안할 때 빌라는 공동주택 정책의 한 축이어야 한다. 8·13 대책은 아파트에만 편중됐던 주택공급 정책의 초점을 자금 문턱이 낮은 비아파트로도 돌리려 한 점에서 의미가 있다.빌라는 아파트의 공사기간 대비 절반 이상 짧은 1~2년 만에 지을 수 있다. 브랜드 아파트 대비 낮은 공사비와 분양가, 빠른 입주가 가능하다는 점은 큰 장점이다. 주로 후분양을 하기 때문에 즉시 입주가 가능하다.정부는 빌라 공급 확대를 위해 건축면적(바닥면적) 제한을 현행 660㎡에서 1000㎡ 미만으로 상향 조정한다고 밝혔다. 건축물 규모를 키워 공급 수를 늘리는 것이다. 단독 등기만 가능한 다가구주택은 3층에서 4층으로, 구분 등기된 다세대주택은 5층에서 6층으로 층수 제한을 높였다. 건설자금 대출금리는 3.5%에서 3.2%로 인하했고 대출한도를 가구당 7000만원에서 9000만원으로 올렸다. 주택매매·임대사업자가 준공 1년 내의 비아파트를 매입할 때 기존에는 주담대가 금지됐지만 앞으로는 LTV(주택담보대출비율)가 적용된 주담대를 활용할 수도 있게 됐다.실수요자들의 반응은 뜨뜻미지근하다. 온라인 부동산 커뮤니티에서는 내 집 마련의 문턱이 높아 거주 목적으로 빌라 매수를 고민하는 이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정부 차원에서 혹여나 발생할 전세사기를 엄단하겠다고 선언하고 이번 8·13 대책으로 실수요자들을 위한 각종 금융지원책을 마련했음에도 실수요자들이 빌라를 거주지로 선택하기에는 여전히 한계가 있다.빌라는 개인 건축주가 사업 주체인 경우가 많다. 건축주가 금융권의 대출이자를 계속 부담하는 대신 세입자로부터 받은 전세금으로 공사비를 상환하는 구조가 대부분이다. 과거 이같은 구조를 악용해 전세사기가 횡행하기도 했다. 반면 수천억원에서 조 단위 규모의 PF(프로젝트파이낸싱)를 승인받아 건설되는 아파트 선분양 사업은 보증 의무와 분양권 심사 등 제도권의 관리감독을 받는다. 전세사기와 같은 범행이 어려워 거주자들이 두텁게 보호받을 수 있다.빌라는 일반적으로 거주환경 면에서 아파트에 밀린다. 누수와 결로로 인한 곰팡이 발생은 임대인-임차인 분쟁으로 비화되는 경우가 많다. 주차장 부족과 시공 하자, 관리 부실 등 불만들도 허다하다. 다수 빌라는 의무 감리 대상이 아닌 경우가 많고 감리가 이뤄진다더라도 대규모 아파트와 달리 형식적인 감리로 인한 안전 리스크도 있다. 이같은 불만들이 적절히 해소되지 않는다면 빌라 공급대책은 현실에 겉돌 수밖에 없다.법인 주도로 운영되는 강남·서초·용산 등 업무지구의 고가 빌라와 타운하우스는 성공 사례의 모델이 될 수 있다. 테라스와 정원, 복층 구조 등 설계기준의 규제가 낮아 개성 있는 주거지로서 고소득층 수요 시장이 형성돼 있다. 빌라의 시공 품질 관리, 공동주택 커뮤니티 강화로 주거지로서의 가치를 올리자. 그게 자연스럽게 수요를 늘리는 길이다.
[시대데스크]K치킨 60년 진화의 비밀
말복이 코앞이다. 삼복더위에 지친 사람들에게 치킨은 대표적인 복날 음식이 됐다. 익숙한 나머지 잊고 지내지만 K치킨은 60여년에 걸친 진화의 결과물이다. 국내 치킨 시장에는 400개 안팎의 브랜드가 경쟁하고 있을 만큼 치킨은 한국인의 일상 깊숙이 자리 잡았다.시작은 '통닭'이었다. 1960년 명동에 문을 연 영양쎈타의 전기구이 통닭은 당시를 대표하는 외식 메뉴였다. 1970년대 들어 통닭 문화는 재래시장과 호프집을 중심으로 전국에 퍼져나갔다. 외식이 귀하던 시절 통닭 한 마리는 온 가족이 나누던 특별한 음식이었다. 영화와 드라마 속 노란 종이봉투가 추억의 상징으로 등장하는 이유다.1980년대 들어 통닭은 '치킨'으로 진화했다. 국내 프라이드치킨의 효시로 불리는 림스치킨이 등장했고, 페리카나와 멕시칸 등이 양념치킨을 선보이며 새로운 시장을 열었다. 1990년대 교촌과 BBQ가 산업화의 기반을 닦았고 2002년 월드컵은 치킨을 국민 음식 반열에 올려놓았다.치킨과 맥주를 함께 즐기는 치맥은 한국의 대표 음식 문화로 자리 잡았고 2021년 'Chimaek'은 옥스퍼드 영어사전에 이름을 올렸다. 음식을 먹는 행위를 넘어 응원과 축제, 위로와 공감의 순간을 함께하는 문화로 확장된 것이다.60년 동안 치킨은 끊임없이 변했다. 통닭은 프라이드치킨이 됐고, 양념치킨이 등장했으며, 치맥 문화는 국경을 넘어 세계로 확산했다. 변하지 않은 가치가 하나 있다. 가장 맛있는 순간에 치킨을 내놓겠다는 고집이다.글로벌 무대에서 K치킨의 차별점은 양념이나 소스가 아니다. 핵심은 '갓 튀겨냄'에 있다. KFC를 비롯한 글로벌 프랜차이즈가 미리 조리한 제품을 보온 상태로 판매하는 방식으로 성장한 반면 한국 치킨은 주문 직후 닭을 튀겨내는 길을 선택했다. 소비자들은 15~20분의 기다림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그 결과가 '겉바속촉'이다. 바삭한 껍질과 촉촉한 속살은 갓 튀겨냈을 때 가장 완벽하게 살아난다. 양념은 모방할 수 있다. 가장 맛있는 순간을 고객에게 전달하려는 문화는 쉽게 흉내 내기 어렵다. K치킨의 경쟁력은 레시피가 아니라 조리 방식과 철학에 있다.이 같은 경쟁력은 글로벌 시장에서 성과로 이어지고 있다. 대표 주자인 BBQ는 2003년 중국 진출을 시작으로 현재 57개국에서 800여개 매장을 운영하고 있다. 미국 시장 소비자 매출은 2021년 700억원에서 최근 3400억원 규모로 커졌다. 4년 만에 5배 가까운 성장이다.K콘텐츠의 확산은 K치킨의 해외 인지도를 높이는 촉매제가 되고 있다. 드라마와 영화 속 치맥 문화가 자연스럽게 노출되면서 K치킨은 음식이자 문화 경험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갈 길은 남아 있다. 피자와 파스타처럼 세계 어디서나 쉽게 접하는 음식으로 자리 잡으려면 현지화와 정체성 사이에서 균형을 찾아야 한다. 다양한 소스와 메뉴로 현지 입맛을 공략하면서 K치킨의 본질은 지켜야 한다.통닭에서 치킨으로, 치킨에서 K치킨으로 이어진 60년의 진화는 진행 중이다. 긴 변화의 과정에서 흔들리지 않은 원칙이 있다. 가장 맛있는 순간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 언젠가 K치킨이 세계인의 일상 속 음식으로 자리 잡는다면 성공의 비결은 화려한 양념이 아니라 원칙에 있을 것이다.
[시대데스크]레버리지 ETF 물타기 막는 정부, 62조 천재의 교훈
지난주 캘리포니아 휴양지의 토스카나풍 별장. 하객 대상 토론회에 숲속 스파 피로연까지, 며칠에 걸쳐 이어질 결혼식 준비가 한창이었다. 신랑은 24세의 AI 전문 헤지펀드 설립자, 신부는 AI 선두 기업 앤스로픽 CEO의 비서실장이다. 신부가 주문한 콘셉트는 '유럽식 정원에 특이점 직전의 분위기'였다. 미국 경제매체 포천은 이들을 'AI 파워 커플'이라 불렀다.같은 시각 신랑은 자신을 스타로 만든 펀드가 보유한 상장 주식 전량을 헐값에 팔아치우고 있었다.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아는 사람은 극소수다." 신랑 레오폴드 아셴브레너가 2024년 인터넷에 공개한 165쪽짜리 에세이의 한 구절이다. 제목은 '상황 인식(Situational Awareness)', 그가 세운 펀드의 이름이기도 하다. 논문도 보고서도 아닌 이 글은 공개 직후 실리콘밸리의 필독서가 됐다.석 달 뒤 그는 펀드를 세웠다. 운용 경험은 전혀 없었지만 컬럼비아대 19세 수석 졸업, 오픈AI 연구원 출신이라는 이력 앞에서 돈은 쉽게 모였고 성과가 남은 논란을 잠재웠다. 대표 보유 종목이던 미국 낸드플래시 업체 샌디스크는 1년여 만에 40배 넘게 올랐다. 2억2500만달러로 시작한 펀드는 2년도 안 돼 450억달러(약 62조원)가 됐다. 저명한 창업자들과 월가의 운용사들까지 돈을 맡겼고, 개인투자자들은 분기마다 나오는 공시를 뒤져 그가 산 종목을 따라 샀다.AI 시대의 아이콘으로 추앙받은 펀드의 구조는 허술했다. 반도체와 데이터센터 등 AI 인프라에 '몰빵'했다. 여기에 4배의 레버리지를 썼다. 포트폴리오가 25%만 빠져도 '녹는' 구조다. 무엇을 들고 있는지는 분기마다 공시로 드러났고, 어느 종목을 흔들면 그가 팔 수밖에 없는지 시장은 알고 있었다.7월 들어 반도체주가 꺾이자 자금을 대주던 투자은행들이 추가 담보를 요구했다. 그는 담보를 마련하기 위해 보유 종목들을 던졌다. 그중에는 SK하이닉스도 있었다. 버티지 못한 그는 결국 백기를 들었다. 인수자는 헤지펀드 시타델, 시가보다 10% 넘게 싼 값이었다.파도는 쓰나미가 되어 태평양을 건넜다. '삼전닉스'가 시총 절반을 차지하는 코스피는 27거래일 만에 39% 하락하며 IMF 외환위기 때 세운 기록을 깼다. 펀드 청산이 마무리된 것은 코스피가 저점을 찍은 날 밤이었다. 이튿날 지수는 18% 가까이 반등했다.두 달 앞서 한국 정부는 개인에게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에 2배로 걸 수 있는 단일종목 레버리지 ETF를 허용했다. 내건 명분은 해외로 나간 자금을 국내로 돌리겠다는 것이었다. 김용범 청와대 정책실장이 1월 인터뷰에서 "나스닥에서는 가능한 것을 왜 국내에서는 못 하게 하느냐"고 한 뒤 속도가 붙었다. 금융위원회 내부 문건상 하반기였던 출시는 5월 27일로 앞당겨졌다. 시장이 폭락하자 정부는 '대책'이라는 이름의 '규제'를 내놨다. 표적은 그렇게 서둘러 도입한 ETF였다. 신규 상장은 중단됐고 개인 예탁금은 3000만원으로 올랐다. 시행일은 지수가 바닥을 찍은 다음 날이었다. 고점 대비 4분의 1 토막이 난 상품을 들고 있던 개인은 반등 국면에서 추가 매수 길이 막혔지만 '대책'은 강행됐다. 6월 한 달 외국인 순매도가 49조원으로 역대 최대였는데도 시가총액의 1%도 안 되는 ETF가 하루아침에 사달의 범인이 됐다. 지수를 지키는 일이 그만큼 급했다. 대책의 정확성은 차치하고, 정부가 지수를 올리고 지킨다는 명제는 성립할까. 1세대 증권맨 윤재수가 『대한민국 주식투자 100년사』에 1989년의 기록을 남겼다. 4년 만에 일곱 배가 오른 코스피가 그해 3월 1000을 찍고 흔들리자 노태우 정부는 한국은행 발권력까지 끌어다 투자신탁회사에 자금을 대고 주식을 사들이게 했다. 지수를 떠받치기 위해서였다.시장은 정부가 개입할수록 더 내렸다. 정부가 무리수까지 동원한다는 것 자체가 사태의 심각성을 알리는 신호였다. 정부가 매수호가를 깔아주자 투자자들은 앞다퉈 팔았다. 매도가 매도를 불렀고 정부는 결국 손을 들었다. 지수는 1992년 500선이 무너진 뒤에야 방향을 바꿨다. 그 전에 1만3000여 개의 '깡통 계좌'가 일괄 정리됐다. 코스피가 1000선 박스를 벗어난 것은 그로부터 16년이 지난 2005년이다.삼성전자의 지난 분기 영업이익은 전 세계 1위다. 그 뒤를 SK하이닉스가 쫓는다. 원칙 없이 흔들리고 시도 때도 없이 개입하면 정작 필요한 순간에 쓸 카드가 사라진다는 정부의 '상황 인식'이 절실한 시점이다. 글로벌 1등 기업을 가진 대한민국의 시장 감독관에게 요구되는 최소한이다.
[시대데스크]다 팔고 문 닫는 게 낫다?…코스닥 동전주의 그림자
"차라리 회사를 다 팔고 문을 닫는 게 낫겠네요"최근 코스닥 상장사 대표들 사이에서 자조 섞인 탄식이 흘러나온다. 7월의 마지막 날, 코스피는 전장보다 1001.89포인트(17.91%) 뛴 6595.45로, 코스닥은 11.63% 상승한 719.76으로 장을 마감했다. 코스닥은 하루 만에 700선을 회복했지만 전날 고점 대비 반토막 수준인 644.78까지 주저앉았던 공포장을 고려하면 이날의 폭등은 극심한 변동성의 또 다른 단면일 뿐이다.하루 만에 지수가 11% 넘게 튀어 올랐음에도 상장사 절반 이상은 여전히 주가순자산비율(PBR) 1배 미만의 바닥권에 머물러 있다.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31일 기준 코스닥 전체 상장사(1810여개) 중 54%에 달하는 980여 개 기업의 PBR이 1배를 밑돈다. 코스닥 평균 PBR 역시 0.8배 수준의 저평가를 벗어나지 못했다.주가가 1000원 언저리를 맴도는 '동전주' 신세로 내몰린 기업도 상당하다. 특히 PBR이 0.5배 밑으로 떨어진 곳들은 회사의 전체 시가총액이 기업이 보유한 현금과 부동산 등 당장 청산한 자산가치에도 한참 못 미치는 기형적 상태다. 기업의 펀더멘털을 가늠하는 PER(주가수익비율)이 '벌어들이는 돈'의 가치라면, PBR은 기업 자산의 '마지노선'이다. 지수는 반등했을지언정 시장은 코스닥 상장사 절반 이상에 "사업을 계속하는 것보다 문을 닫는 게 낫다"는 상처뿐인 성적표를 매긴 셈이다.시장이 기업을 청산가치 이하로 냉정하게 평가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본업에서 지속적인 성과를 내지 못해 자본을 갉아먹는 데다, 대주주와 경영진이 자산을 사실상 독점한 채 주주 환원에는 담을 쌓고 있어서다.독자적인 기술력이나 확실한 실적도 없이 '기술특례'나 '테마'를 앞세워 증시에 진입한 뒤, 무분별한 유상증자와 무상증자로 연명하는 '좀비 기업'들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코스닥의 신뢰를 무너뜨리고 건전한 투자 자금을 오염시키는 진열대의 '썩은 사과'다.하지만 동전주로 전락한 기업들이 모두 '썩은 사과'인 것은 아니다. 본 가지에서 억울하게 떨어진 '낙과'(落果)도 분명 존재한다. 나름의 독보적인 기술력과 견고한 재무 구조를 갖췄음에도, 시장의 수급 가뭄과 대형주 쏠림 현상 탓에 동전주 신세가 된 경우다.진짜 코스닥의 체질을 바꾸려면 정부와 거래소의 정교한 '핀셋 대응'이 시급하다. 실적 없이 시장을 어지럽히는 부실기업은 과감히 퇴출해 진열대의 신뢰를 회복하되 매크로 외풍에 일시적으로 갇힌 정직한 기업에는 숨통을 터줘야 한다.모든 동전주에 '단칼 상폐'라는 일률적 칼날을 대기보다는 자율적 M&A와 구조조정 통로를 넓혀 기술력과 고용이 유기적으로 연착륙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줄 필요가 있다. 썩은 사과는 과감히 솎아내되 싱싱한 과일이 상하지 않도록 지켜내는 정교한 조율. 체질 개선의 기대가 또 다른 시장의 공포로 변하지 않게 하는 정책의 깊이가 필요한 시점이다.
[시대데스크]나눌 궁리, 만들 궁리
월 수출 1000억달러. 지난 6월 우리나라 수출은 1022억5000만달러를 기록했다. 독일, 중국, 미국에 이어 세계 네 번째로 월 1000억달러 고지를 밟았다. 주역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다. 올해 6월 반도체 수출은 448억2000만달러로 1년 전보다 199.5% 늘었다. 전체 수출의 43.8%다.지난 20일 새벽(한국시간) 막을 내린 2026 북중미 월드컵의 처음과 끝도 한국 가수가 장식했다. 지난달 멕시코시티 아스테카 스타디움 개막식에서 가수 이재(EJAE)는 세계적 테너 안드레아 보첼리와 공식 주제가 'DNA'를 한국어 노랫말로 이어 불렀다. 결승전 하프타임 쇼에서는 방탄소년단(BTS)이 '다이너마이트'를 열창했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원조받던 나라가 원조하는 나라로 바뀐 곳이 우리나라다. 국력과 위상은 그 어느 때보다 높아졌다. 불굴의 의지로 역경을 넘은 기업과 기업인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1983년 2월 삼성그룹 창업주 이병철 회장이 반도체 사업 진출을 알린 '도쿄선언'을 내놓았을 때 세계는 비웃었다. 일본 미쓰비시연구소는 '삼성이 반도체를 할 수 없는 다섯 가지 이유'까지 제기했다. 작은 내수시장, 취약한 관련 산업, 부족한 사회간접자본, 열악한 기업 규모, 빈약한 기술이 근거였다. 그해 12월 삼성은 64K D램 자체 개발에 성공했고 우리나라는 미국, 일본에 이어 세계 세 번째 반도체 기술 보유국이 됐다. 삼성전자는 세계에서 돈을 제일 많이 버는 회사로 우뚝섰다. 500원 지폐의 거북선 그림으로 영국 은행을 설득하고 조선소와 유조선을 동시에 지어낸 현대그룹 창업주 정주영 회장의 도전도 같은 계보다. SK하이닉스의 뿌리도 정 회장이 세운 현대전자다.최태원 SK그룹 회장이 하이닉스를 품을 때도 논란이 컸다. 2011년 인수를 결정하고 이듬해 2월 3조4000억원을 들여 채권단 손에 있던 하이닉스를 계열로 편입하자 회사 안팎에서 우려가 쏟아졌다. 그 하이닉스는 AI 시대 핵심인 고대역폭메모리(HBM) 세계 1위 기업이 됐다.굴곡의 성장사에는 눈을 감은 채 지금 우리 사회는 천문학적 이익을 어떻게 나눌지에만 몰두하고 있다. 성과급을 둘러싼 논란, 초과 이익과 초과 세수 논의가 대표적이다.최태원 회장은 지난 15일 대한상공회의소 제주 포럼 기자간담회에서 "성장이 필요하다면서도 성장하는 기업을 도와주는 제도는 많지 않다"고 토로했다. 최종 팹 완공을 최대 12년 앞당기기로 한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조차 전기와 용수 확보가 관건이다.지금의 호황은 미국의 중국 견제가 만들어낸 지정학적 특수(特需)에 가깝다. 온기는 반도체 산업에만 머물고 있다. 지난 6월 고용률은 63.4%로 석 달 연속 내려앉았고 청년층 고용률은 43.9%로 26개월째 내리막이다.경쟁 기업의 실탄 확보는 위기감을 키운다. 중국 창신메모리(CXMT)는 지난 27일 상하이증권거래소에 상장해 579억2000만위안, 한화 약 12조5000억원을 조달했다. 초과배정옵션이 전량 행사되면 조달액은 14조원을 넘는다. CXMT의 세계 D램 점유율은 지난해 4분기 4.7%에서 올해 1분기 7.6%로 뛰었다.중국 기업은 국가 자본에 자본시장 실탄까지 얹어 반도체에 쏟아붓는데 우리 기업이 처한 현실은 다르다. 경영권 방어 수단을 잇달아 걷어낸 '상법 3종 세트', 연구개발 현장에도 획일적으로 적용되는 주52시간제, 처벌 요건이 모호한 중대재해처벌법 등 기업 경영을 옥죄는 제도는 더 늘었다. 경제학자 조지프 슘페터는 자본주의를 앞으로 밀고 가는 힘이 자본과 제도가 아닌 낡은 것을 부수고 새 길을 여는 기업가의 '창조적 파괴'라고 했다. 도쿄선언이 그랬고 하이닉스 인수가 그랬다. 이병철 회장이 반도체에 도전하지 않았다면, 최태원 회장이 하이닉스를 품어 키우지 않았다면 월 수출 1000억달러는 없었다. 이익 분배의 셈법을 논하기보다 창조적 파괴가 일어날 토양을 만드는 것이 먼저다. 상황이 바뀌면 제도가 바뀌어야 한다. 제도를 만드는 사람과 따르는 사람의 태도 역시 변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미래 세대에게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없다.
[시대데스크]ETF만 문제가 아니다
최근 증시 변동성의 주범으로 삼성전자·SK하이닉스 단일종목 레버리지 상장지수펀드(ETF)가 지목됐다. 금융당국은 상장폐지, 진입장벽 강화, 레버리지 배수 조정 등 대책 마련에 분주하다. 그런데 이 상품만 잡으면 정말 증시 변동성은 잦아들까?아닐 것 같다. 한국 증시가 단 두 종목에 시장 전체가 휘둘리는 구조가 된 이유를 따져봐야 한다.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코스피에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차지하는 시가총액 비중은 지난해 말 34%대에서 올해 들어 50%를 넘어섰다. 한때 60%에 육박하는 수준까지 치솟기도 했다. 두 종목의 주가 변동에 코스피 전체가 흔들리는 구조가 돼 버린 것이다.이같은 쏠림은 다른 나라와 비교할 때 더 두드러진다. 미국 증시 대표 반도체 종목인 엔비디아조차 비중은 7%대에 그친다. 브로드컴, 마이크론은 각각 3%, 2%가 채 안 된다. 애플·마이크로소프트·아마존 등 여러 대형주가 함께 미국 주요 지수를 떠받치고 있다. 일본도 마찬가지다. 최근 일본 증시 시가총액 1위에 오른 반도체 대장주 키옥시아홀딩스도 비중은 4%대 정도에 불과하다.메모리 반도체 한 업종에, 그것도 단 두 종목에 시장이 걸려 있는 나라는 한국뿐이다. 실제로 올해 코스피는 두 차례 큰 폭으로 흔들렸다. 3월4일에는 지정학적 리스크로 12.1% 급락했고 6월 23일에는 반도체 업황 우려로 9.99% 빠졌다. 삼성전자, SK하이닉스라는 두 반도체 대형주의 하락세가 지수 전체의 낙폭으로 이어진 사례다.이같은 구조에서 단일종목 레버리지 ETF는 쏠림을 증폭시키는 장치일 뿐, 쏠림 자체를 만들어낸 원인은 아니다. ETF를 상장폐지하거나 규제를 강화해도 삼성전자·SK하이닉스에 시장이 묶여 있는 구조는 그대로 남는다. 반도체 업황이 다시 꺾이면 증시는 또 한 번 크게 흔들릴 수밖에 없다.문제의 뿌리는 산업 다각화의 실패에서 찾을 수 있다. 정부는 국민성장펀드를 150조원에서 200조원으로 늘리고 국가전략기술에 장기 자금을 공급할 한국전략기술파트너스(KSTP)까지 새로 만들기로 했다. 돈 주머니는 확실히 커졌다. 그런데 정작 이 돈을 어디에 쏟아부어야 할지, 어떤 산업을 다음 성장동력으로 키울지 그림은 잘 보이지 않는다.돈은 200조원이나 긁어 모았는데 이 돈을 어떻게 우리나라를 먹여 살릴 산업으로 육성할지가 보이지 않는다는 얘기다. 금융위원회가 자금을 공급하는 역할을 한다면 어디에 투자할지 방향을 제시하는 건 산업통상부의 몫이다. 반도체 사이클이 침체 국면에 접어들었을 때 그 자리를 대신할 제2, 제3, 제4의 챔피언을 키워내는 일이야말로 산업진흥 당국의 존재 이유다. 그런데 그런 전략은 잘 보이지 않는다는 지적이 업계 안팎에서 나온다.반도체 기업이 거둔 초과이익을 어떻게 써야할지를 두고서도 정부 내에서 의견이 모아지지 않은 듯하다. 최근 잇따른 정부 주최 토론회에서 산업통상부는 미래를 위한 투자로 돌려야 한다고 밝혔고, 고용노동부는 공정한 분배가 먼저라고 맞선다. 반도체가 벌어들인 돈을 미래 투자와 분배 중 어디에 먼저 쓸지를 놓고는 목소리가 오가지만, 정작 그 미래 투자가 구체적으로 어떤 산업을 향해야 하는지에 대한 논의는 없는 모습이 아쉽다.레버리지 ETF를 둘러싼 논쟁이 뜨거운 사이 정작 필요한 산업전략 논의는 뒷전으로 밀려나 있는 것이다. ETF 규제는 변동성을 잠시 누르는 진통제는 될 수 있어도 근본 처방은 아니다. 지금이라도 정부가 반도체 이후를 대비한 산업 다각화 전략을 짜는 데 집중해줬으면 좋겠다.
[시대데스크]지방정부 경쟁력 후퇴시키는 인사 리스크
6·3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정치 드라마를 새로 쓴 오세훈 서울시장이 취임 일주일 만에 인사 태풍을 몰고 왔다. 오 시장의 재선으로 조직 안정을 기대했던 서울시 내부는 예상 못한 인적 쇄신에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연초 행정1부시장을 포함한 주요 고위직의 교체가 이뤄졌고 시정 연속성을 위해서는 인사 폭이 크지 않을 것이라는 세간의 예상이 엎어진 배경에 '정치 인선'의 논란이 있었다. 선거 운동 과정에서 일부 고위 공무원이 오 시장의 상대 후보였던 정원오 측에 지지 의사를 표시한 것으로 알려지며, 대규모 인사의 빌미를 제공했다는 해석이 공공연히 나왔다.선출직 광역단체장이 새 임기를 시작하며 시정 철학을 공유하는 진용을 구축하고 이를 위해 인사권에 많은 권한과 책임이 있다는 사실은 부인하기가 어렵다.다만 인사는 인재를 중용하는 것이 본질이며 타당성이 있어야 한다. 인사의 과정과 결과가 숙청이라는 프레임에 갇히면 쇄신의 명분도 빛을 잃게 된다. 재선 시장의 진정한 위엄은 힘을 과시하는 인사가 아닌, 반대편을 포용하는 리더십에서 나올 수 있다. 서울시는 대한민국 최대 지방정부이자 중앙정부에 버금가는 중요 행정기관이다. 4년마다 바뀌는 선거 결과에 따라 인사 후폭풍을 피하지 못하고 조직 내부가 혼란과 눈치보기로 흔들리는 현 상황을 가볍게만 봐선 안된다. 서울시 조직 규모는 본청 공무원 약 2만명과 구청, 산하 공공기관 6만~7만명을 포함해 8만~9만명에 달한다. 3급 이상에 해당하는 본청 44개 실·본부·국의 30개 장이 지난 13일자로 교체됐다. 서울시와 정책 업무를 조율하는 구청과 산하기관 직원들도 인사를 앞두고 술렁였다는 게 관가 안팎의 말이다.이 같은 인사의 여파는 과거 전임 시장 때도 겪어온 지방정부의 한계점을 보여준다는 지적이다. 인사 단행 후 조직 정비까지 길게는 수개월이 소요된다.━소신 있고 봉사정신 투철한 공무원 조직 필요━행정기관 인사는 경쟁력 있는 구성원을 이끄는 리더의 능력을 보여준다. 민주주의 꽃인 선거가 정당성을 얻으려면 정치적인 기여도나 줄서기에 의해 인선이 좌우되지 않아야 한다.서울시 공무원의 맨파워는 선진국의 어느 나라에도 뒤처지지 않는다고 평가한 외부 인사가 있다. 이렇게 능력 있는 공직 사회가 정치성에 따라 움직이면 소신 있게 일할 수 있는 관료는 줄어든다. 정권의 입맛에만 맞추려는 기회주의 문화가 팽배해진다.지금 서울시에 필요한 것은 인적 청산보다, 시정의 안정과 발전을 목적으로 한 시스템 인사가 아닐까.오 시장은 서울시를 글로벌 톱3 도시의 반열로 올려놓겠다는 구상을 내놨다. 국제사회에서 이미 하나의 브랜드가 되어버린 서울은 아시아 허브이자 글로벌 시티로 인정받고 있다.경기 침체와 민생 위기 속에서 서울시가 흔들림 없이 나아가려면 지금 필요한 건 당파를 떠난 조직의 안정과 협치다.정치적인 계산이나 대립보다 오로지 능력과 시민을 향한 봉사 정신이 존중되는 탕평 인사가 향후에 이뤄졌으면 한다.


![[시대포럼] AI 대전환의 시대, AI 풀스택 대한민국의 도약](https://i.ytimg.com/vi/VcbpSJtXg6o/maxresdefault.jpg?width=1920&quality=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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