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광장
[시대광장/박창억]2030의 참정권 시위와 정치의 실패
문재인 전 대통령은 지난 2018년 1월 말 청와대 행사에서 평창 동계 올림픽 여자 아이스하키 남북 단일팀 구성을 둘러싼 잡음과 관련해 "선수들의 입장을 제대로 헤아리지 못했다"고 유감을 표시했다. 남북 단일팀 구성을 밀어붙이는 과정에서 오랜 시간 훈련해 온 일부 한국 국가대표 선수들의 올림픽 출전 기회가 일방적으로 박탈당했다는 논란이 빚어졌기 때문이다. 당시 2030 세대를 중심으로 '한국 선수에 대한 역차별이자 절차적 정당성의 훼손'이라는 주장이 확산됐다. 2017년 '인천국제공항공사(인국공) 사태' 당시에도 청년층이 공정을 요구하며 반발했다. 이번 6·3 지방선거 직후 투표용지 부족 사태에 항의하며 거리로 나선 2030 청년들의 시위 역시 돌출 행동이 아니다. 그간 축적되어 온 청년 세대의 가치관과 '절차적 정당성'에 대한 추구가 다시 발현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 개표소 앞을 메운 청년들의 집단행동은 낙후된 한국 정치와 선거 행정의 무능에 대한 매서운 질타다. 박빙 승부처에서 발생한 투표용지 부족 사태는 민주주의의 가장 기초적인 토대이자, 유권자가 신뢰하던 시스템의 절차적 정당성을 뿌리째 흔들어 놓았다. 국가의 행정 부실로 인해 헌법이 보장한 최소한의 기본권마저 침해당하자 청년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온 것이다. 이번 시위에서 더욱 주목해야 할 점은 청년들이 보여준 행동의 밑바탕에 깔린 구조적인 좌절감과 분노다. 치열한 입시 경쟁과 좁아진 취업 문턱을 겪으며 공정성이라는 가치를 삶의 생존 원칙으로 체화한 2030 세대에게, 민주주의의 출발점인 '1표의 가치'가 훼손된 상황은 결코 용납될 수 없는 상식의 파괴다. 이 분노의 저변에는 몇 년째 해소되지 않고 구조화된 일자리 부족 현상과, 청년의 월급으로는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을 만큼 벌어진 자산 격차 속에서 누적된 청년들의 박탈감이 똬리를 틀고 있다. 벼랑 끝에 몰린 청년들에게 최소한의 계층 이동 가능성마저 원천 차단해 버린 기성 정치가 이제는 민주주의의 최후 보루라 할 수 있는 선거권마저 가로막았다는 극도의 무력감이 폭발한 것이다. 그러나 시위가 장기화되면서 현장에서는 우려스러운 징후도 포착되고 있다. 참정권 침해 항의에 슬그머니 숟가락을 얹으려는 부정선거 음모론자들이 가세하면서, 일부 참가자들의 일탈 행동이 명분을 흐리고 있다. 경기장을 출입하는 이들을 대상으로 한 사적 검문이나 현장 경찰관을 향한 폭언과 조롱은 시위의 순수성을 훼손하는 자충수다. 참정권 침해라는 본질적 문제 제기가 극단적 구호와 음모론에 뒤덮이는 순간 청년들의 정당한 저항은 그 정당성을 잃게 된다. 행정 참사의 책임을 묻는 것과 검증되지 않은 부정선거론을 확산시키는 것은 엄격히 분리되어야 마땅하다. 정작 이 사태를 수습해야 할 정치권의 행태는 여전히 실망스럽기 그지없다. 애초에 사태를 이 지경으로 만든 것도 정치의 무능과 무관심 때문이다. 2030 세대들은 기성 권력이 과정의 공정성을 무시하거나 청년들이 쏟은 노력의 가치를 외면했을 때 진영을 막론하고 단호히 저항해 왔다. 그러나 그때마다 정치는 근본적인 구조 개혁 대신 임기응변식 미봉책을 내놓기에 급급했고, 청년들의 목소리를 정략적으로 이용하는 데만 몰두했다. 이번에도 정치권은 청년들의 팍팍한 삶을 근본적으로 개선할 대안을 모색하거나, 선거 행정 참사의 원인을 투명하게 규명하고 피해를 입은 주권자들의 권리를 구제하는 본연의 책임은 뒷전으로 미루어 두었다. 그 대신 집회 현장을 바라보며 상대를 향해 비난의 화살을 돌리는 네거티브 정쟁의 소모적 수단으로만 이 사태를 소비하기 바쁘다. 다시금 '정치의 실패'만 확인하고 있다. 송파구의 외침을 한국 정치를 한 단계 진화시키는 동력으로 삼으려면, 정치권부터 감정적인 정쟁을 배제하고 구조적인 제도 개선에 즉각 착수해야 한다. 여야가 지난 16일 선관위 국정조사 실시에 합의한 만큼, 이번만큼은 정략을 철저히 배제하고 행정 참사의 진상을 명백히 밝혀야 할 것이다. 나아가 기술적 결함을 원천 차단하기 위해 투개표 시스템 전반의 재설계도 과감히 추진해야 한다. 송파구 개표소 앞의 분노를 또다시 진영 싸움으로 오독하거나 방치한다면 우리 민주주의의 미래는 없다. 청년들의 정당한 절규를 제도 개혁으로 전환하는 책무가 이제 정치권의 무거운 과제로 남았다.
[시대광장/이상복]중국을 보는 두 개의 착시
"관등성명을 대라. 중국 공안 아니냐."최근 서울 잠실 개표소 앞 시위 현장에서는 믿기 어려운 장면이 벌어졌다. 일부 시위 참가자가 경찰관을 중국 공안으로 의심하며 신분 확인을 요구한 것이다. 현장을 취재하던 대만 언론인들은 "우리는 중국인이 아니다"라고 적힌 종이를 들고 다녀야 했다. 온라인에선 집회 현장에 배치된 경찰관들이 중국인이라는 주장이 퍼졌고, 결국 경찰청이 공식 설명에 나섰다. 앞서 계엄과 탄핵 정국에서도 중국인이 선거에 개입했다거나 중국 공안이 활동하고 있다는 근거 없는 주장이 끊임없이 유통됐다.이런 현상은 단순한 해프닝이 아니다. 오늘날 한국 사회가 중국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면이다. 어느 순간 중국은 사회적 불안과 정치적 분노가 투영되는 거대한 스크린이 됐다. 선거에 대한 불신도, 정치적 양극화도, 경제적 불안도 때로는 "중국 때문"이라는 설명으로 수렴된다. 반대로 어떤 이들에게 중국은 여전히 경제 협력과 한반도 문제 해결을 위한 핵심 협력자로 인식된다. 정반대처럼 보이는 두 시선에는 공통점이 있다. 실제 중국을 보기보다 각자의 기대와 두려움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이다.보수 진영 일각의 착시는 중국을 만능 악역으로 보는 데서 시작된다. 중국의 군사력 증강과 대만해협 긴장, 북·중·러 협력 강화 등을 고려하면 경계심 자체는 자연스럽다. 문제는 경계심이 혐오와 음모론으로 변질될 때다. 중국을 국내 정치 갈등의 원인으로 지목하거나 사회 문제의 배후로 상정하는 순간 현실 인식은 흐려진다.실제로 최근 "중국인이 강남 아파트 수백 채를 싹쓸이했다"는 보도가 나왔지만 사실과 달랐다. 반중 정서를 자극하는 이야기가 사실 여부보다 먼저 확산되는 현실을 보여준다. 중국의 과학기술과 산업 경쟁력을 바라볼 때도 마찬가지다. 중국의 첨단기술 발전을 기술 탈취와 모방의 결과로만 치부하는 시각은 냉정한 분석을 가로막는다. 상대를 과대평가하는 것만큼이나 과소평가하는 것도 위험하다.일부 진보 진영의 착시는 중국을 경제 협력과 북핵 해결의 파트너로 고정해 놓는 시각이다.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전략적 모호성을 유지하면 국익을 극대화할 수 있다는 주장도 같은 맥락이다. 하지만 현실은 과거와 달라졌다. 한국은 사드 배치 이후 중국의 비공식 경제 보복을 경험했다. 한한령은 문화·관광 산업에 적지 않은 타격을 줬고 최근에는 희토류와 핵심 광물이 외교적 압박 수단으로 활용되고 있다. 경제 협력의 필요성이 중국의 강압적 행태까지 눈감아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북핵 문제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는 오랫동안 중국이 북한을 움직일 수 있는 핵심 지렛대가 될 거라고 기대해 왔다. 그러나 북한이 중국의 전략적 이해관계에 협조하는 동안에도 중국은 비핵화 문제를 최우선 과제로 다루지 않았다. 최근 북중 정상회담에서도 비핵화는 주요 의제로 부각되지 않았다. 중국을 통해 북핵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오래된 가정 역시 재검토가 필요한 시점이다.한국 사회는 중국을 어떻게 볼 것인가를 두고 끊임없이 논쟁한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질문은 따로 있다. 중국은 한국을 어떻게 바라보는가다. 중국은 한국 내부의 보수·진보 논쟁보다 한국이 미국 동맹 체제 안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느냐에 더 관심이 있다. 미·중 전략 경쟁이 격화될수록 한국은 독립된 행위자라기보다 미국 주도의 동맹망을 구성하는 핵심 축으로 비친다. "중국의 패배에 베팅하면 후회할 것"이라는 싱하이밍 전 주한 중국대사의 발언은 그런 시선을 단적으로 보여준다.이재명 대통령이 최근 해외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안미경중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고 언급한 것은 달라진 국제 환경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안보는 미국, 경제는 중국이라는 공식은 오랫동안 한국 외교의 기본 전제였다. 그러나 이제 경제와 안보를 별개의 영역으로 나눠 생각하기 어렵다. 반도체와 배터리, 인공지능, 희토류, 공급망은 모두 국가 안보와 직결된다.특히 미국은 첨단 반도체에 이어 최첨단 AI 모델 접근까지 국가안보의 관점에서 관리하기 시작했다. 중국 역시 오픈소스 전략을 앞세워 자국 AI 생태계 확대에 나서고 있다. 기술 플랫폼과 데이터, AI 모델 자체가 국가 전략자산으로 취급되는 시대다. 경제와 안보, 기술과 외교의 경계가 빠르게 허물어지고 있는 셈이다.중국은 여전히 중요한 시장이지만 동시에 가장 강력한 경쟁자이기도 하다. 따라서 지금 한국에 필요한 것은 친중도 반중도 아니다. 미국과의 동맹을 외교의 중심축으로 유지하면서 중국과는 협력할 분야와 경계할 분야를 명확히 구분하는 전략적 현실주의가 요구된다. 협력은 실용적으로 추진하고, 국익을 침해하는 행위에는 단호하게 대응해야 한다.현장 경찰관을 중국 공안으로 의심하는 사회는 중국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반대로 중국의 선의만 기대하는 사회 역시 현실을 직시할 수 없다. 국가 전략은 혐오도 환상도 아닌 냉정한 현실 인식 위에서만 가능하다. 중국을 둘러싼 두 개의 착시에서 벗어날 때 비로소 우리는 중국의 위협은 물론 기회까지 정확히 읽을 수 있다. 그것이 미·중 경쟁 시대에 한국이 가져야 할 현실주의의 출발점이다.
[시대광장/정용관]청년은 진보나 보수의 예비군이 아니다
처음에는 낯설었다. 선거 때마다 반복되는 부정선거론의 연장선쯤으로 여겼다. 그러다 수만 명의 2030 청년들이 모여 "재선거"를 외치는 모습을 보며 의아해졌다. "저건 도대체 뭘까." 이들 세대를 자주 접하는 한 중견 정치학자에게 물었더니 뜻밖에도 이런 답이 돌아왔다."제가 꼰대 같지만 철딱서니 없는 주장입니다."선관위의 투표용지 관리 실패는 경악할 일이지만, 선거 자체를 무효로 하고 다시 치르자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라는 것이다. 자칫 부정선거론의 먹잇감이 될 수 있다는 우려도 덧붙였다. 서울시장 재선거 요구는 법적으로 현실성이 희박하고 정치적으로도 설득력이 약하다. 그와 별개로 이번 현상을 단순한 해프닝으로 넘기기 어려운 이유가 있다. 꽤 이례적인 현상이기 때문이다.대부분의 선거 논란은 승패에서 출발한다. 이긴 쪽은 결과를 수용하고 진 쪽은 문제를 제기한다. 그런데 이번에는 달랐다. 집회에 나온 상당수는 오세훈 후보를 지지했던 청년들이라고 한다. 오 후보는 6만 표 차의 극적인 역전승을 거뒀다. 그러나 그들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누가 이겼는가보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었는가를 물었다. 승패보다 절차에 민감하게 반응한 것이다."우리는 극우도, 뉴라이트도 아니다. 그저 나의 권리(My Right)를 지키기 위해 이 자리에 섰다." <동행미디어 시대>가 현장에서 만난 청년들의 말이다. 참정권과 기본권 훼손을 그냥 넘길 수 없다는 것이다. 어쩌면 이것이 오늘날 2030세대의 정치 감각인지도 모른다. 불안한 경쟁 속에서 성장한 이들은 절차와 공정에 유독 민감하다. 입시와 취업, 병역과 부동산, 주식과 가상자산 시장을 거치며 규칙 하나가 인생을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을 몸으로 체득했다. 공정한 룰과 개인의 기본권 보장은 교과서 속 추상적 가치가 아니라 삶의 조건이다.기성 정치권은 오랫동안 청년을 진보와 보수의 예비군으로 이해해 왔다. 그러나 이들은 기존 정치의 문법으로는 설명하기 어렵다. 손에 잘 잡히지 않는 세대다. 특정 진영에 대한 소속감이나 충성심보다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는지에 더 관심이 많다. 조직도 없고 지도부도 없다. 주로 소셜미디어(SNS)를 통해 소통하고 연대한다. 중구난방처럼 보일 수도 있고, 종합적 사고가 부족하다는 지적을 받을 수도 있다. 분명한 것은 그 밑바닥에 하나의 감각이 흐른다는 점이다. "이건 아니잖아."문제는 여기서부터다. 청년들이 거리로 나오자 정치권도 바빠졌다. 청년들의 문제 제기가 채 정리되기도 전에 각자의 해석과 주장들이 쏟아졌다. 선관위의 관리 부실을 비판하는 목소리는 어느새 전국 재선거론으로 번졌고, 청년들의 분노는 특정 정치세력의 주장과 뒤섞이기 시작했다.물론 일부 청년들도 재선거를 강하게 요구한다. 하지만 그들의 구호가 곧바로 정답이 되는 것은 아니다. 선관위의 책임은 무겁다. 책임자 문책과 조직 혁신도 불가피하다. 그러나 그것과 선거 결과를 무효로 하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다. 민주주의는 완벽해서 유지되는 제도가 아니다. 실수와 결함이 있더라도 그것이 선거 결과를 본질적으로 왜곡하지 않았다면 결과를 존중하는 원칙 위에서 굴러간다. 그렇지 않으면 모든 선거는 끝없는 불복의 유혹에 노출될 수밖에 없다.청년들의 문제 제기를 부정할 이유는 없다. 선관위 사태가 이 정도까지 드러난 것도 결국 2030의 '주권 의식'과 '순수한 분노'가 있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 분노의 에너지가 정략적으로 왜곡되고 소비되는 것이다. 전국 재선거라는 억지 주장이 나오고, "오세훈 물러나라는 것이냐"고 반박하고, 그런 야권의 내분을 여권은 내심 즐기는 블랙 코미디 같은 상황이 펼쳐지고 있다. 잠실에 모인 2030 청년들은 정치적 신념보다 삶의 불안이 더 큰 세대인지도 모른다. 코스피 상승장의 낙오자일 수도 있고, '거지맵'을 켜고 가성비 식당을 찾아다니는 청년일 수도 있다. 미래는 불안한데 자신을 대변해 줄 정당도, 믿고 의지할 기성세력도 찾지 못한 채 떠도는 '부유(浮遊) 세대'일 수도 있다.그래서 이들을 함부로 진보나 보수로 규정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누구의 것도 아니다. 오늘의 보수가 내일의 진보가 될 수 있고, 오늘의 진보가 내일의 보수가 될 수도 있다. 청년들의 분노, "이건 아니잖아"라는 외침은 아직 방향을 찾지 못한 에너지다. 잠실의 함성은 시간이 지나면서 잦아들 것이다. 그렇다고 그들의 잠재적 에너지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들 스스로 그 에너지를 긍정적으로 승화할 수 있도록 정치적·사회적 공간을 열어주는 것, 냉소와 환멸로 흩어지지 않도록 하는 것, 그것이 기성 세대와 정치권의 책임이다.그들의 분노는 숭고했지만 재선거 주장은 미숙했을 수 있다. 그러나 그 분노 위에 서둘러 정치적 깃발을 꽂고 먹잇감 삼으려는 일부 퇴행적 정치세력의 행태는 그보다 훨씬 낯뜨겁다. 궁색하고도 초라하다. 돌아보니 정작 철딱서니 없어 보였던 것은 순수하지만 서툰 분노에 편승할 궁리만 한 그들의 낡은 습성이다.
[시대광장/채인택]중국은 지금 우리에게 무엇인가
우리에게 중국은 어떤 존재인가? 1992년 수교 이후 지금까지 중국은 활발한 경제교류로 동북아 번영 시대를 함께 이끄는 동반자였다. 하지만 올해 들어 연이어 들려온 중국 시진핑(習近平)과 각국 지도자와의 정상회담 소식은 이러한 중국의 의미가 바뀌는 시대에 접어들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지난 1월 5일 이재명 대통령을, 5월 12~15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같은 달 19~20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베이징에서 각각 만난 시 주석이 이번엔 8~9일 평양으로 향했다. 2019년 6월 이후 약 7년 만에 방북으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는 지난해 9월 베이징 전승절 행사 이후 9개월 만의 만남이다. 중국 CCTV에 따르면 8일 김 위원장은 부부가 함께 공항에 달려 나가 영접했을 정도로 시 주석을 열렬하게 환영했다. 잠시 시곗바늘을 지난 1월 5일로 돌려보자. 그날 이 대통령은 베이징에서 시 주석을 만나 한반도 평화 정착과 북한 비핵화를 위한 중국의 건설적인 역할을 당부했다. 시 주석은 평화 안정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대답했다. 이 때문에 한국에선 시 주석이 북한을 설득해 남·북, 북·미 회담을 주선하고 비핵화를 압박할 것이란 기대가 일부 있었다. 그런데 시 주석은 방북일인 8일자 노동신문 기고문에서 이런 기대를 완전히 저버렸다. '각자 국정에 맞는 사회주의 노선을 걸어가도록 서로 지지한다'이라는 대목은 누가 봐도 북한의 핵·미사일 개발 노선과 세습체제를 대놓고 인정하는 것으로 읽히기 때문이다. 기고문은 한술 더 떠 '패권주의·강권 정치 반대''군국주의 부활 반대' '운명공동체' 등 전에 볼 수 없던 표현으로 북·중 전략연대로 미국·일본과 대립각을 세우겠다는 뜻을 분명히 밝혔다. 여기에 '중조친선협조관계 설계' '중조관계발전의 설계도'란 말을 넣어 양측이 모종의 프로젝트를 합의했음을 시사했다. 중국이 동해에 접한 북한의 라선특별시나 함경북도의 특정 항구를 개발해 북극항로 개척에 이용하는 '빙상 실크로드(Polar Silk Road)'가 여기에 해당할 수 있다. 빙상 실크로드 협조와 북한 핵·미사일·세습체제를 인정을 서로 맞바꾸는 거래일 수도 있다. 또 하나 눈에 띄는 것은 기고문에서 '비핵화'라는 단어를 찾을 수 없었다는 사실이다. 북한 김여정 당 총무부장이 6일 담화에서 지난달 미·중 정상회담에서 양국 정상이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 방침에 동의했다는 백악관 발표를 '날조'라고 비난하고 "우리의 핵보유국 지위는 절대불퇴의 한계선이며 누가 인정하든 말든 엄연한 현실"이라고 주장한 것과 일맥상통한다. 북핵 문제와 관련해 남북과 미·중 사이에서 전략적 모호함을 유지하던 중국이 이제 완전히 북한 손을 들어준 것일까. 주목할 점은 1961년 7월 베이징에서 북한 김일성 위원장과 중국의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가 '우호협력상호조약'을 체결한 지 올해로 65주년을 맞았다는 점이다. 제2조에 '일방이 무력 침공을 당함으로써 전쟁 상태에 처하게 되는 경우에 상대방은 모든 힘을 다하여 지체없이 군사적 및 기타 원조를 제공한다'는 자동참전 조항이 담겼다. 시한이 없는 대신 양국 지도자가 수시로 언급해 작동을 확인해왔다. 이번 기고문은 '시대가 어떻게 바뀌고 국제정세가 어떻게 변해도 전통적인 중조친선은 언제나 불패'라는 문장으로 조약의 건재함을 재확인했다. 지금까지 북핵을 머리에 이고 살아왔던 우리가 이제 북핵과 미사일의 후견자가 된 중국과도 상대해야 하는 시대를 맞은 셈이다. 눈 앞에 펼쳐진 냉혹한 전략적·군사적 현실이다. 어디 그뿐인가. 중국은 오랫동안 한국을 상대로 '디지털 중국몽'에 해당하는 영향력 공작까지 펼쳐왔다. 정보 당국에 따르면 중국 공산당의 군대인 인민해방군은 이미 2003년부터 인터넷을 통해 여론전·심리전·법률전의 '삼대전쟁(三戰)'을 펼쳐왔다. 외국 국민이 중국을 '곧 미국을 대신할 긍정적인 패권세력'으로 믿도록 여론몰이하고 심리적으로 조종해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국가 차원의 공작이다. '중국이 곧 세계의 패권국가가 될 것이라니 알아서 지금부터 말을 잘 들어라'라고 가스라이팅 하는 것이다. 증거 확보도, 기소도 쉽지 않은 은밀한 공작이다. 가까운 한국·대만·일본이 삼대전쟁의 가장 적극적인 대상일 수밖에 없다. 선거로 정권을 수시로 바꾸는 민주 체제라는 점에서 더욱더 눈엣가시이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미디어와 SNS의 인플루언서·허위계정 등을 이용해 여론과 행동을 조작한다. 해킹으로 정보를 수집하고 알고리즘을 이용해 개인·집단의 생각과 행동을 조종하기도 한다. 미국 정보당국의 분석에 따르면 최근엔 인공지능(AI)을 통한 빅테이터 분석과 소셜미디어 플랫폼 활용으로 대중의 사회적 행동 조종을 시도하고 있다. 한반도 평화와 안정을 방해한다며 우리 군과 주한미군의 훈련 축소를 유도하는 내용도 포함된다. 대만 공격 압박과 공포심 조장도 그중 하나다. 9월 24일로 예정된 시 주석의 방미에서 이를 협상카드로 사용할 가능성도 있다. 믿을 수 있는 건 미국의 대중 경계의식이다. 지난 5월 방중을 마치고 베이징을 떠나기 직전 대통령 전용기 탑승자들이 중국에서 사용했던 모든 디지털·마그네틱 도구를 폐기했을 정도다. 여론과 정책 의사결정에 영향을 미치려는 중국의 영향력 공작에 이러한 의식은 그야말로 '아이언 돔' 역할을 한다. 미국이 과거 나치와 대결할 때 만든 외국대리인등록법(FARA)을 바탕으로 외국 정부나 단체의 이익을 대변하는 로비스트나 대리인의 활동과 자금 출처를 공개하도록 하는 것도 긍정적이다. 최근 캘리포니아의 소도시 아카디아의 에일린 왕 시장이 중국 정부의 스파이(미등록 외국 대리인) 활동 혐의로 기소돼 경종을 울렸다. 그런 점에서 외국대리인등록법이 21대 국회에 상정됐지만 통과하지 못하고 폐기됐다가, 22대에 다시 상정된 뒤에도 장기 대기 중인 한국이 더욱 걱정된다. 우리에게 중국의 의미가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볼 때다.
[시대광장/김준술]최태원 회장이 던진 '모래밭' 화두
중국 북서부 고비의 모래사막은 버려진 땅이었다. 지금은 1만2000개의 태양열 반사판이 일제히 중앙탑으로 열을 보내 엄청난 전력을 생산한다. 황무지 서부의 전력은 동쪽의 산업 지역에 보낸다. 이른바 '서전동송'(西電東送) 정책이다. 인공지능(AI) 전쟁의 승패를 좌우하는 전력 싸움에서 중국은 이미 미국을 앞서간다. '저공(低空) 경제'는 또 어떤가. 중국은 지상에서 1km 이내 공간을 저공 영역으로 정해 전략 사업으로 밀고 있다. AI로 드론을 날리는 것을 넘어 물류와 농업·소방 같은 산업과의 융합을 꿈꾼다. 하늘을 규제 없이 활용할 수 있는 '실증 공간'으로 허용하면서 가능한 일이었다.두 장면은 최근 화제였던 KBS 다큐멘터리 '인재 전쟁 2'에 소개된 내용이다. 곱씹어보면 공통으로 담긴 코드가 있다. 바로 '마음껏 실험하고, 시도하라'는 교훈이다. 이것이 전제돼야 비로소 AI 패권 전쟁에서 '속도'를 담보할 수 있다. 속도는 왜 중요한가. 선점과 선두는 곧 승률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중국 엔지니어들은 먼저 행하고 먼저 시험하는 '선행선시'(先行先試) 문화를 자랑한다. 거침없는 진격의 관행은 절로 생기지 않았다. '규제 같은 건 생각 말라'는 중국 정부가 뒤에 있었다.주눅 드는 중국 사례를 놓고서 "남보다 느려지면 잡아 먹힌다"는 경고가 곧장 나왔다. 발언자는 최태원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이자 SK그룹 회장이었다. 최 회장은 방송에 연사로 등판해 AI 시대의 절박하고도 시급한 화두를 여럿 던졌다. 강연 도중에 개인적으로 '이거다' 싶은 순간이 있었다. 바로 'AI 시티'를 제안한 대목이었다. AI 기술과 제도를 실험할 수 있는 특정한 도시 공간을 말한다. 최 회장은 "완벽한 제도를 기다리다 글로벌 속도전에서 도태된다"면서 조속히 AI 시티를 구축하자고 제언했다. 먼저 공청회를 하고, 법과 제도를 만든 뒤, 감독 기관을 두는 방식. 이런 20세기의 틀로는 이제 먹히지 않는다는 호소다.AI 시티가 완전히 새로운 개념은 아니다. 국토교통부 자료를 찾아보니 지난해 9월 태스크포스 팀을 꾸렸고, 여러 회의 끝에 6월에 강원권과 충청권에서 AI 시범 도시를 정한다. 교통·에너지·로봇에 AI를 접목하고, 민간 기업도 들어와 시험할 수 있도록 규제도 손질한다. 현재 국정과제 '31번'으로 사업을 추진한다. 광주광역시에선 도시 전체를 자율주행차 200대가 시험 주행하는 프로젝트도 진행 중이다.그러나 시간은 빠듯하다. 자율주행 실증 사업만 해도 "미국과 중국의 실력이 성인이면 우리는 초등학생 수준'이라는 게 국토부의 절박한 평가다. 비단 이동 수단뿐 아니다. AI 시티에선 에너지, 의료, 재난방지, 교육처럼 도전 분야가 무궁무진하다. 여기서 성공하면 새로운 이윤 산업으로 키울 수 있다. 마침 청와대에 'AI 미래기획수석' 자리가 있다. 공석인 수석 자리에 누가 들어가든 국정 과제 순번도 당기고, 더욱 다양한 프로젝트를 설계하고 조율해 더 빠르고 과감하게 지원하면 좋겠다. 새만금에선 현대차가 큰돈을 투입해 로봇택시 실증 사업을 추진한다는데 민간이 참여할 유인도 더 많아져야 한다.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AI 시티의 '본질'이다. 많은 정부 프로젝트가 그랬듯 '보여주기'로 흘러선 안 된다. AI 서비스가 멋지게 구현된 물리적 도시를 완성하는 일도 물론 필요하다. 하지만 최 회장은 결과물로서 도시 자체보다는 사전적인 '규제 프리(Free)'에 더욱 방점을 찍고 있다. 그는 이른바 '샌드박스' 제도를 도입하자고 강조했다. 아이들이 모래밭에서 마음껏 뛰어놀 듯, AI 기술과 서비스를 제약 없이 펼칠 경연장이 절실하다는 취지다. 다소 파격적으로 "스타트업 종사자, 전문가들을 보내 아예 자치를 해보라고 하면 좋겠다"고 제안한 것도 그런 맥락으로 보인다.누군가는 AI 시티 안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며 부작용이나 안전사고를 우려할 수 있다. 하지만 거꾸로 생각하면 미리 경험해 봐야 문제를 빨리 수정하고 대안을 찾을 수 있다. 우리가 중국보다 늦었다지만 부정적으로 생각할 일은 아니다. 한국은 디지털 수용도가 높아 AI 시티를 다루기에 좋은 환경이다.지금은 제도를 만든 뒤 실험하는 게 아니라, 먼저 실험한 뒤 제도를 만드는 시대가 됐다. 중국은 이미 거대한 실험실을 만들었다. 우리는 아직 '실험 계획서'를 쓰고 있다. 마음껏 실력을 시험하고, 실패해도 되는 '모래밭'이 절실하다. 지금 뜨거운 화두 중 하나가 'AI 반도체 이윤'을 둘러싼 분배 논쟁이다. 잊지 말아야 할 질문이 있다. 10년 뒤에도 또 다른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나올 수 있는가. 모두가 더 오래, 더 많이 나누기를 바란다면 답은 분명하다. 혁신의 모래밭부터 넓혀야 한다.
[시대광장/이상언]볼보는 왜 중국에? '연대임금'의 비극적 결말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표면적 이유는 미국에서의 볼보 자동차 판매량이 1975년 6만338대에서 지난해 4만3887대로 추락했다는 것이다. 판매 감소는 국제 경쟁력 하락이라는 고질적 문제의 한 증상일 뿐이다. (중략) 더 큰 문제는 결근율이다. 볼보의 예테보리 본사 옆에 있는 토르스란다 조립 공장의 결근율은 20%에 달한다. 일부 근로자들은 1년에 평균 65일 결근하기도 한다.' 1977년 2월 21일자 타임지 기사 '스웨덴: 일하지 않아도 주는 급여(Sweden: Pay for no work)'의 일부다. ━이직률 50%까지, 무슨 일이?━ '1980년대 초 볼보 생산 현장은 조용하지만 파괴적 반란에 직면해 있었다. 주력인 토르스란다 공장의 일일 결근율은 최고 20%에 육박했고, 연간 직원 이직률은 40% 가까이로 치솟았다. 볼보가 라인을 계속 가동하기 위해서는 매년 수천 명의 신입 사원을 고용하고 교육해야 했음을 의미했다.' 1987년 뉴욕타임스 기사('Making cars the Volvo way')의 한 대목이다.볼보 자동차 공장 이직률이 50%에 달했다는 기록(스웨덴 왕립공대 논문)도 있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자동차 공장 일은 힘들고 지루하다. 포드가 컨베이어벨트 공정을 도입한 뒤 그게 국제 표준이 됐다. 고된 노동을 버티게 하는 힘은 급여다. 그런데 볼보 자동차 직원 급여는 중소 제조업체 직원이 받는 보수와 다르지 않았다. 볼보 경영진이 월급을 올려주고 싶어도 올려줄 수 없었다. '사회연대임금'이라는 제도에 금액이 묶였기 때문이었다.스웨덴도 제조업 붐이었던 20세기 초중반에 극심한 노사 갈등을 겪었다. 1931년 펄프 공장 파업 투쟁에서 군의 발포로 5명이 숨진 비극도 있었다. 파업, 임금 상승, 물가 인상이 꼬리를 물었다. 1952년 노사정 대타협이 이뤄졌다. 노총(LO) 소속 경제학자 두 명의 이름을 딴 '렌-메이드네르' 협약이 체결됐다. 노동을 수백 개 직무로 나누고 각 직무에 따라 보수를 책정했다. 예컨대, 용접공 임금은 자동차 대기업에 다니나 중소 부품 회사에 다니나 차이가 없게 됐다. 이른바 '동일 노동, 동일 임금'이다. 집권 사회민주당은 이 제도에 '사회연대임금'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우수 기술자들 바다 건너 서독으로━ 중소기업에선 임금이 올랐고, 대기업에선 임금이 깎였다. 어느 곳에선 인건비 비중이 줄었고, 다른 곳에선 부담이 치솟았다. 인건비 감당이 어려워진 한계 기업들이 연쇄 도산했다. 기술 경쟁력 있는 대기업엔 이득이 쌓였다. 수익성 떨어지는 기업에서 돈 잘 버는 기업 쪽으로 인력이 대거 이동했다. 자연스럽게 산업 개편이 이뤄졌다. 섬유 등의 경공업 비중이 줄고 기계·부품 등의 중공업에 무게가 실렸다. 정부가 사회연대임금 도입 때 의도했던 산업 고도화 구조조정이었다. 1970년대 초까지 볼보는 이 제도의 수혜자였다. 노동력을 저렴하게 쓸 수 있었다. 회사에 이익이 누적됐다. 그 돈으로 연구·개발을 열심히 했다. 3점식 안전벨트, '세이프티 케이지' 설계 등이 결과물이다. 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차라는 명성을 얻었다. 그런데 성장은 거기까지였다. '튼튼하기는 한데 잔 고장이 많은 차'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높은 이직률에 숙련공 부족이 고착화됐다. 보수에 불만을 품은 기술자들은 대거 독일로 갔다. 발트해만 건너면 '라인강의 기적'을 일구던 서독이었다. 볼보는 전자 제어장치 활용 등의 새 트렌드에서 밀리기 시작했다. 독일과 일본의 자동차가 시장의 강자로 급부상했다. 서독 정부는 이주 노동자에게 세제 혜택까지 줬다. ━43년 전 스웨덴이 버린 사회연대임금━ 볼보는 직원 이탈을 줄이기 위해 컨베이어벨트를 없애고 팀 제작 방식(8∼10명이 한 조로 차량을 제작)을 도입했지만 시장 경쟁에서 계속 뒤쳐졌다. 1983년 볼보는 사회연대임금 제도 탈퇴를 선언하고 급여 인상을 단행했다. 볼보에 이어 다른 기업들도 탈퇴 행렬에 들어섰다. 이로써 30여 년의 사회연대임금 역사가 끝났다. 그리하여 볼보는 다시 경쟁력을 되찾았을까? 그런 해피엔딩은 오지 않았다. 1980년대 말 트럭과 특수차량 부문을 제외한 일반 자동차 부문을 미국 포드에 매각했다. 그리고 2010년 포드는 볼보 자동차를 중국 지리(Geely) 자동차에 팔았다. 스웨덴의 다른 자동차 회사 사브(Saab)도 볼보와 비슷한 운명을 겪다가 미국 제너럴모터스(GE)에 인수됐고, 2016년에 회사가 아예 사라졌다. 독일 포르쉐의 터보엔진 기술은 독일로 간 사브 엔지니어에 의해 완성됐다. 중국에서 생산된 볼보 차에는 '메이드 인 스웨덴' 대신 '메이드 바이 스웨덴'이라는 문구가 달렸는데, 2023년 한국 세관당국은 소비자 혼동을 유발한다며 삭제를 요구했다. 오늘날 스웨덴엔 사회연대임금과 같은 평등주의적 정책의 흔적이 남아있을까? 최근 월스트리트저널의 기사를 소개한다. '스웨덴의 총 공공사회지출액은 국내총생산(GDP)의 24%로 미국과 비슷한 수준이다. (중략) 스웨덴은 이제 인구 대비 억만장자 수에서 미국을 앞질렀다. 테크 스타트업 생태계와 게임 산업 덕분이다.' 지난달 말 김영훈 고용노동부 장관이 '사회연대임금' 도입을 위한 토론회을 제안하며 스웨덴을 언급했다. 스웨덴 사람들이 놀랄 일이다.
[시대광장/박창억]화려한 지표의 어두운 그늘
이재명 정부가 곧 취임 1년을 맞는다. 이즈음 외견상 지표는 기대 이상이다. 대통령 국정 지지율은 안정적으로 60%대 중반을 유지하고 있다. 취임 1년 무렵 지지율로는 문재인 전 대통령 이후 가장 높은 수준이다. 주가는 1년 새 3배 가까이 뛰어올라 코스피는 8000을 돌파했다. 경제적 역동성에 대한 장밋빛 전망도 줄을 잇는다. 겉만 보면 바야흐로 새로운 도약의 초입에 선 듯하다. 그러나 이 화려한 지표의 이면에 드리운 그늘을 균형 있게 바라볼 필요가 있다. 현재의 증시 호황과 경기 회복세는 반도체와 AI 등 글로벌 첨단 산업의 초호황에 크게 기대고 있다. 이로 인한 K자형 양극화가 심화되면서 일부 산업·지역·계층에 혜택이 편중되고 나머지는 정체·후퇴하는 양상이다. 성과급 사태가 보여주듯 노동시장 이중구조도 악화일로다. 정부의 공급 확대 약속에도 불구하고 서울·수도권의 부동산 시장은 여전히 불안정하며, 가파른 전월세 가격 상승은 서민 경제의 짐이 되고 있다. 음영이 가장 두드러진 분야는 정치다. 원내 절대 다수를 차지한 거대 여당은 대화와 타협을 통한 협치보다는 신속한 입법 추진을 앞세운다. 야당을 대화 파트너로 보는 게 아니라 국정 발목을 잡는 걸림돌로 보는 인식이 배경에 깔려 있기 때문이다. 법 왜곡죄 도입과 재판소원제 등 거침없는 입법 드라이브는 개혁이라는 명분을 넘어 사법체계를 흔들 수 있다는 우려를 낳는다. 더불어민주당은 후유증을 지적하는 목소리에도 귀를 닫고 있다. 더구나 집권 세력은 높은 지지율에 취한 듯 대선 직전과 임기 초의 긴장감이 사라진 모습이다. 이 대통령도 자신감이 넘쳐 보이고, 발언과 행동에 거침이 없다. 공개석상에서 국제형사재판소(ICC)의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 체포영장을 언급하며 "우리도 검토해 보자"고 한 발언이 대표적이다. 외교적 후과가 우려되는 언사였다. '탱크데이' 마케팅 논란을 빚은 스타벅스 코리아를 겨냥한 전방위적 압박 역시 과유불급이다. 기업의 잘못을 바로잡는 것과 국가 권력이 전면에 나서 한 기업을 옥죄는 것은 엄연히 구분되어야 한다. 독일의 심리학자 카르스텐 C. 셰르물리는 저서 '권력 중독'에서 "권력은 사고방식과 행동양식, 감정의 결까지 아예 사람을 바꾼다"고 경고했다. 권력을 쥐는 순간 대량의 테스토스테론이 분비되고 강한 쾌감이 형성되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권력은 본질적으로 스스로를 통제하지 못한다. 지금 여당이 거침없는 이유는 이들을 견제할 강력한 야당과 시민사회의 브레이크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기 때문이다. 외부 견제가 실종된 권력은 안에서부터 곪기 마련이다. 집권 2년차가 되면 5년 임기의 한국 대통령들이 예외없이 징크스를 겪어온 것도 이같은 권력의 속성과 무관치 않다. 정권을 처음 잡았을 때의 긴장감은 풀어지고 이때쯤이면 권력 운용에 자신감이 붙으며 속도를 붙이기 시작한다. 그러다 보니 과속에 따른 혼선과 권력 남용 등 부작용이 불거지는 경우가 많다. 문제는 국민도 2년차부터는 새 정부에 대한 너그러움을 접고 구체적인 실적과 안정감을 요구한다는 점이다. 임박한 6·3 지방선거는 민심의 흐름을 읽을 수 있는 중대 가늠자가 될 것이다. 당초 일방적이라고 예상됐던 선거 판세에는 변화 조짐이 감지된다. 초반 흐름과 달리 영남·서울을 중심으로 보수표 결집으로 해석되는 여론조사 결과가 잇따른다. 그 촉발제는 여권의 공소취소 특검법안 추진이었다는 데 별 이견이 없다. 지난 1년간 거대 여당이 추진해 온 일련의 사법 개혁과 공소취소 특검법안 등에 대한 민심의 견제 심리가 작동하고 있다는 해석이 설득력을 얻는다. 일방통행식 정국 운영에 대한 경고등일 수 있다. 수시로 이 정부에게 직언을 해 온 이석연 대통령 직속 국민통합위원장은 최근 "시국과 상황을 보는 정권의 눈과 국민의 눈 사이에 괴리가 발생하면 돌이킬 수 없는 결과가 나올 수 있다"고 경고했다. 그리고는 "지금 상황이 태평성대 같지만, 이는 곧 역사가 증명할 것"이라고 일침을 놓았다. 겉으로는 태평성대처럼 보일지라도 민심의 저류는 다를 수 있다. 권력이 겸손하고 자중자애하지 않는다면 민심의 역풍은 생각보다 빨리 찾아올 것이다.
[시대광장/이상복]파이는 커졌는데 왜 사회는 더 불안해졌나
성과급 논란의 변화…돈 넘어 신뢰의 충돌초호황 역설…이해관계 사회로 진입한 한국추격국가의 한계…속도 빠르지만 숙의 부족취약한 공론장…선진국의 힘은 합의 시스템 삼성전자 노사가 총파업 직전 가까스로 성과급 합의에 도달했지만 갈등은 끝나지 않았다. 반도체와 비반도체 사업부 사이의 형평성 논란은 법적 분쟁으로 번졌고, 주주들 역시 성과급 재원과 배분 구조에 의문을 제기한다. 업종과 업황을 막론한 'N% 성과급' 요구가 확산하는 가운데 협력업체 노동자들도 자신들의 몫을 요구하고 있다. 산업·고용·소득 전반의 양극화가 심화하면서 상대적 박탈감과 불만은 또 다른 갈등의 불씨가 되고 있다. 과거 한국 사회의 갈등은 대체로 생존 문제였다. 압축성장기의 공식은 단순했다. 더 많이 투자하고, 더 빨리 생산하고, 더 크게 성장하는 것이 최우선 가치였다. 갈등이 발생해도 "일단 앞으로 가자"는 논리가 우선했다. 한국은 외환위기와 팬데믹 같은 충격 속에서도 빠르게 회복하며 위기에 강한 나라라는 성공 경험을 축적해왔다. 압축성장의 시대에는 숙의보다 속도가, 조정보다 추진력이 더 큰 미덕으로 여겨졌다.그러나 지금 한국 사회가 마주한 갈등은 이전과 성격이 다르다. 과거엔 일정 수준의 타협이 갈등 봉합으로 이어졌지만 이제는 하나의 합의가 또 다른 형평성 논란과 이해 충돌로 번진다. 이번 성과급 논란의 핵심 역시 액수 자체보다 "성과를 누가 만들었고, 어떤 기준으로 평가하며, 그 과실을 누구에게 어떻게 나눌 것인가"라는 질문에 있었다. 기업은 경영 성과와 투자 책임을 강조하고, 노동자는 기여와 보상을 내세우며, 주주는 수익의 정당한 배분을 요구한다. 파이는 커졌지만 나누는 기준에 대한 신뢰가 없다면 초호황은 오히려 갈등의 도화선이 된다. 이런 변화는 한국이 본격적인 이해관계 사회로 들어서고 있음을 보여준다. 뒤쫓아야 할 선진국이 분명했던 시대에는 속도가 곧 경쟁력이었다. 그러나 일정 수준의 성장 이후에는 양상이 달라진다. 무엇을 얼마나 더 만들 것인가보다 그것을 어떻게 나누고 조정할 것인가가 더 중요해진다. 누군가의 이익이 다른 누군가의 부담이 되는 사회에서는 성장 자체보다 갈등을 얼마나 안정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지가 국가 경쟁력을 좌우하게 된다.하지만 한국 사회는 빠른 성장에 비해 이해관계 조정 시스템을 충분히 발전시키지 못했다. 국민연금 개혁은 필요성을 알면서도 세대 간 부담을 어떻게 나눌지를 놓고 번번이 멈춰 섰다. 의료 개혁 역시 방향성에 대한 일정한 공감에도 불구하고 정부·의료계·국민 사이의 숙의 구조를 제대로 만들지 못했다. 갈등이 생기면 시간을 들여 조정하기보다 곧장 정치적 공방으로 번지는 경우가 많았다. 힘으로 밀어붙이는 방식에 의존해온 측면도 있다. 갈등을 조정해야 할 정치마저 이해관계 충돌을 증폭시키는 방향으로 작동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그래서 지금 우리에게 절실한 것은 갈등을 흡수할 수 있는 두터운 '사회적 중간지대'다. 선진국의 힘은 갈등이 적어서가 아니라 갈등을 제도 안으로 끌어들여 조정하고 완충하는 장치를 갖추고 있다는 데 있다. 독일의 공동결정제는 노동자 대표가 기업 감독이사회에 참여해 주요 의사결정 과정에 의견을 낼 수 있도록 한다. 네덜란드는 1980년대 '바세나르 협약'을 통해 임금 인상 억제와 고용 확대를 맞바꾸는 사회적 대타협을 이뤄냈다. 미국 역시 극심한 정치적 양극화 속에서도 다양한 중간 기구들이 공론장을 떠받치고 있다. 싱크탱크와 대학, 시민사회, 전문가 집단 등이 대표적이다. 핵심은 갈등 자체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거리의 충돌 이전에 오래 대화하고 조정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드는 데 있다.중간지대의 핵심 역할은 서로 다른 집단이 최소한의 공통 현실을 공유하게 만드는 데 있다. 노동과 기업, 세대와 지역, 정부와 시민이 기본적인 사실관계조차 공유하지 못하면 사회는 결국 감정과 동원의 경쟁으로 흘러간다. 숙의 민주주의의 핵심은 상대를 이기는 데 있지 않다. 서로 다른 이해관계를 인정한 상태에서도 함께 공존할 수 있는 최소한의 규칙과 신뢰를 만들어가는 과정에 가깝다.문제는 이런 중간지대에 대한 신뢰가 빠르게 약해지고 있다는 점이다. 공론장을 구성해야 할 언론과 시민사회, 전문가 집단마저 진영화 속에서 신뢰를 잃어가고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갈등을 중재해야 할 기관들까지 스스로 갈등의 당사자처럼 행동하기 시작하면 사회의 타협 능력은 급격히 약해진다. 모든 문제는 곧바로 진영 대결로 번지고, 상대는 설득의 대상이 아니라 제거해야 할 적이 된다. 따라서 한국 사회에서 건강한 중간지대와 공론장을 회복하는 일은 그 어떤 것보다 시급한 과제다.압축성장의 시대에는 속도가 국가 경쟁력이었다. 그러나 초호황과 양극화가 공존하는 사회에서는 서로 다른 이해관계를 얼마나 안정적으로 조정하고 공존시킬 수 있는지가 새로운 경쟁력이 된다. 이제 한국 사회에 필요한 것은 더 빠른 결정이 아니라 갈등을 제도 안에서 조정할 수 있는 성숙한 합의 시스템이다. 이번 삼성 성과급 논란은 한국 사회가 왜 이런 조정 능력을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단계에 들어섰는지를 보여준다.
[시대광장/정용관]'부동산 민심'보다 더 아슬아슬한 '주식 민심'
6·3 지방선거 공식 선거운동이 시작됐지만, 요즘 사람들 입에 더 자주 오르는 것은 선거 판세보다 주식 이야기다. "지금 한국은 삼전닉스를 가진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으로 나뉜다" "60대 이상에서 이재명 정부 긍정 평가가 높은 것도 결국 주가 상승 덕분 아니냐"는 말이 나온다. 어느 자리에서는 "주식은 350%쯤 오르면 인간이 못 버티고 판다더라. 그 한계를 넘으려면 오히려 더 사야 한다"는 얘기도 들렸다. 우스갯소리 같지만 최근 장세가 사람들의 심리와 일상 깊숙이 파고들고 있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국내 주식 투자자는 이미 1400만 명을 넘어섰다. 국민연금과 퇴직연금, ISA, ETF까지 감안하면 주식시장은 더 이상 일부 자산가들만의 공간이 아니다. 과거 한국 정치에서 가장 강력한 민심 변수는 부동산이었다. 집값은 소비 심리와 정권 지지율을 함께 흔들었다. 그러나 반도체와 AI 랠리 이후 한국 사회는 조금 다른 국면으로 들어가는 듯하다. 부동산 민심 못지않게 '주식 민심' 역시 체감경기와 정치 여론을 흔들기 시작하고 있는 것이다.주식시장은 철저히 '리(利)의 세계'다. 기업 가치와 주가의 등락은 곧 내 주머니 문제다. 정치권도 '개미'들의 여론을 본능적으로 감지하는 분위기다. 청와대 정책실장의 국민배당금 발언 직후 증시가 흔들리자 "개인 의견"이라며 급히 선을 긋고 수습에 나선 장면은 상징적이었다. 삼성전자 성과급 갈등이 장기화하면서 420만 소액주주 반발이 커지자 대통령이 직접 '주주들의 기업 이윤 몫'을 강조한 것도 같은 맥락으로 읽힌다.실제로 삼성전자에 이어 다른 기업 노조들의 '성과급 N%' 요구가 잇따르면서 노동의 대가와 주주의 이익이 정면 충돌하는 장면도 낯설지 않다. 과거 같으면 기업 내부의 재무 판단 정도로 지나갔을 사안이 이제는 곧바로 기업가치와 소액주주 이익 훼손 논란, 온라인 여론전으로 이어지는 경우도 적지 않다. 정치가 지지층 여론뿐 아니라 실시간 주가 반응까지 의식해야 하는 정치의 '주가 민감증' 시대에 들어선 것이다. 미국 정치는 이미 오래전부터 그런 흐름을 보여줬다. 트럼프 대통령이 다우지수를 사실상 국정 성적표처럼 활용해 온 것도 그런 배경과 무관하지 않다. 그런 점에서 이 대통령이 지난해 한미 정상회담 때 다우지수 상승 얘기를 꺼내며 트럼프를 추켜세운 것은 상대의 정치 문법을 읽은 접근으로도 볼 수 있다.문제는 그다음이다. 주식 민심은 실시간으로 움직인다. 집값은 천천히 오르내리지만 주가는 하루에도 몇 번씩 급등락한다. 오늘 정부를 지지했던 투자자가 내일 폭락장에서 가장 먼저 등을 돌릴 수도 있다. 심리에 크게 좌우되는 시장 특성까지 감안하면 정치는 자칫 조급해질 수 있다. 더구나 지금 장세는 특정 종목 쏠림이 심하고,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의 불안한 낙관론까지 번지고 있다. 정부로선 아슬아슬한 줄타기 형국이다.집권 세력에는 정책 수단이 많다. 주가지수를 안정적으로 관리하려는 노력 자체를 문제 삼을 이유는 없다. 문제는 정치가 주식 투자자의 눈치를 보거나 휘둘릴 때다. 장기 산업 전략과 구조개혁보다 당장의 지수와 시장 반응이 더 중요한 판단 변수로 작동하는 상황이다. 집값에 민감한 정치가 부동산 포퓰리즘을 낳았듯 주가에 흔들리는 정치도 주가 하락을 막기 위한 단발성 이벤트와 설익은 정책 발표, 시장 구두 개입 같은 근시안적 유혹에 빠질 수 있다.증시 부양을 주요 치적으로 삼으려는 현 정부는 어쩌면 집권 기간 내내 실시간 코스피 시세에 매달리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장기 산업 전략보다 내일 아침 코스피부터 걱정하는 정치, 전문가 집단의 진단보다 투자자의 실시간 반응에 더 민감한 정치로는 시장의 궁극적 신뢰를 얻기 어렵다.기업 가치도 오르고 주가도 오르면 물론 긍정적이다. 그 길로 가길 바란다. 노동의 정당한 보상도 중요하고 주주의 권익도 중요하다. 문제는 충돌 지점이 많다는 것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시장경제 원칙에 맞는 합당하고 지속 가능한 '배분의 룰이다. 그런 점에서 대통령이 "세금도 떼기 전 영업이익을 일정 비율로 제도적으로 나눠 갖는 것은 투자자도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삼성 노조를 비판한 것은 논리적으로 타당하다.다만 정치가 시장의 환호에 과도하게 기대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 주식 민심은 부동산 민심보다 훨씬 빠르고 예민하며, 어쩌면 훨씬 더 잔인할 수 있으니….
[시대광장/채인택]이 엄청난 반도체 수익을 미래세대에 투자한다면?
한국 경제가 도약의 기회를 맞고 있다. 갈고 닦은 제조업 기술 및 노하우에 미·중 경쟁이라는 지정학적 기회가 시너지를 내면서 비약의 날개를 달았다. 반도체 부문에서 거둔 거액의 성과는 그 일부다. 문제는 그 과실을 어떻게 다루느냐이다. 노동조합은 상당 부분이 노동자 몫이라며 성과급을 요구하고, 일부 정치인은 국가공동체의 지원을 내세우며 민간기업의 성과를 모두가 나눠 가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시장경제'에선 듣기 힘든 주장이다.이렇게 엄청난 이득을 거둔 적이 없기에 나눔에 대한 요구에는 도무지 겁이 없어 보인다. 지난 세기에 유럽의 역사를 살펴보면 교훈을 얻을 수 있다. 바로 '네덜란드병'과 '노르웨이 국부펀드'라는 대조적인 '횡재 다루기' 드라마다. 갑자기 발견된 에너지 자원으로 횡재를 하기는 두 나라 모두 마찬가지였다. 네덜란드는 1959년 북부 흐로닝언 해안지대에서 대규모 천연가스전이 발견되면서 자원수출국이 됐다. 문제는 가스로 누린 호황은 짧았고, 그 부작용은 길었다는 점이다. 자원 수출로 외화가 다량 유입되자 물가와 임금이 오르면서 인플레이션이 찾아왔다. 자국 통화 가치가 높아지면서 수입 물가는 떨어졌지만 수출 경쟁력은 추락했다. 고환율과 고물가는 제조업 기반을 뒤흔들었다. 이는 1970년대 장기 침체로 이어졌다. 미디어와 경제학에서 '네덜란드병(Dutch disease)'이나 '자원의 저주'로 부르는 현상이다. 벼랑 끝에서 네덜란드는 뼈를 깎는 혁신을 결단했다. 정부와 노사는 1983년 노사정 대타협인 '바세나르 협약'을 이뤄냈다. 노동조합은 임금 인상 요구를 자제하고, 기업은 고용 유지와 유연근무 확대를 약속하며, 정부는 세금 인하와 복지 혜택을 제공하는 게 골자다. 대타협의 결과 노동비용의 과도한 증가를 진정시켰고 수출과 경제성장률이 다시 증가세로 돌아섰으며 고용도 회복됐다. 이와 함께 네덜란드 정부는 가스 산업에 국가 경제가 쏠리지 않도록 정책적으로 연구·개발(R&D)을 강화해 다양한 첨단 산업과 제조업을 육성했다. 현재 네덜란드는 반도체 장비, 스마트 농업, 물류·운송, 화학 및 에너지, 순환 경제 등 다양한 분야에서 세계적인 경쟁력을 자랑한다. 스마트 농장을 바탕으로 농산물 수출에선 미국에 이어 세계 2위다. 첨단기술 분야에선 반도체 생산을 위한 '극자외선(EUV) 노광장비'를 사실상 독점 공급하는 세계 1위 기업 ASML이 유명하다. 이 장비는 반도체 생산에서 7nm 이하의 초미세 공정을 구현하는 데 필수적이어서 삼성전자, SK하이닉스, TSMC 등 글로벌 반도체 제조사들이 확보를 위해 경쟁을 벌일 정도다. 네덜란드병을 가져온 유럽 최대 규모의 흐로닝언 가스전은 잦은 지진 때문에 2024년 10월 영구 폐쇄했다. 자원 부국보다 인재 부국, 횡재보다 지속이 가능한 미래 개척의 중요성을 일깨워주는 사례다. 노르웨이는 네덜란드보다 늦은 1969년 12월 필립스 페트롤륨(Phillips Petroleum)사가 북해에서 에코피스크(Ekofisk) 유전을 발견하면서 주요 산유국이 됐다. 노르웨이는 네덜란드와 달리 석유와 가스라는 천연자원에서 나온 재원을 재정에 직접 투입하지 않고, 대신 공동체와 후손의 미래에 투자했다. 오일 머니를 차곡차곡 쌓아 국부펀드를 조성하고 장기 자산 운용으로 거대한 국부를 일궜다. 1990년 설립된 '정부 연금기금 글로벌(GPFG)'이라는 이름의 노르웨이 국부펀드는 단일 규모로는 세계 최대다. 자산이 2조 1170억 달러나 된다. 한국의 올해 예상 국내총생산(GDP)인 1조9310억 달러보다 많다. 노르웨이는 이 기금을 해외 주식, 채권, 부동산 등에 나눠서 투자하고 있다. 국부펀드의 목적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 국내 경제를 인플레이션과 과한 통화가치 상승으로부터 보호한다. 둘째, 투자 수익의 일부를 의료·교육 등 현재의 복지와 사회 안정을 위해 지출한다. 셋째, 오일 머니가 더 이상 나오지 않게 되더라도 미래 세대에게 교육을 비롯한 공동체 복지를 지속해서 제공할 수 있도록 국부를 보존하는 것이다. 횡재를 당대가 아닌 후대에까지 나눠 쓸 수 있도록 투자한 셈이다. 오일머니의 국부펀드 편입은 '네덜란드병'이 노르웨이에서 벌어지지 않은 비결로 꼽을 수 있다. 국부펀드는 1953년 쿠웨이트에서 시작해 현재 1조72억 달러의 자금을 운용하는 쿠웨이트 투자청(KIA)이 효시다. 주로 외화보유액이나 재정 흑자, 자원 판매수익 등 공공자산을 바탕으로 국가가 미래 세대를 위해 조성하고 운영하는 기금이다. 아랍에미리트(UAE)·사우디아라비아·카타르·인도네시아 같은 자원 부국은 한결같이 이를 운용한다. 중국처럼 외환보유고가 많은 나라나 싱가포르같이 부존자원이 없는 나라도 국가적 한계를 전략적 투자를 통해 극복하기 위해 이를 운용한다. 이처럼 네덜란드나 노르웨이에 새옹지마 같은 횡재를 안겨줬던 에너지 산업은 모두 국영기업이었다. 한국의 횡재는 모두 민간기업에서 나온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유럽 두 국가의 횡재가 에너지 자원이었다면 한국의 횡재는 기술과 교육·훈련이 축적된 제조업에서 나온다는 데서 서로 다르다. 네덜란드병을 벤치마킹해 '자원의 저주'를 미리 막을 수 있었던 노르웨이는 우리에게 영감을 준다. 필사적인 노력과 대타협으로 네덜란드병을 스스로 극복한 네덜란드도 우리 가슴에 울림을 주기는 마찬가지다. 이는 언제든지 우리에게도 닥칠 수 있는 일이다. 현재 반도체 초호황으로 엄청난 이익을 얻고 있지만 경제가 경기를 탄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언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지금 얻은 이익을 어디에 어떻게 투자하느냐에 미래 경제 안보가 걸려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초호황에 환호만 하지 말고 미래 안전을 위한 보험도 찾아볼 필요가 있다. 국부펀드 투자는 그 가운데 하나가 될 수 있다. 아울러 민간 기업의 이익이나 초과 세수의 활용 문제에선 새로운 사회적 숙의와 대타협이 필요하다. 결코 단기적인 시각이나 정치적인 유불리로 다룰 일이 아니다. 그 수입을 어떻게 다루느냐에 한국 시장경제의 미래 정체성도 달려있다.
[시대광장/이상언]노조 쇠락의 서막: 삼성 성과급 투쟁
1987년 여름 런던 도심에서 연일 은행원 시위가 열렸다. 파업을 동반했다. 준공무원으로 인식되던 은행원들이 거리로 몰려나온, 전례 없던 사태였다. 여러 요구가 있었지만 핵심은 급여 인상이었다. 컴퓨터 보급 확산으로 업무가 전산화되기 시작한 때다. 은행 직원들은 새로운 일 처리 방식을 익혀야 했다. 단순 업무가 줄면서 업무 강도가 세졌다. 은행의 '효율화'가 급속도로 진행되자 고용 안정성도 약해졌다. 영국 은행·보험·금융노조(BIFU)가 조합원들의 불만을 집단행동으로 조직했다. 이제 더 이상 단순 사무직이 아니니 전문직 수준의 소득을 보장하라고 외쳤다. 노조 승리로 싸움이 끝났다. 급여가 평균 9% 인상됐다. 그때부터 바클레이즈·로이즈 등 영국 은행들이 지점·부서·개인에 대한 업무 평가를 시작했다. 일반 사무직이 아니고 전문직이라고 했으므로, 성과에 대한 엄정한 평가가 당연하다는 것이 은행 이사회 논리였다. 급여가 점차 '개별화' 됐다. 전통적인 연공+직급제가 허물어졌다. 노조 협상이 내 연봉에 미치는 영향이 확연히 줄었다. 노조 활동은 윗사람 눈치 보면서까지 할 일은 아닌 게 됐다.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자' 주의가 늘었다. 급여에서 매달 나가는 조합비가 아깝다는 생각이 커졌다. 80% 수준이던 영국의 은행·보험 노조 가입률은 현재 12%(영국 정부 통계)다. 삼성전자 성과급 갈등을 계기로 한국 국민 다수가 의문을 품었다. 해외의 삼성전자 비슷한 기업에서는 초호황 대박이 났을 때 성과급을 어떻게 주나? 영업 이익의 15% 정도를 직원들에게 골고루 나눠주는 곳이 있나? 성과급 때문에 노조가 파업으로 회사를 압박하는 곳이 있나? 이런 질문들이 던져졌다. 언론이 삼성전자 경쟁사를 포함한 글로벌 빅테크를 살펴 보도했다. TSMC·엔비디아·구글·마이크로소프트 등이 대상이다. 결과는 이렇다. 성과급의 상당 부분을 주식으로 준다. 통상 4년 정도의 매도 금지 기간을 정해서. 성과급은 급여 계약 때 조건과 계산 방식이 약속된다. 회사가 계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하지 않는 한 노조가 개입할 게 없다. 성과 평가는 조직과 개인으로 개별화 돼 있다. 이때의 조직은 팀 정도의 규모다. 전체 회사 수익에서 성과급이 차지하는 비율은 회사에 따라 다르다. 15%가 넘을 수도 있다. 그리하여 한국인들은 하이닉스와 삼성전자의 성과급 지급 방식이 글로벌 표준과 거리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회사의 성공은 벡터(힘의 방향+크기)의 합에 달려 있으며, 인재의 밀도가 그 합을 결정하고, 결국 '하드코어'가 핵심이다." 일론 머스크의 말이다. 여기에서 하드코어는 특별한 성과를 내는 임직원을 일컫는다. 팔란티어를 만든 알렉스 카프는 회사의 핵심 인재를 아티스트, 일탈자(deviant), 선교사로 칭한다. 스티브 잡스는 혁신을 일궈내는 내부자를 A플레이어로 불렀다. 구글의 검색 엔진 개척자 앨런 유스터스는 "최고 수준 엔지니어의 가치는 평균적 기술자의 300배"라고 주장했다. 빌 게이츠는 "출중한 소프트웨어 개발자는 평균적인 개발자에 비해 1만 배의 가치가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글로벌 빅테크에는 전 직원이 비슷하게 나누는 성과급 제도가 없다. 창업자들 생각에 그 까닭의 답이 있다. 지난달 29일 전국삼성전자노동조합이 서울 한남동 이재용 삼성 회장 집 옆에 천막을 쳤다. 앞에 이런 문구가 걸렸다. '우리가 천막을 친 이유는 단 하나, 내 옆의 동료가 떠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입니다.' 성과급이, 결과적으로 총 급여가 불만스러워 직원이 다른 회사로 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투쟁에 나섰다는 뜻이다. 정말일까? 그렇다면 능력이 월등한 반도체 엔지니어가 대만·일본·미국, 나아가 중국으로 가는 것을 일률적인 보너스로 막을 수 있을까? '공정한 보상'의 저자 신재용 서울대 경영학과 교수는 전화 통화에서 "현재 삼성전자 부장급 미만 직원의 성과급은 개별적으로 별 차이가 없다. 이 틀을 그대로 유지하면 국제 인재 쟁탈전에서 이기기 어렵다"고 말했다. 삼성전자와 하이닉스는 외국 반도체 회사와 경쟁한다. 초격차 기술력에 초격차 인재 대우는 필수적이다. 지금의 성과 배분 갈등은 결국 새로운 제도로 귀결될 것이다. 기존의 골고루 나누기가 존속되기 힘들다. 그때 노조가 '내 옆의 동료가 떠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는 오늘의 주장을 잊지 않기 바란다. 그냥 동료가 아니라 우수한, 뛰어난 동료가 짐을 싸면 더 큰 문제 아닌가?
[시대광장/이상복]'누가 쐈나'보다 '누가 꾸몄나'를 묻는 사회
지난달 백악관 기자단 만찬장에서 대통령을 노린 총격 소식이 전해진 직후, 미국 사회를 뒤흔든 것은 총성만이 아니었다. 구체적 상황이 확인되기도 전에 소셜미디어에는 연출설이 번졌고, 총성의 진위보다 배후와 각본을 따지는 주장이 쏟아졌다. 현장 영상이 공개된 뒤에도 의혹은 잦아들지 않았다. 사건 하루도 안돼 엑스(옛 트위터)에만 '조작된(staged)'이란 단어가 포함된 게시물이 30만건 이상 올라왔다. 우리는 이미 보고도 믿지 못하는 환경에 익숙해졌다.과거 정치인 피격은 초당적 규탄과 진상 규명의 문제였다. 지금은 질문의 순서가 바뀌었다. 사람들은 먼저 '누가 꾸몄나'를 묻는다. 눈앞의 장면보다 자신이 속한 진영의 서사가 먼저 작동하고, 파편적 단서들은 빠르게 엮여 그럴듯한 이야기로 굳어진다. 물론 경호의 허점이나 초기 혼선이 의심을 키웠다는 지적은 가능하다. 그러나 정치적 사건에서 정보가 엇갈리고 수정되는 일은 새롭지 않다. 달라진 것은 사건이 아니라 소비 방식이다. 이제 많은 사람들이 사실을 확인한 뒤 결론을 내리지 않는다. 오히려 결론을 먼저 정하고 그에 맞는 장면과 문장만 골라 취한다. 이 같은 패턴은 미국 정치에서 반복돼 왔다. 2024년 대선 유세 총격 사건 당시에는 반트럼프 진영의 조작설과, 트럼프 지지층의 배후설이 동시에 확산됐다. 트럼프 역시 2020년 대선 이후 부정선거 주장을 반복하며 불신의 언어를 정치적으로 활용해 온 인물이다. 그런 그가 이번에는 자작극 의혹의 중심에 섰다. 음모론은 특정 진영의 무기가 아니라, 결국 모두에게 되돌아오는 부메랑임을 보여준다.이 배경에는 플랫폼 알고리즘과 정보 생태계의 변화가 있다. 이용자의 체류 시간과 반응을 극대화하는 구조는 자극적이고 단정적인 콘텐츠를 우선 노출한다. 그 결과 사람들은 자신이 믿고 싶은 이야기를 반복적으로 접하고, 정보의 공백은 편집된 영상과 확신에 찬 문장으로 채워진다. 이 과정에서 상대 진영은 점점 더 악의적이고 위협적인 집단으로 재구성된다.한국이라고 다르지 않다. 총기 사건의 양상은 같지 않지만, 사건을 음모론적 서사로 소비하는 방식은 놀라울 만큼 닮아 있다. 선거 때마다 반복되는 부정선거 주장, 대형 참사 뒤에 어김없이 등장하는 배후설은 이제 익숙한 풍경이다. 유튜브와 폐쇄형 메신저를 통해 유통되는 자극적 정보는 공적 제도와 사회적 신뢰를 서서히 잠식해 왔다. 분노와 의심을 자극하는 콘텐츠가 수익 구조와 결합하면서, 확증 편향은 하나의 시장처럼 작동하고 있다.주목할 것은 이런 현상이 단지 개인의 성향 문제가 아니라는 점이다. 최근 연구들은 어떤 미디어를 주된 정보원으로 소비하느냐가 음모론 수용 정도에 유의미한 차이를 만든다고 지적한다. 『한국방송학보』 3월호에 게재된 정낙원 교수(서울여대) 등의 연구에 따르면, 정치 유튜브 이용 빈도가 높을수록 부정선거 음모론에 대한 신뢰도가 유의미하게 상승했다. 반면, 보수와 진보를 막론하고 기성 언론을 주된 정보원으로 이용하는 집단에서는 음모론 신뢰도가 뚜렷하게 낮게 나타났다. 전통 매체가 완벽해서가 아니다. 다만 팩트체크와 교차 검증, 반론권 보장 등 저널리즘의 형식과 절차가 독성 정보의 확산을 늦추는 완충 장치로 기능하고 있다는 뜻이다. 논문에선 자신의 정치 성향과 다른 매체에 노출될수록 정치적 관용도가 높아지고, 상대 집단에 대한 위협 인식 역시 낮아지는 경향도 확인됐다.이는 우리에게 분명한 시사점을 던진다. 탈진실의 시대에 음모론의 범람을 막는 것은 개인의 도덕적 각성만으로는 불가능하며, 어떤 미디어 환경을 구축하고 소비할 것인가의 구조적 문제라는 것이다.그래서 지금 필요한 것은 더 빠른 의심이 아니라 더 느린 확인이다. 정치권은 근거 없이 불신을 동원하는 언어를 자제해야 하고, 언론은 속보 경쟁보다 검증과 맥락 제공이라는 본령으로 돌아가야 한다. 게이트키핑은 낡은 권위가 아니라, 사실과 추측을 구분하기 위한 최소한의 사회적 장치다. 특히 정치적으로 중립을 지키며 다양한 시각을 전달하는 매체가 공론장의 역할을 회복할 때, 음모론의 위협을 줄일 수 있다.총성은 한순간이지만, 그 뒤를 덮는 의심의 언어는 오래 남는다. 시민들이 사실보다 각본을 먼저 찾는 사회에서 진실은 설 자리를 잃는다. 지금 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은 '누가 꾸몄나'가 아니라, 왜 우리는 그 질문부터 하게 되었는가다.
[시대광장/정용관]"공소 취소 원치 않는다"…그런 당당함 볼 수 있다면
이른바 '조작기소' 국회 국정조사특위가 곧 활동을 끝낸다. "검찰이 정적 제거에 부역했다" "연어 술 파티가 있었느냐" 등 여야의 반응과 평가는 극명하게 엇갈린다. 일반 국민으로선 진실이 무엇인지 더 헷갈릴 지경이다. 이쯤에서 남는 질문은 하나다. 권력은 자기 문제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이재명 대통령은 최근 특별감찰관 임명 절차를 밟아달라며 "모든 권력은 제도적 감시를 받아야 한다"고 했다. 당연한 말이다. 권력은 의지로 통제되지 않는다. 제도로만 통제된다. 그것이 법치와 공화주의의 출발점이다. 10년째 공석인 특별감찰관은 임명하면 된다. 그건 앞으로의 일이다. 여야 몫을 따질 사안도 아니다. 대통령 가족과 측근을 감시하는 자리라면, 차라리 변협 등 외부 추천을 통해 정치적 중립성을 확보하는 편이 낫다.문제의 핵심은 따로 있다. 민주당은 "특검을 통한 정치검찰 응징"을 벼르고 있다. 이를 통해 대통령 관련 사건들에 대한 '공소 취소' 수순을 밟을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이 문제는 예민하다. 정치 공방을 넘어 형사사법 시스템에 대한 신뢰, 견제와 균형이라는 통치 원리의 근본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여권 일각에서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을 기소했던 미국 특별검사 사례를 들며 공소 취소 법리를 검토해 왔다. 그러나 단순 비교는 성립하기 어렵다. 미국에선 '추후 재기소 가능'을 전제로 법원의 승인을 받는다. 법원 통제라는 장치가 전제돼 있다. 반면 우리의 공소 취소는 담당 검사의 판단으로 사실상 사건을 끝내는 효과를 갖는다. 이를 그대로 끌어오는 것은 설득력이 약하다.이 대통령을 수사한 검사들이 스스로 공소 취소를 할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다. 그래서 거론되는 방식이 특검을 통한 공소 취소다. 특검은 국회 입법 사안이지만 결국 대통령이 임명한다. 만약 특검을 통한 공소 취소가 실제로 추진된다면, 이는 살아 있는 권력의 '자기 면책'으로 비칠 공산이 크다. 설령 내용적으로 당위성이 인정되고 형식적으로 적법하다 해도, 그런 의심을 지우기 어렵다. 그런 적이 한번도 없기 때문이다. 대선 후보 시절에도, 대통령이 된 뒤에도 사법 문제는 누구도 쉽게 입에 올리지 못하는 의제라고 한다. 금기의 영역이라는 것이다. 이 대통령 스스로 "증거 조작, 사건 조작은 일반 범죄자가 저지르는 강도나 납치·살인보다 더 나쁜 짓"이라고 했다. 최근엔 2022년 대선 당시 언론 보도를 문제 삼기도 했다.필자 주변에는 대통령이 그런 정도까지 얘기할 정도라면 "정말 억울한 것 같다"고 말하는 보수 인사들도 있다. 집권 내내 자신의 머리 한쪽을 짓누를 '악성 혹'을 떼어내려는 여론 빌드업 과정이라는 비판도 있다. 답답한 심정에 진실을 명확히 가를 제3의 권위를 기대하는 목소리도 나오지만, 그 역할을 해 줄 주체가 현실에 없다는 게 문제다.이 대통령은 여전히 공소 취소 자체에 대해선 '침묵'하고 있다. 최고 권력자의 침묵은 암묵적 메시지로 읽힌다. 대통령도 국민의 한 사람이고 인권을 보호받아야 한다는 주장도 일리가 없지 않다. 그러나 이 문제는 개인의 억울함 차원을 넘어선다. 선례를 남길 수 있기 때문이다.한 가지 상상을 해본다. "조작 기소의 실체를 확인했다"는 것이 민주당의 자체 평가라면, 오히려 지금이 기회일 수 있다. 국정조사 특위 종료 시점에 맞춰 단 한 줄의 메시지를 내는 것이다. "내 문제는 우리 형사사법 시스템의 절차와 판단에 맡기겠다. 특검을 통한 공소 취소는 원치 않는다." 권력이 스스로 '정도'를 선언하는 것이다. 쉽지 않은 선택인 줄 안다. 트럼프 대통령도 자신을 수사한 특검을 해고하고 정치적으로 압박하고 있다.다만 이런 기대를 하는 것이 필자 스스로 어떤 예단을 하고 있기 때문은 아니다. 사법 논란의 실체를 둘러싼 공방은 끝이 없다. 여론도 정치 성향에 따라 뒤죽박죽이다. 그럴수록 최고 권력자는 '제도의 영속성'을 최우선 가치로 삼아야 한다. 설령 억울함이 크다 해도, 여기서 멈추는 것이 더 지혜로운 선택일 수 있다. 자기 문제는 퇴임 후 우리의 일상적인 법과 제도의 판단을 받겠다는, 그런 당당하고 의연한 '권력의 태도'를 보일 때 국정도 더 안정적으로 작동할 수 있다.법(法)과 술(術)을 어떻게 적절히 운용하느냐에 따라 권력의 운명이 갈리곤 한다. 사법 시스템과 정치 기술 중 무엇을 앞세울 것인가. 어쩌면 지금이 바로 그 갈림길인지 모른다.
[시대광장/이상언]'제왕 오너' 없애자면서 "회장 통 큰 결단" 요구하는 모순
회장 집 앞 시위는 한국 영화와 드라마의 상투적 장면(클리셰)이다. "갑시다"라는 엑스트라 배우의 대사, 붉은 머리띠, 커다란 글씨의 피켓이 의례적으로 등장한다. 대체로 불행한 폭력 사태로 귀결되는데, 종종 '재벌집 막내아들' 진도준이나 '눈물의 여왕' 홍해인처럼 선량한 회장 가족의 온정적 도움으로 아름다운 결말을 맺기도 한다. 하지만 현실은 드라마처럼 단순하지 않다. 그렇게 쉽게 끝날 일이었으면 진작 해결됐을 것이다. 삼성전자 노조가 이재용 회장 집 앞 집회를 예고했다. 자신들이 요구하는 수준으로 성과급을 맞춰주지 않으면 서울 한남동에서 골목 기자회견을 열겠다고 한다. "이 회장이 결심하라"는 압박이다. 한국의 양대 노동조합과 노동운동 단체는 지난 30여 년 동안 '제왕적 리더십' 해체를 요구해왔다. "기업 오너 한 마디에 모든 게 좌우되는 전근대적 경영에서 벗어나자"고 했다. 투명한 시스템 경영, 민주적 경영의 필요성을 주창해왔다. 노조뿐 아니라 사회 전반이 그 방향을 지지했고, 실질적 진전이 있었다. 오너가 아닌 이사회의 경영, 주주 이해 우선 제도가 하나둘 만들어졌다. '황제 회장' 폐지를 주장해온 노조가 '오너가 결단하라'고 압박하는 것은 자기모순이다. 제왕적 대통령의 문제를 말하면서 대통령이 총리와 장관, 나아가 실무자가 할 일에까지 직접 나서길 바라는 것과 다르지 않다. 대통령이 그래서는 안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대주주가 회사의 공식 기구를 뛰어넘는 결정을 하는 것도 옳지 않다. 구시대적 운영이다. 우리 사회는 '회장 집 앞 시위'에 관대하다. 법에 정해진 기준을 벗어나도 공권력이 제지하는 경우는 드물다. 지난 한 세대 간 집회·시위 보장이 우선적 가치로 여겨졌다. 절박한 호소를 위한 최후 수단이라는 사회적 공감대가 바탕이 됐다. 비참하게 해고됐는데 법적 절차로 구제되지 못했을 때, 그 누구도 억울한 사정을 귀담아 들어주지 않는다고 생각될 때 회장 집 앞으로 갔다. 다소 물의가 빚어져도 사회가 용인했다. 언론도 대체로 대문 밖 사람 편에 섰다. 삼성전자의 성과급 갈등은 이런 일과 궤를 함께 하지 않는다. 긴급하고 억울한 사정의 사안이라고 보기가 어렵다. 임금 체불, 무단 해고와 같은 생존권의 문제가 아니다. 이재용 회장이 두문불출로 직원들을 피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정상적으로 출퇴근 하고 있다. 노조의 항의가 불가피하면 사업장에서 하면 된다. 이런 일로 집 앞 시위를 벌이면 정작 필요한 사람들이 할 때마저 행패로 간주되며 외면당한다. 정말 최후의 수단만 남은 이들을 더욱 궁지로 모는 '절박함 가로채기'라고 볼 수 있다. 최근 법원은 기업 경영진 자택 앞 시위를 제한해왔다. 집회 금지 가처분 신청에서 인용 판결이 잇따랐다. 판사들이 '그곳에서 그렇게 할 필요'에 동의하지 않는다. 법률 용어로 '상당성 부족'이다. 노조의 '망신 주기'에 불과한 행위에 가족이나 주민까지 애꿎은 피해를 입는다는 게 법원의 판단이다. 사적 영역에 대한 존중, 생활권 보장이 어느덧 사회적 상식으로 자리 잡았다. 그런데도 노조는 마치 정해진 수순을 밟는 것처럼 집 앞으로 몰려가 장송곡이나 상여 소리, 운동 가요가 주택가에 울려퍼지도록 한다. 노조원들은 경찰의 제지나 법원 결정 무시에 따른 처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소음 기준 위반은 수십만원의 과태료나 벌금에 그친다. 그 돈은 노조의 투쟁기금에서 조달되고, 노조 간부의 전과는 훈장이 된다. 열일하는 선명한 노조의 상징이다. 업무방해 고소 등으로 사태가 번지기도 하지만 결국 회사는 취소나 처벌 불원서 제출로 끝을 맺는다. 삼성전자 노조가 회장 집 앞 집회에서 요구하겠다는 것은 노동 가치 인정이 아니라 제왕의 결단이다. 평소에는 "독단 경영을 멈추라"고 말하더니 지금은 그 권능을 발휘해 "통 큰 결단을 하라"고 압박한다. 이런 직 거래 요구는 정당한 노조 활동의 선을 넘은, 정상적 경영에 대한 위협이자 시스템 부정이다. 투쟁이 성공하면 실무자들이 허수아비가 되고, 주요 노사 이슈가 오너의 마음에 종속된다. 기업 거버넌스 퇴보가 아닐 수 없다. 세계 산업을 이끄는 한국의 1등 기업 노조에 걸맞지 않은 부끄러운 일이다.
[시대광장/채인택]김정은, 왜 '인공지능' '드론' 강조하나
4년을 훌쩍 넘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한반도에 '나비효과'를 일으키고 있다. 별 관계 없어 보였던 사건이 시간이 지나면서 거대한 파장으로 다가오고 있다. 2024년 10월 쿠르스크 전선에 파견됐던 북한군 약 1만2000명이 회오리의 매개다. 영국 왕립합동 군사연구소(RUSI)는 최근 발행한 보고서에서 "파병 북한군이 전장에서 현대전에 필요한 전술을 경험했으며, 북한은 이를 바탕으로 군사 장비와 교리의 현대화를 추진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재래식 전력 경쟁에서 밀려 핵이라는 비대칭에 올인하다시피 했던 북한군이 러시아 파병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현대 군사력 몸만들기'에 열을 올리고 있는 셈이다. 북한군 전력 현대화는 우리에게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협'이 될 수밖에 없다. 그 동력은 북·러 밀착이다. 25일 러시아의 뱌체슬라프 블로딘 국가두마(하원) 의장과 안드레이 벨로우소프 국방부 장관이 이례적으로 나란히 평양을 찾았다. 방문목적 두 가지가 모두 심상치 않다. 하나는 26일 북·러 군대의 이른바 '쿠르스크 재점령 1주년'을 맞아 평양에 세운 '해외 군사작전 영웅 기념단지 겸 군사 영웅 전투 위훈 기념관' 준공식 참석이다. 러시아에 파병됐다 숨진 북한 군인에 대한 추모시설이다. 또 다른 목적은 북·러 간 '2027~2031년 중장기 군사협력 계획 체결'이다. 5개년 군사협력 추진은 2024년 6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방북 당시 체결된 '포괄적인 전략적 동반자 관계에 관한 조약'의 실천이라는 점에서 예사롭지 않아 보인다. 북·러 관계를 실질적인 군사동맹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안보·방산 협력 계획이다. 공개 정보를 바탕으로 양측의 안보·방산 협력 내용을 살펴보면 놀라울 정도다. 전략국제연구소(CSIS) 산하 북한 전문 사이트 '분단을 넘어(Beyond Parallel)'는 2025년 4월 "평안북도 구성시의 방현 공군기지에 폭 40m의 새로운 무인기 격납고 7개가 완공된" 사진을 공개했다. 북한이 신규 무인기 부대를 창설해 자체 생산한 '샛별-4형'과 '샛별-9형' 무인기를 실전 배치한 증거다. 38노스는 지난해 9월 북한이 러시아의 지원을 받아 샤헤드/게란급 무인자폭기를 생산하고 있다고 전했다. 이 자폭기는 이란의 샤헤드-136 드론을 바탕으로 러시아에서 생산한 게란-2 드론을 가리킨다. 샤헤드-136은 이란 전쟁에서 미국과 이스라엘, 그리고 걸프 연안국가를 무차별 공격했던 바로 그 기종이다. 견디다 못한 미국이 지난 3월 초 우크라이나에 탐지와 요격 기술을 요청했을 정도로 파상공세를 벌인 저가 자폭 드론이다. 4년 이상 러시아의 공세에 대항해온 우크라이나는 저가형 요격 드론과 스카이맵으로 불리는 드론대응 방공망 지휘통제 플랫폼을 개발했다. 한발 60억원대의 미국산 패트리엇 미사일을 수천만원 수준의 스팅-2나 P1-선 등 자국산 '드론 잡는 요격 드론'으로 대체했다. 스카이맵은 1만여 개의 음향 감지기와 AI를 결합한 탐지·요격 체계로, 드론 특유의 소리와 진동을 감지해 잡아낸다. 이 과정에서 북한에 군사용으로 전용이 가능한 AI 등 각종 첨단기술이 자연스럽게 흘러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북한은 러시아의 지원으로 현재 AI기반 표적설정, 자율의사결정 알고리즘, 상대방 드론에 대한 재밍(신호차단)과 스푸핑(가짜신호를 통한 위치기만), 그리고 포획술 등 다양한 첨단 군사기술 개발에 나서고 있다. 모두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침공에서 사용했던 전술적 경험이 바탕이다. 이런 북·러 밀착을 살펴보면 최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인공지능' '드론' 등 새로운 기술과 무기체계와 관련 용어를 자연스럽게 입에 올리는 배경을 짐작할 수 있다. 러시아 파병으로 얻은 게 있다는 신호다. 김 위원장은 지난해 9월 군에 "무인무장장비 체계들의 인공지능 및 작전능력 고도화"를 최우선 과제로 삼으라고 지시했다. 드론 격납고 7개를 설치한 방현 공군기지에서 벌어진 금성을 비롯한 자폭형 무인기 시험을 참관하면서다. 지난 2월 제9차 당대회에서는 인공지능, 대(對)위성 무기, 전자전 시스템 등을 '특수전략자산'이라고 지칭했다. 북한이 이처럼 AI 자폭 드론 등 첨단 기술을 적용한 특수전략자산을 대규모로 운용할 경우 우리 수도권이 가장 먼저 위협을 받게 된다. RUSI 보고서에서 가장 께름칙한 부분도 이와 연관이 있다. 보고서에 따르면 북한은 러시아로부터 새로운 전쟁 방식을 흡수한 덕분에 포격 목표물 정보수집부터 사격까지 걸리는 시간을 과거 몇 시간에서 몇 분으로 단축했다고 한다. 정찰 드론 정보를 포병 및 다연장 로켓의 사격 통제 시스템에 직접 통합한 결과다. 러시아의 대북 지원은 2000만 명 이상이 거주하는 우리 수도권의 안보에 대한 실질적인 위협으로 떠오르고 있다. 그동안 한국에선 우크라이나 전쟁은 먼 곳에서 벌어지는 남의 일로, 이란 전쟁은 원유·원자재 등 경제적 측면만 봐온 게 사실이다. 하지만 이젠 이로 인한 실질적인 안보 위협을 직시해야 한다. 북한이 AI와 드론 등 첨단기술을 확보했다는 사실을 바탕으로 전면 남침 시 반격 작전이나, 공격징후가 보일 때 선제타격, 또는 핵무기 제거 특수작전 등 대한민국과 국민을 지킬 작전계획 등을 손볼 필요가 있다. 북한이 러시아 급 군사기술 강국으로 진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북한의 진화한 드론은 턱밑에서 우리 목을 겨눈 비수나 다름없다. 군사적 대응 계획은 물론 러시아나 이란과 관련한 외교 및 국제협력의 틀도 새로 짤 수밖에 없다. 평화적으로 공존하려면 군사력과 외교력이 모두 필요하다.
[시대광장/이상언]우리도 애쉬 카터가 필요하다
"도대체 어디에 얘기를 해야 하는 지 알 수 없었죠. 너무, 너무, 답답했어요. 지금도 그렇고요." ㈜인텔리빅스의 최은수 대표가 말했다. 사연은 이렇다. 이 회사는 업력 26년의 '관제 시스템' 설치 회사다. CCTV를 진화시키는 데 노력해왔다. 카메라 영상 속의 '이상 현상'을 인공지능(AI)이 인식해 관제 시스템에 경고 메시지를 띄우는 기술을 개발했다. 산업 현장과 주요 시설물의 위험을 CCTV로 파악해 관리자에게 바로 알려준다. 그리고 수년 전에 폭설, 폭우, 짙은 안개 속에서도 200m 이내의 사물을 식별해 영상으로 표출하는 기술을 확보했다. 이 업체는 이런 기술이 국방에 도움이 되겠다고 판단했다. 악천후에도 특이 징후를 포착하는 전방과 해안의 감시 장비로 활용되면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2년 전부터 국방부와 방위사업청 문을 두드렸다. 그런데 아직도 문 턱 주변에 있다. "어렵사리 군수 관계자를 만나 설명했더니 군 품목 분류 체계 때문에 일반 CCTV만 조달 가능하고 우리 것 같은 특수 장비는 항목 자체가 없다고 했어요." 최 대표 말이다. "기술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니 벽을 보고 말하는 것 같았죠." 이 회사는 '방산혁신기업 100'이라는 제도가 있음을 알게 됐다. 방위사업청이 2022년부터 올해까지 한 해 20개씩 총 100개의 방산 분야 혁신 기업을 선정해 지원하는 사업이다. 2024년에 여기에 지원했다. 온갖 서류를 갖춰서. 그러나 탈락했다. 그리고 지난해 재수를 해 성공했다. 인텔리빅스는 지난해 가을 '서울 국제 우주항공 및 방위산업 전시회(ADEX)'에 참여했다. 이재명 대통령이 이 회사 부스에 방문해 설명을 듣는 모습이 언론에 보도됐다. 이 대통령은 이날 "민간 기술을 군에 접목해 첨단산업을 이끄는 촉매로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인텔리빅스의 AI 카메라가 국군에 쓰일 지는 여전히 알 수 없다. 최 대표에 따르면 '방산혁신기업 100'에 선정된 뒤 군에서 수개월째 성능 테스트 중이다. 시험을 통과해도 갈 길이 멀다. 까다로운 군납 절차가 기다리고 있다. 군 예산 확보도 필요하다. 부지하세월이다. 민간에는 AI 카메라가 장착된 사족보행 로봇이 순찰을 도는 곳이 있다. 세상과 군의 기술 적응 속도 차가 크다. 최 대표는 지난해 10월 국회의 한 토론회에서 시대에 뒤떨어진 한국 군 획득 시스템의 현실을 생생하게 증언했다. 2000년대 중반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 급조폭발물(IED)에 의한 미군 사망자가 급증했다. 군용 차량 아래에서 IED가 터지는 사건이 속출했다. 당시 미 국방부 군수 담당 차관이었던 애쉬 카터는 험비의 하부에 V자(충격 분산용) 형태의 장갑을 부착하면 피해를 줄일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예일대와 옥스퍼드대에서 물리학을 공부한 그는 방법을 찾다가 이미 그런 구조의 차량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지뢰 제거 작업에 쓰인 것이었다. 카터는 그 차량을 만든 회사가 곧바로 미군에 납품할 수 있도록 국방부 장관(로버트 게이츠)에게 '긴급 조달' 명령을 내려달라고 했다. '관료주의적 절차가 장병들의 생명보다 중요할 수 없었다.' 카터의 회고록에 이렇게 적혀 있다. 그때로부터 약 1년 뒤 '쿠거'라는 이름의 지뢰방호장갑차(MRAP)가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의 미군에 공수되기 시작했다. 그 뒤 5년간 약 2만7000대가 보급됐다. 2022년 애쉬 카터가 62세에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을 때 뉴욕타임스는 MRAP 보급에 대해 '미군 역사상 가장 획기적인 조달이었다'고 평가했다. 미국 언론들이 "미군 수천 명을 살린 영웅"이라고 그를 기렸다. 오바마 행정부 시절인 2015년에 미국 국방부 장관으로 임명된 카터는 곧바로 실리콘밸리 인근의 스탠퍼드대로 갔다. 연설에서 '국방혁신실험단(DIUx)' 창설을 선언했다. 스타트업 신기술 탐색과 지원이 이 조직의 임무라고 말했다. DIUx 사무실을 아예 실리콘밸리에 뒀다. 이 조직의 첫 작품이 '공중급유 앱' 제작이었다. 수작업이 소프트웨어로 대체되면서 급유 계획이 정밀해졌다. 한 해 수천억원의 비용이 절감됐다. 스타트업과 계약을 맺어 북한의 KN-08 탄도미사일 이동식 발사대를 실시간으로 감시할 수 있는 위성 정찰 시스템도 마련했다. 초기 2년에만 약 50개의 민간 기술 활용 프로젝트가 진행됐다. 이 과정은 최근 출간된 책 '실리콘밸리와 펜타곤의 비밀 전략실 유닛X'에 자세히 기록돼 있다. 개혁가 카터는 "세상은 빛의 속도로 변한다. 국방부가 서류의 속도에 갇혀 있을 수 없다"고 말했다. 동행미디어 시대가 주최한 '새로운 전쟁의 시대, K방산의 현재와 미래' 포럼이 지난 16일 열렸다. 방산 전문가들이 이구동성으로 한국 군 획득 시스템 개혁을 주문했다. 맥아더 장군은 전쟁에서 지는 이유를 단 두 단어로 요약했다. '너무 늦었다(Too late)!' 우리에겐 청의 기마술과 왜의 조총 같은 신기술에 강토를 유린당한 역사가 있다. 류성룡은 징비록에 '미리 준비하지 못한 죄가 산더미'라고 썼다. 지금 우리는 애쉬 카터처럼 틀을 깨는 혁신 리더가 몹시 필요하다.
[시대광장/이상복]'가짜뉴스', 정말 막고 싶다면…
대통령과 정부, 경찰의 가짜뉴스 소탕전 확대 가짜뉴스는 '사람'보다 '구조'를 바꿔야 막는다정파적 미디어 환경과 왜곡된 수익 모델이 토양 권력이 직접 '진실의 심판자' 역할 맡는 건 위험 이재명 대통령은 최근 SNS에 이스라엘군이 팔레스타인 아동을 고문한 뒤 지붕에서 떨어뜨렸다고 주장하는 영상을 공유했다. 그러나 영상의 촬영 시점과 전후 맥락은 충분히 확인되지 않은 상태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해당 내용의 일부가 왜곡됐고 시점도 최근이 아닌 2024년 9월이라는 점이 드러났다. 당시 대통령은 "사실이라면"이란 단서를 달긴 했지만, 사안의 중대성에 비해 검증이 부족했다는 논란이 제기됐다. 누구라도 불완전한 정보를 믿고 확산할 수 있는 환경 속에 우리는 놓여 있다.최근 정부는 이른바 가짜뉴스와의 전쟁을 선포하며 단속을 강화하고 있다. 대통령은 중동 전쟁과 관련한 허위 정보를 "내란 행위"라고 질타했고, 경찰은 곧바로 전담 조직을 꾸렸다. 행정안전부 역시 가짜뉴스 유포를 '반란행위'에 준하는 것으로 규정하며 강경 대응 방침을 밝혔다. 방송미디어통신위원회 산하에 가칭 '투명성센터'를 설립하는 방안도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팩트체크 지원과 허위정보 대응을 강화하겠다는 취지다. 가짜뉴스를 줄여야 한다는 데에는 이견이 거의 없다. 문제는 이런 대응 방식이 낯설지 않다는 점이다. 역대 정부마다 대통령이 가짜뉴스를 언급하면 어김없이 전쟁이 선포됐다. 조직이 만들어지고, 수사가 뒤따르고, 처벌이 강조됐다. 윤석열 정부 시절에는 방송통신위원회 산하에 가짜뉴스 대응센터가 생겼고, 언론 관련 기관에는 신고 창구가 마련됐다. 문재인 정부에서도 가짜뉴스 종합대책 문건이 작성되고 대응 방안이 추진됐다. 그 사이 가짜뉴스는 줄어들었을까. 오히려 더 정교해졌고, 더 빠르게 퍼졌으며, 더 많은 사람들에게 소비되고 있다. 정부의 의지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접근 방식이 본질을 비껴갔기 때문이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무엇이 가짜뉴스이고 무엇이 진실인지 그 기준마저 요동쳤다. 지금까지의 대응은 대체로 '누가 만들었는가'를 찾아내는 데 집중돼 왔다. 그러나 가짜뉴스는 개인의 일탈을 넘어, 그런 콘텐츠가 끊임없이 생산되도록 만드는 환경 속에서 자란다. 자극적이고 분노를 유발할수록 더 많이 소비되고, 그 소비는 조회수와 수익으로 이어진다. 사실 여부보다 감정의 강도가 주목도를 결정하는 환경에서 가짜뉴스는 오히려 경쟁력 있는 콘텐츠가 된다.이 구조는 플랫폼 알고리즘과 결합하며 더욱 강화된다. 이용자의 체류 시간을 늘릴수록 이익이 커지는 환경에서 자극적인 콘텐츠가 우선 노출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결과다. 이를 바로잡기 위해 플랫폼의 책임을 강화하는 추세지만, 가짜뉴스를 누가 어떤 기준으로 판단할지를 놓고 논란은 이어지고 있다.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정파성이 수익으로 이어지는 미디어 환경이다. 특정 정치 성향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콘텐츠는 충성 구독자를 확보하고, 후원과 광고로 연결된다. 반면 균형과 검증을 중시하는 보도는 상대적으로 주목받기 어렵다. 조회수가 곧 영향력이 되는 구조 속에서 건전한 저널리즘은 설 자리를 잃고, 그 빈틈을 가짜뉴스가 파고든다. 정치권 역시 이런 환경에서 자유롭지 않다. 진위 여부와 무관하게 지지층 결집에 유리한 정파적 주장을 활용해 온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결국 해법은 단속을 넘어 환경을 바꾸는 데 있다. 처벌과 수사는 최소한의 억지력으로서 필요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구조를 바꾸지 않는 한 '걸려도 남는 장사'라는 유인은 사라지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건전한 저널리즘이 살아남을 수 있는 조건을 만드는 일이다. 신뢰성과 검증을 기반으로 한 보도가 제대로 평가받고, 광고·구독·공적 지원 등에서 정당한 보상을 받는 환경이 갖춰져야 한다. 자극적이고 극단적인 콘텐츠보다 신뢰할 수 있는 정보가 더 큰 가치를 갖는 구조를 만드는 것이 핵심이다. 자율규제를 대폭 강화하고, 참여 매체에 인증이나 노출 인센티브를 부여하는 방안도 검토할 필요가 있다. 공교육 차원에서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을 확대하는 일 역시 시간이 걸리지만 확실한 해법이다. 가짜뉴스와 싸우는 가장 위험한 방법은 권력이 '진실의 심판자'가 되는 것이다.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그것이 자라나는 토양을 바꾸는 일이다. ☞가짜뉴스=용어 자체도 재고할 필요가 있다. '뉴스'와 '가짜'가 결합된 이 표현은 결과적으로 뉴스 전반에 대한 불신을 키우는 부작용을 낳는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기존 미디어를 공격하는 수단으로 이 용어를 대중화시켰다. 영국은 공식 문서에서 '가짜뉴스' 대신 '허위정보' '오정보' '유해정보' 등을 사용하고 있다.
[시대광장/정용관]자포자기와 소명의식 사이, 검사는 어디에
2주 전 '검사의 존재 이유, 밑바닥서 다시 찾아야'라는 칼럼을 쓴 뒤 몇몇 지인들로부터 문자 메시지를 받았다. 길지 않은 글이었지만 곱씹을 지점은 적지 않았다.검사 출신의 한 원로 법조인은 "니체는 태양은 서쪽으로 져야 동쪽에서 떠오를 수 있다고 하면서 몰락에 큰 의미를 부여했지요! 검찰은 다시 떠오르기 위해서 몰락해야 합니다"라고 했다.얼마 전까지 검찰 고위직을 지낸 다른 인사의 반응은 결이 좀 달랐다. "썰물이 되어 바닷물이 모두 빠져야, 바다 밑이 명확히 드러나 보인다"면서도 "다만, 미련을 갖고 보완수사권을 쥐려는 게 아니라 사법 현실이 어떻게 망가질지 훤히 보이기 때문에 아예 놓기가 어려울 뿐"이라는 것이었다.정부 고위직 출신의 또 다른 인사는 "(검찰의) 업보"라며 "다만 돈 없고 빽 없는 사람들이 힘들어지겠지…"라고 했다.세 사람의 메시지는 결론보다 질문을 남긴다. 지금 추진되는 검찰 개혁, 수사·기소 분리를 내세운 개혁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에 대한 질문이다. 지난 칼럼에서 필자는 검사들이 느끼는 모멸감과 자괴감의 상당 부분은 자업자득이라고 했다. 일부 '문제적 검사'들이 정권을 거치며 축적해온 권력의 그림자가 지금의 불신을 만들었다는 뜻이었다. 보완수사권에 대해서는 차라리 그것까지 내려놓아야 수사와 기소의 '완전한 단절'이 제대로 설계된 제도인지 확인할 수 있을 것이라고 썼다. 그리고 마지막에 "검찰을 무너뜨리는 것은 스스로 내려놓지 못하는 미련일지도 모른다"고 적었다.'미련'이라는 단어를 쓰면서 단지 기득권의 일부라도 놓지 않으려는 '집착'으로만 읽히지 않을까 우려했던 건 사실이다. 그러나 그런 취지는 아니었다. 실제 현장에서는 그보다 훨씬 복합적인 감정이 작동한다. 기존 권한을 모두 잃는 데 대한 자조와 불안, 권한을 내려놓았을 때 생길 수 있는 공백에 대한 우려와 책임감 등이 뒤섞여 있다. 그 점에서 "아예 놓기가 어려울 뿐"이라는 전직 고위 검사의 말은 가볍게 넘길 수 없다. 일정 부분 사실일 것이다.그럼에도 최근 검찰의 기류를 보면 다른 질문이 떠오른다. 지금의 선택들이 오로지 그 '책임감'에서 비롯된 것인가 하는 점이다. "겸손 없는 실력은 오만이고, 실력 없는 겸손은 비굴"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검찰이라는 조직이 기대받아 온 것은 실력과 겸손, 이 둘의 균형이었다. 그런데 최근의 모습은 오만도, 비굴도 아닌 듯하다. 무엇보다 책임을 어떻게 감당할 것인지에 대한 조직적 고민이 충분히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어떤 검사들은 "보완수사권이고 뭐가 다 가져가라"고 불만을 토로하고, 어떤 검사들은 "권한도 없는데 무슨 책임감이냐"고 말한다. 이런 상황에서 조용히 사람이 빠지고 있다고 한다. 검찰을 떠나는 검사가 10년 내 최대치라거나, 15년 차 이상 허리급 인력들이 그중 절반 이상이라는 소식이 전해진다.물론 작금의 상황에 대한 불만과 조직의 미래에 대한 불안이 반영된 결과일 것이다. 개인의 선택을 탓할 수는 없다. 그러나 왜 떠나는지에 대한 내부의 질문, 무엇이 잘못됐는지에 대한 성찰이 충분히 보이지 않을 때 그 이탈은 단순한 이동이 아니라 회피의 신호로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다. 이는 조직 전반에 대한 평가로 이어진다. "자신들은 언제든 떠나도 괜찮다는 생각", "어디서든 통할 것이라는 자신감 아니겠나"라는 반응이 나오는 이유다.정치의 책임도 분명하다. 수사·기소 분리, 중대범죄수사청·공소청 설치 입법, 사법 3법이 짧은 시간에 중첩되며 추진됐다. 권한 구조는 빠르게 바뀌었지만, 그에 상응하는 책임 체계와 협업 시스템은 충분히 설계되지 못했다. 경찰에 수사권이 집중되는 상황에 대한 불안, 상호 견제 장치에 대한 의구심도 적지 않다.검사 집단은 성찰이 부족했고, 정치는 제도에 대한 숙의가 부족했다. 그 사이에서 형사사법 시스템은 흔들리고 있다. 수사 부실이나 지연의 대가는 결국 국민 몫이다. 특히 힘없는 이들이 먼저 체감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 힘 있는 사람들은 제도가 어떻게 바뀌든 권력의 흐름을 놓치지 않기 때문이다.그래서 질문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다. 검사 집단은 지금 어디에 서 있는가. 모멸감과 자괴감에 머물러 있는가, 아니면 그 위에서 책임을 재구성하려 하고 있는가. 이도 저도 아닌 비분강개에 머물러 있는 건가. 모멸감과 자괴감은 이해할 수 있는 감정이지만, 그것이 책임을 대신할 수는 없다.앞서 원로 법조인이 말한 '몰락'의 의미를 다시금 곰곰이 생각해 본다. 그것은 단순한 물리적 해체나 붕괴가 아니라 처절한 성찰, 이를 통해 다시 진정한 존재 이유를 만들어가겠다는 집단 의지를 요구하는 말일 것이다. 권한을 어디까지 내려놓느냐의 문제는 중요한 이슈지만 본질은 아니다. 권한을 어떻게 내려놓고, 그 이후 어떤 책임을 감당할 것인지에 대한 겸손한 태도, 그것이야말로 많은 국민이 예리하게 지켜보는 판단 지점일 것이다.'될 대로 되라'는 자포자기와 '그래도 해야 할 일이 있다'는 소명의식 사이에서, 검사 집단이 가야 할 길은 자명하다.
[시대광장/채인택]중국, 이란전 정보 축적해 미래전 준비…한국도 달려야
지난 2월 28일 시작돼 6주째에 접어든 이란 전쟁에선 의당 보여야 할 텐데 눈에 띄지 않는 나라가 있다. 바로 중국이다. 뒤늦게 중재에 나선다고 하지만 뜨뜻미지근해 보일 뿐이다. G2를 자처하던 과거 모습과는 거리가 있다. 호르무즈 해협에 에너지의 상당 부분을 의존하고 있지만 미국이 요청한 호위 군함 파견도 사양했다. 하지만 그런 중국이 실제로는 호르무즈 해협의 동쪽 바다인 오만만에 인민해방군 해군 군함을 보내놓고 있다는 소식이 들린다. '스파이함'으로 불리는 차세대 신호정보수집함 위안왕(遠望)-1함을 보내 이란전에서 나오는 각종 신호 데이터를 다량 수집하고 있다는 것이 일부 글로벌 군사매체의 보도이다. 3만t급 초고성능 정보수집함인 위안왕-1함은 '떠다니는 슈퍼컴퓨터'로 불린다. 6000㎞ 범위 안의 미사일·항공기 1200기를 동시에 추적할 수 있다. 전장에서 수백㎞ 떨어진 오만만에서도 이란에 대한 미국·이스라엘의 공격과 이란의 이스라엘과 걸프국가에 대한 미사일·드론 타격 상황과 관련 다량의 데이터를 세밀하게 살펴볼 수 있다. 그야말로 하늘의 인공위성과 함께 전장의 빅데이터를 다량 수집하는 첨단수단이라고 볼 수 있다. 보도가 사실이라면 중국은 왜 이런 데이터를 수집할까? 전쟁에서 군사적인 교훈을 얻는 것은 물론 인공지능(AI)과 미사일·드론·요격미사일이 주도할 미래전에 대한 대비를 하기 위한 목적으로 볼 수 있다. 전쟁 시 목표물을 분석·식별·표적화하는 과정을 초압축하고 결과적으로 상대를 압도할 초고속의 미래전 기술과 전술을 개발하겠다는 의도다. 이를 위해선 빅데이터를 수집해 AI와 연결해야 한다. 인민해방군 해군이 막중한 임무를 수행하는 위안왕-1함을 보호하기 위해 055형(1만3500t)과 052D형(7500t) 방공 구축함을 호위로 붙였다는 첩보도 들린다. 로이터 통신은 중국이 그동안 전 세계 해양에서 잠수함 작전용 해저 해도도 제작해왔다고 최근 탐사보도에서 전했다. 이를 통해 전 세계에서 해양 패권국가인 미국에 맞설 잠수함 전력을 확보하겠다는 의도가 엿보인다. 하지만 선박운항 상황을 볼 수 있는 앱으로 주변 바다를 아무리 살펴도 해당 군함들은 보이지 않는다. 일부에선 이 배가 상하이 앞바다에 정박 중이라는 보도도 있다. 하지만 선박 위치는 위치 스위치를 끄거나 재밍을 통해 숨길 수 있는 것은 물론 위치정보를 변조하는 스푸핑을 통해 완전히 엉뚱한 곳에 있는 것으로 속일 수도 있다. 군함, 특히 정보수집함은 통상 자신의 위치를 밝히지 않게 마련이다. 중국은 왜 이렇게 신속하게 움직였을까. 우선 시진핑(習近平) 주석이 2012년 11월 집권한 이래 지속적으로 추구하고 있는 AI 굴기를 군사분야에서 완성하려는 목적으로 볼 수 있다. 시 주석은 '산업혁명-정보통신혁명은 서양이 주도했지만 AI혁명은 중국이 주도해 패권국가가 되겠다'는 야심을 숨기지 않아 왔다. 이번 전쟁을 계기로 AI를 군사분야 패러다임 전환을 이끄는 견인차로 쓰겠다는 의지가 보인다. 중국이 이란전에서의 빅데이터를 활용해 미래 AI전술을 개발하면 누가 가장 압박을 받을까. 당연히 중국과 가까운 나라일 것이다. 한국·일본은 물론 중국이 무력 통일을 노릴 수 있는 대만도 포함된다. 중국은 이란을 관찰하면서 장차 대만을 미사일과 드론으로 공략하는 미래전 AI 전술을 개발할 빅데이터를 축적하고 있는 셈이다. 사실, 이란과 걸프연안국가(사우디아라비아·아랍에리미트(UAE)·카타르·바레인·쿠웨이트·오만) 사이에 있는 페르시아만(아라비아만)은 중국 본토와 대만섬 사이에 있는 대만해협과 지리적, 형태적으로 유사점이 많다. 바다를 사이에 두고 미사일전과 미사일 요격전을 벌일 수 있는 형태다. 페르시아만이 대만해협보다 3배 정도 크지만 군사적으로 참고하기에는 무리가 없어 보인다. 특히 중국이 페르시아만에서 축적한 빅데이터를 활용해 대만해협에 적용할 수 있는 미래 인공지능(AI) 전술을 개발하면 서해를 사이에 두고 있는 한국에도 써먹을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중국은 여기서 개발한 AI 전술체계를 활용해 말레이 해협 등 한국의 통상로 전체에서 한미일과 대만을 함께 압박할 수도 있다. 관건은 한국의 적극적인 대응에 있다. 북한과 중국, 러시아에 둘러싸여 국방 부담이 큰 데다 방산이 주요 산업으로 부상하고 있는 만큼 미래전 대비 차원에서 중동 관련 빅데이터 확보 전쟁에 뛰어들어야 한다. 방산이 엔진이라면 빅데이터는 연료에 해당한다. 한국도 호르무즈 인근 해역에 신호정보 감시연구선을 보내 미래전을 위한 빅데이터를 확보해야 한다. 그래야 미래 전쟁의 우위를 지킬 수 있다. 빅데이터는 자주국방·방산대국을 위한 능력 확보와 국가 자강을 위해 꼭 필요하다. 군·정보기관·연구기관이 합동으로 이를 확보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미래전 AI용 OODA(관찰·판단·결정·행동) 과정 초압축과 MUM-T(유무인 복합전) 전술 개발을 위해선 이번 전쟁에서 실제 운용됐던 미사일과 요격미사일의 빅데이터가 절실하다. AI·드론·미사일·요격미사일을 넘어 전쟁 빅데이터 수집·확보와 미래전 대비태세 확립 경쟁은 이미 시작됐다. 이제 수퍼군집 드론, 인간-로봇 하이브리드 등 미래전을 위한 첨단 전투시스템 개발에 박차를 가해야 한다. 한국 방산의 발전 과정을 보면 지금 우리가 확보해야 할 게 무엇인지 잘 드러난다. 아무리 우방이라도 경제적 이익이 걸리면 도와주기는커녕 오히려 경계했던 어두운 역사를 되새김질할 필요가 있다. 미래전에서도 마찬가지다. 세계 각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분쟁에서 각종 빅데이터부터 확보하는 게 미래 방산기술 자립의 길이다. 아무도 이를 제공하지 않는다. 재래식 무기체계를 넘어 미래전 무기체계 개발로 나아가는 핵심적인 관문이 바로 빅데이터 축적이기 때문이다. 지금이라도 빅데이터 확보를 위해 달려 나가야 한다.
[시대광장/이상언] 하늘에서 햄버거가 오는 도시
프로펠러 6개 달린 드론이 키오스크 지붕 위에 살포시 앉았다. 다리로 붙들고 온 박스를 내려 놓곤 말벌 소리를 내며 하늘로 솓구쳤다. 키오스크 아래로 이동한 박스를 꺼냈다. 그 속에 안전하게 담겨 온 햄버거와 콜라를 손에 쥐었다. 지난 주말 중국에서 처음 경험한, 말로만 듣던 드론 배달이다. 드론은 1분에 한 대꼴로 선전시 런차이(人材) 공원 내 키오스크를 오갔다. 한국의 '배민'에 해당하는 중국 '메이투안' 앱으로 햄버거·치킨·커피·차 등을 주문할 수 있다. 배달료는 11위안(2400원). 메이투안 직원에 따르면 선전의 이런 배달 포인트가 약 100개다. 대부분 공원ㆍ광장과 지하철역 주변에 있다. 외지인들은 드론 착·이륙 광경을 목이 아프게 올려다 보는데, 산책 나온 현지인들은 눈길도 주지 않고 지나친다. 이 도시에 드론 배달이 생긴 게 3년 전이다. 홍콩 친구 아들 결혼식에 갔다가 이웃 선전에 들렀다. 도시 건설이 한창이던 2000년에 셀 수 없이 늘어선 건설 크레인을 보고 놀랐던 곳이다. 지금은 중국의 실리콘 밸리라 불리는 '기술 굴기'의 상징이자 화웨이·텐센트·ㆍ 비야디(BYD)·다쟝(DJI)의 고향이다. 변화를 눈으로 보고 싶었다. 공원에서 차로 10분쯤 걸리는 곳에 있는 DJI 드론 전시장으로 갔다. 광장 복판의 4층 건물이 젊은이들로 붐볐다. 영상 촬영용이 인기였다. 한켠에는 농업·소방에 쓰이는 대형 드론이 즐비했다. 70% 넘게 세계 드론 시장을 점유한 DJI는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더욱 유명해졌다. 우크라이나 청년들이 이 회사 드론에 폭탄을 매달아 러시아 전차로 날렸다. 난생처음 기사 없는 택시도 타봤다. 서울 강남 일대에 자율주행 택시가 운행되지만 운전석에 사람이 있다. 선전 무인 택시는 운전석이 빈 진짜 자율이다. 복잡한 난산구 도로를 편안하게 달렸다. 첫 경험이라 살짝 긴장했는데, 이내 익숙해졌다. 차로 변경, 좌·우 회전, 정차가 어지간한 사람 운전보다 매끄러웠다. 일반 택시보다 쾌적했고, 운임도 약간 쌌다. 'Inno100'이라는 아이디어 상품 판매점 계산대는 로봇이 지키고 있었다. 길거리 상점, 호텔 로비 등에서 커피 만드는 로봇을 봤다. 로봇 백화점 '6S 스토어'에선 축구하는 로봇, 피아노 치는 로봇을 구경했다. 개 형상의 로봇은 얼굴 모니터에 하트 문양을 연신 띄우고 엉덩이를 흔들며 손님 앞에서 재롱을 부렸다. 이 모든 견문이 하루에 다 이뤄졌다. 선전 도로에는 유류 차(청색 번호판)보다 전기 차(녹색 번호판)가 많았다. 대략 네 대 중 세 대꼴이다. BYD, 샤오미, 화웨이 등 대부분 중국제다. 오토바이는 예외 없이 배터리로 달린다. 도로 옆에도 배출가스 냄새가 나지 않는다. 한국 인구의 3분 1에 해당하는 1700만 명 거대 도시가 환경 친화로 거듭났다. 홍콩 가는 김에 중국의 변화를 보겠다고 마음 먹은 것은 KBS 다큐멘터리 때문이다. '인재전쟁'이라는 프로그램이다. 1부 제목은 '공대에 미친 중국'이고, 2부 제목은 '의대에 미친 한국'이다. 지난해 중국 회사가 만든 생성형 인공지능(AI) '딥시크' 충격을 조명했다. 중국 입시생은 "커서 과학자가 되고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고 싶어요"라고, 한국 학생은 "의사가 돼서 롯데월드 보이는 곳에 살고 싶어요"라고 한다. 영상 속에서 이정동 서울대 공학전문대학원 교수가 말했다. "첨단산업 분야에서 중국이 한국을 추월한 지 오래다." 유튜브 영상에 달린 댓글들이 촌철이다. '이게 수신료의 가치.' '설공 나와서 의대 갈 걸 후회하는 대기업 부장 한 트럭이다.' '싸구려 메이드 인 차이나가 아니라 인벤티드 인 차이나.' '간담이 서늘해지는 호러 영화.' "오히려 후퇴한 나라를 후대에 물려 주게 됐다." 많은 사람이 이렇게 말한다. 한국 경제 성장률이 제로(0)에 수렴된다. 곧 마이너스(-) 시대가 된다는 예측도 나온다. 얼마 전까진 이런 얘기에 마음 속에선 '설마?'의 속삭임이 있었는데 요즘엔 그렇지도 않다. 한국이 내리막길 앞에 섰다고 진단하는 책 '피크 코리아'의 저자 백우열 연세대 교수는 "성장·생산성·효율의 개념이 다시 한국인의 가치관의 주류로 자리 잡아야 한다"고 역설한다. 우린 지난 한 세대 동안 '정의로운 대한민국'을 외쳤다. 이젠 '부강한 대한민국'이라는 말을 유물 창고에서 다시 꺼낼 때가 됐다. 횃불을 더 밝히지 못하고 사그라지는 잔광(殘光)만 후대에게 물려준 부끄러운 조상이 될 것 같아 두렵다.
MO(%EA%B5%90%EC%B2%B4).gif)
PC(%EA%B5%90%EC%B2%B4).gif)
![[뉴스언팩] 수도권 23만 가구 공급/부동산세제개편안/오세훈vs박원순 책임공방](https://i.ytimg.com/vi/9SG7xLYbfJs/hqdefault.jpg?width=1920&quality=75)
.jpg)
.jpg)
.jpg)
%EC%9A%B0%EC%B8%A1.gif)
.jpg)
.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