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노트
[기자수첩] 건설 R&D 투자 '1%'… 안전관리 규제의 한계
'중대재해 처벌 등에 관한 법률'(중대재해처벌법) 시행과 각종 규제 강화에도 건설현장에서 발생하는 안전사고는 줄어들지 않았다는 통계가 확인된다. 사고는 수습보다 예방이 중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규제뿐 아니라 노동자의 협력, 그리고 기술 투자가 함께 작동해야 한다. 올 상반기 10대 건설업체(삼성물산·현대건설·현대엔지니어링·대우건설·DL이앤씨·GS건설·HDC현대산업개발·포스코이앤씨·롯데건설·SK에코플랜트)의 매출 대비 연구개발(R&D) 투자비는 평균 0.7%에 불과했다. 매출의 1%에 미치지 못하는 기술 투자비가 건설산업의 현실을 보여준다.정부가 인공지능(AI) 응용사업에 수조원을 투자하고 기업들은 안전관리 시스템에 드론 감시, 스마트 헬멧 등 기술을 적용하려 노력하고 있다. 해외 현장에서는 이 같은 안전관리 자동화가 이미 표준으로 자리잡았다는 게 업계 관계자들의 말이다.하지만 국내 건설업체들은 쉽사리 대규모 투자에 나서지 못한다. 수년째 지속돼온 건설경기 침체와 원가 부담, 실적 하락 등으로 R&D 예산을 오히려 줄이는 실정이다. 한 대형 건설업체 관계자는 "안전기술에 대한 투자가 필요한 것을 알지만, 전문경영인 체제에선 실적 방어가 더 중요하므로 R&D 예산을 늘리기가 쉽지 않다"고 토로했다. 총수 경영 체제가 아닌 기업의 최고경영자(CEO) 임기는 통상 3년으로 경영실적에 따라 연임 여부가 결정될 수 있는 환경에선 고수익 수주와 영업이익률에 치중할 수밖에 없다. 눈앞의 실적을 보장하지 않는 R&D 투자는 후순위가 되는 것이 당연하다.정대기 대우건설 기술연구원장은 "안전기술은 한 번의 시스템을 도입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며 "현장의 인식과 문화가 바뀌어야 지속할 수 있다"고 말했다.정부도 기업에 대한 처벌만이 아닌 기술개발에 좀더 힘을 써야 한다. 기술 인센티브와 공동 연구 플랫폼 구축 등 구조 지원을 병행할 수 있다. 제도와 기술이 한 팀이 되어 움직여야 구조의 문제를 푸는 데 다가설 수 있다. 건설현장에서 발생하는 사고는 산업재해의 절반 가까이를 차지한다. 국회 기후에너지환경노동위원회 소속 이학영 의원(더불어민주당·경기군포)이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2020년부터 2024년까지 현대건설 17명, 롯데건설 14명, 대우건설 13명의 사망사고가 발생했다. 올 초 현대엔지니어링과 포스코이앤씨, DL건설, GS건설, 대우건설, 삼성물산 등이 시공한 현장에서도 사고가 잇따랐다.백지장도 맞들면 낫다는 속담이 있는데, 건설현장 사고 예방은 기업의 노력만으로는 이뤄지기가 힘들다. 정부가 지원을 고민하고 기술 발전에 협력해야 하며 외국인 이주노동자 교육 등 풀어야 할 문제가 매우 많다.
[기자수첩] 수의계약 무산된 KDDX… '상생'이 전력화 속도 높인다
2년 가까이 표류하던 한국형 차기구축함(KDDX) 사업이 마침내 전환점을 맞았다. 방위사업청이 추진해온 수의계약 방식은 사실상 무산됐다. 정치권 전반에선 '연내 상생 방안 도출'에 공감대가 형성됐고 오는 11월 방위사업추진위원회가 향후 방향을 가를 분수령으로 주목된다.올해 방위사업청 국정감사에서도 KDDX 사업 방식이 주요 쟁점으로 떠올랐다. 박선원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계속해서 수의계약을 주장한다면 세계시장에서 우리 국가와 방사청의 신뢰 문제가 발생할 것"이라고 지적했다.정치권의 비판은 단순히 절차 문제를 넘어 '신뢰의 위기'에 대한 경고였다. 방사청이 '적기 전력화'를 명분으로 내세우며 수차례 수의계약 안건을 상정했지만 민간위원과 국회 모두가 "공정성과 투명성이 결여됐다"고 반대했다. 이제 수의계약은 정치적으로도 행정적으로도 추진 불가능한 단계에 이르렀다는 평가가 나온다. 남은 길은 하나 '상생'이다. 부승찬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국회 국방위원회 내에서도 상생 방향에 공감대가 형성됐다"며 "올해 결론이 날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안규백 국방부 장관 역시 "KDDX는 더이상 미룰 일이 아니다"라며 신속한 결정을 예고했다.이처럼 정부와 국회 모두 상생협력형 대안을 검토하는 방향으로 기류가 전환됐다. 방사청이 내부 검토를 마치는 대로 11월 방추위에서 사업자 선정 방식이 확정될 전망이다.남은 안은 상생안(공동개발)과 경쟁입찰뿐이다. 업계에선 공동개발이 가장 현실적인 방안이라고 본다. 올해 초 산업통상자원부가 한화오션과 HD현대중공업을 KDDX 사업의 복수 방산업체로 지정하면서 두 기업이 함께 상세설계에 참여하고 1·2번함을 나눠 동시 발주하는 '공동개발 모델'이 급부상했다. 이 모델은 최신 기술을 병행 반영하고 공정을 병렬로 진행해 전력화 일정을 단축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방산 업계 관계자들도 "정치적 갈등으로 표류한 사업을 정상화하려면 '윈-윈' 구조가 필요하다"며 "공동개발을 통해 기술 경쟁력과 일정 안정성을 동시에 확보할 수 있다"고 입을 모은다.문제는 '결단'이다. 정치권이 방향을 제시하고 업계가 현실안을 내놨다면 이제 방사청이 중심을 잡아야 한다. 그동안 방사청은 결단을 미루며 사업 혼란을 키워왔다. 백선희 조국혁신당 의원이 "KDDX 문제를 어렵게 만든 것도 해결해야 하는 것도 방사청"이라고 질타한 것도 이런 이유다.방위사업은 어느 한쪽의 승패로 끝나선 안 된다. 국산 방산 시스템의 신뢰는 협력과 균형 위에서만 유지된다.KDDX는 단순한 조선 프로젝트가 아니다. 선체부터 전투체계, 레이더 등 핵심 무장을 국내 기술로 자체 개발해 건조하는 '국산 구축함의 상징'이다. 총 6척 건조에 약 7조8000억원이 투입되는 국가 전략사업이다.한 치의 판단 착오가 국가 방산 산업 전체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방위사업청이 지금 내릴 결정은 단순한 계약 방식의 문제가 아니라 향후 한국 해군의 기술 자립과 산업 생태계의 방향을 결정짓는 일이다.이제 중요한 것은 '어떻게 함께 가느냐'다. 상생의 틀 안에서 사업을 조속히 정상화하지 못한다면 그 피해는 결국 군과 국민에게 돌아간다. 방사청은 흔들림 없는 결단으로 KDDX를 한국 방산 신뢰의 출발점으로 만들어야 한다. 이것이 수년 넘게 표류한 KDDX사업이 우리에게 준 교훈 아닐까.
[기자수첩] 무더기 기업인 '국감 소환'…필요할 때만 민관 협력인가
"성공한 사람을 끌어내려서는 나라를 세울 수 없다." 리콴유 전 싱가포르 총리는 정치권이 기업인을 포퓰리즘적으로 공격하려는 상황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그는 기업의 성장이 곧 국가 발전의 토대라고 강조했다. 독재 통치로 명암이 엇갈리지만 그의 기업 친화적 정책은 싱가포르를 1인당 GDP 7만 달러 수준의 선진국으로 끌어올렸다. 정부가 주도하고 기업이 협력한 결과다. 최근 한국에서도 민관 협력이 주목받는다. 한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국내 주요 그룹 총수들은 미국을 찾아 각 기업이 미국 경제에 기여할 방안을 미 정부에 직접 전달했다. 최근 정부와 트럼프 측이 관세 협상안을 두고 이견을 빚자 국내 5대 그룹 총수들이 다시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마러라고 리조트에서 트럼프를 만나 돌파구를 모색하기 위해서다.두 국가 모두 민관 협력을 중시하지만 가장 큰 차이는 정치권이 기업인을 바라보는 시각이다. 싱가포르는 기업을 국정 파트너로 여기는 반면 한국은 규제와 감시 대상으로 본다. 올해 국정감사에서 기업인 증인 채택을 줄인다고 했지만 지난해보다 8명 늘어난 164명이 소환됐다. 수 자체를 문제 삼을 수는 없지만 일부 증인은 실수로 소환된 것 아니냐는 의혹이 남는다. 국감 첫날 최주선 삼성SDI 대표는 리튬 배터리 사고 관련 질의를 위해 소환됐다. 문제의 사고는 창천동 배터리 화재였지만 삼성SDI 제품은 아니었다. 중국산 배터리라는 것이 밝혀졌지만 국회는 확인 없이 최 대표를 증인으로 불렀다. 국가정보원 화재 관련 증인으로 채택된 김동명 LG에너지솔루션 대표도 사고는 교체 과정의 부주의 때문이었지만 제조사라는 이유만으로 증인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올해도 기업인들은 국감 회의장 뒷편을 가득 메웠다. 경제가 급박하게 돌아가지만 이들은 하염없이 답변할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제프 베조스 아마존 창립자는 CEO의 역할을 두고 '중요한 결정에서 마지막 책임을 지는 사람'이라고 했다. 국감에 나온 기업인들은 질의하는 의원이 바뀔 때마다 답변과 사과를 반복해야 했다.기업을 필요할 때만 이용하는 풍토가 자리 잡아서는 안 된다. 민관 협력은 기업이 정부를 돕는 것이 아니라 국가와 기업이 힘을 합쳐 모두의 성장을 이끄는 것이다. 철강업계는 미국·EU 고율 관세와 중국 저가 공세로 현대차는 일본보다 높은 25% 관세로 경쟁에서 밀리고 있다. 배터리 업계는 미국의 전기차 보조금 중단으로 고충이 쌓이고, 반도체 업계는 미중 갈등과 관세 여파로 수익이 감소할 조짐이다. 하지만 지난 8월 여야 의원 106명이 발의한 K스틸법은 정쟁 속 국회에 계류돼 있고, 배터리 업계의 R&D 세금 감면 외 '직접환급형 세액공제' 요구에 정치권은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반도체 업계 지원을 위한 9개 법안도 국회에서 처리되지 못한 채 맴돌고 있다. 정치권이 기업을 상호협력 대상으로 바라보지 않는다면 기업은 살 길을 찾아 눈을 돌릴 수밖에 없다. 1983년 스웨덴에서는 포퓰리즘성 법안인 노동자 기금법 통과 이후 기업들이 다른 나라로 본사를 옮겼고 경제가 흔들렸다. 한국도 기업만 국가를 돕는 구조가 고착화된다면 같은 결과를 맞게 될 수도 있다. 내우외환 속 한국 경제 성장률은 1% 아래로 추락했다. 기업과 국가가 공생하는 문화를 만들어야 할 때다.
[기자수첩] '규제의 덫'에 갇힌 부동산 대책
이재명 정부가 오늘(15일) 새 부동산 대책을 발표했다. 정부 출범 4개월 만에 세 번째 대책이다. 앞서 6·27 대출규제와 9·7 공급대책으로 가격 안정을 꾀했지만 서울 아파트값은 나날이 고공행진하고 강남에선 신고가 거래가 잇따랐다. 9·7대책은 '맹탕 대책'으로 평가됐다. 정부는 2030년까지 수도권에 135만가구의 신규 주택을 착공하겠다는 공급 계획을 제시했지만 현장에선 이를 체감하지 못했다. 집값 상승세가 안정되지 않으면서 이달 추석 연휴를 앞두고 정부가 추가 규제를 발표한다는 사전 정보가 시장에 불안을 안겼다.지난 12일 고위 당정 회의를 통해 부동산 종합대책 발표를 공식화한 정부는 이번 대책에서 서울 전역과 경기 12개 지역을 규제지역(조정대상지역·투기과열지구·토지거래허가구역)으로 지정했다. 고가 주택의 주택담보대출을 축소하고 실거주 목적이 아닌 경우 주택 매수를 허가하지 않는 것이 골자다.자금줄을 조인다고 해서 집값이 안정될지는 미지수다. 그동안 시세 상승을 주도해온 강남·용산 등 고가 주택들은 대출 영향을 크게 받지 않는다는 지적이 지속해서 제기됐다. 이미 6·27 대출규제를 통해 주택담보대출 한도는 6억원으로 제한돼 있다.부동산 전문가들은 정부의 이번 대책은 단기 효과에 그칠 것이라고 전망했다. 정부 규제가 강화될수록 '더 오르기 전에 투자해야 한다'는 불안 심리가 팽배하다. 오히려 내 집 마련이 필요한 실수요자 피해 등 부작용만 반복되고 있다.부동산대책의 가장 큰 과제는 정부 정책에 대한 신뢰를 회복하는 것이다. 문재인 정부의 부동산정책 실패는 규제가 과거와 같이 거래시장을 움직일 수 없다는 큰 교훈을 남겼다.문재인 정부 5년 동안 28차례 부동산대책을 발표했지만 서울 아파트 가격은 109% 상승했다. 무주택자의 임대차시장 불안 등 피해도 우려된다.규제에도 내성이 있다. 당국의 지나친 개입은 정부가 부동산에 집착한다는 인상을 주고 있다. 부동산 투기에 대한 기대를 높인다는 문제점도 지적된다.지속 가능하고 일관된 시장 안정화 정책은 실수요자를 위한 주택 공급을 늘리는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아 말한다. 정권 교체에도 흔들리지 않는 주택정책의 시그널이 내 집 마련을 준비하는 실수요자의 불안을 가라앉힐 수 있다.
[기자수첩] ETF 투자, 유행 따르기보단 '장기 보유'가 성공 지름길
국내 ETF(상장지수펀드) 시장이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순자산총액은 230조원을 돌파했고 상장 종목 수는 1000개가 넘는다. 4년 전만 해도 순자산총액 73조원, 500개 상품에 불과했지만 가파른 속도로 시장이 확대됐다.ETF가 이처럼 성장한 이유는 분명하다. 거래소에 상장돼 주식처럼 실시간으로 사고팔 수 있으면서도 일반 펀드에 비해 투자 비용이 낮고 지수를 추종하는 특성상 분산 투자 효과가 뛰어난 구조 덕분이다. 투자자는 소액으로도 다양한 자산에 접근할 수 있고 기초지수의 구성 내역을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있어 투명성도 높다. 개인 투자자들이 ETF에 매력을 느끼는 이유다.상품 폭도 넓어졌다. AI(인공지능)·빅테크·방산·고배당 등 특정 산업이나 트렌드를 반영한 테마형 ETF가 속속 등장하면서 투자자들은 자신의 관심사와 투자 성향에 맞춘 선택이 가능해졌다. 특히 국내 시장은 리테일 투자자 비중이 높아 새로운 테마가 나오면 빠르게 자금이 몰리는 특징을 보인다.물론 지수를 추종하는 ETF의 특성상 하락 가능성도 존재한다. 시장이 상승만 하는 것은 아니어서다. 그럼에도 많은 전문가들은 지수는 장기적으로 우상향한다는 점에 주목한다. 지난 20년간 꾸준히 상승해온 S&P500이 대표적 사례다. 단기 변동성에 흔들리며 잦은 매매를 하기보다는 긴 호흡으로 ETF를 보유하는 편이 훨씬 유리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조언이다. 잦은 매매를 하게 되면 '고점 매수·저점 매도'의 가능성이 커지기 때문이다. 9월 한 달간 진행한 릴레이 인터뷰에서 자산운용사 ETF 본부장들 역시 같은 의견을 내놨다. ETF는 단기 유행을 좇는 자산이 아니라, 장기 보유할 때 진가를 발휘하는 투자 수단이라는 것이다. ▲낮은 운용보수 ▲높은 투명성 ▲손쉬운 분산투자라는 기본 장점에 ISA(개인종합자산관리계좌)나 연금 계좌와 결합하면 절세 효과까지 더해져 노후 자산을 불리는 핵심 도구로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장기 투자 전략의 대표 사례로는 '코어-새틀라이트 전략'이 꼽힌다. 코어엔 코스피200, S&P500 같은 대표 지수 ETF를 담아 안정적 수익 기반을 만들고 새틀라이트엔 성장성이 높은 테마형 ETF를 일부 편입해 초과 수익을 노리는 방식이다. 이는 안정성과 성장성을 동시에 추구하는 균형 잡힌 접근이다.투자 대가 워런 버핏은 "주식시장은 인내심이 없는 자로부터, 인내심이 많은 자에게로 돈이 넘어가도록 설계돼 있다"고 말했다. ETF 투자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예컨대 S&P500에 1000만원을 20년간 보유했을 경우 9500만원으로 불어나지만 단 10일간의 상승장을 놓치면 수익이 절반으로 줄어든다. 시장에 오래 머무르는 것 자체가 최고의 투자 전략임을 보여주는 사례다.ETF는 이제 단순한 투자 트렌드가 아니다. 저비용·투명성·분산투자라는 구조적 장점에 세제 혜택까지 더해져 장기적 관점에선 연금 자산의 핵심으로 자리 잡을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투자자들의 관점도 바뀌어야 한다. 트렌드에 흔들리는 단기 매매가 아니라 시간을 아군으로 만드는 꾸준한 보유가 ETF의 본질에 다가가는 길이다.
[기자수첩] 기대감만으로 '코스피5000'(?)… 시장은 '체력'을 원한다
"현재 코스피 상승세는 정부 증시 부양책에 대한 실망감이 기대감으로 원상복구 된 것에 불과합니다. 지금 상황에서 현재 코스피 레벨에 안착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입니다."최근 만난 모 증권사 리서치 센터장의 한마디는 큰 충격이었다. 최근 국내 증시가 역사상 최고가를 잇달아 돌파하는 등 고공행진을 이어갔지만 이런 분위기가 언제까지 지속될지에 대한 우려부터 꺼냈기 때문이다. 코스피는 정부가 주식 양도세 대주주 기준을 50억원으로 현행 유지한 것이 촉매제가 되며 지난 16일까지 11거래일 연속 상승세를 이어왔다. 날마다 사상 최고가를 갈아치우던 코스피지만 지난 17일 돌연 하락 전환했다. 업계는 이런 조정세가 예견됐다는 분위기인데 최근 국내 주식시장의 상승세가 기대감으로 부양된 영향이 적지 않다고 본 것.지난 7월 말 발표된 세제개편안은 내년 1월1일 이후 개시하는 사업 연도부터 적용 예정으로 현재 시행규칙과 시행령 등 후속 개정을 이어가고 있다.현재 국회와 정부는 자사주 의무 소각, 법인세율 인상, 종부세·상속세 완화, 배당소득 분리과세 등 주요 쟁점을 두고 논의를 이어가고 있다. 현재 세제개편안이 아직 껍데기만 마련됐을 뿐 핵심 사항들은 구체적으로 정해지지 않았음을 방증한다. 정부와 국회는 아직 뚜렷한 방향을 정하지 못하고 시장 눈치를 보며 논쟁만 반복하는데 이런 정책 불확실성은 향후 변수로 작용하며 주가 변동성을 키울 수 있다는 게 업계 우려다.대내외 불확실성이 산적한 상황에서 뚜렷한 실체 없이 기대감만으로 버티는 장세는 오래 지속될 수 없다. 정부는 정책에 대한 기대만 부풀리는 데서 멈추지 말고 실행으로 신뢰를 확보해야 한다. 근본적으로 한국 증시를 부양하고 코리아디스카운트를 해소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국내 기업들의 경쟁력이다. 궁극적으로 증시 체력은 기업이 키운다. 글로벌 무대에서 산업 경쟁력을 입증하고 실제 이익을 통해 가능성을 인정받을 수 있어야 한다. 다가올 올해 3분기 기업들의 실적 시즌은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지금의 증시 상황이 거품일지, 또는 도약을 위한 발판일지 가늠하는 시험대가 될 것으로 보인다. 금융정보업체 에프앤가이드에 따르면 8월 말 기준 올해 3분기 코스피 상장사 영업이익 컨센서스는 67조7190억원으로 집계됐다. 이는 지난 7월 전망치 대비 1.9% 하락한 수치다.지난 2분기 발표된 기업들의 실적이 예상에 미치지 못했기 때문에 3분기 실적 추정치 역시 하향 조정됐다. 3분기 국내 상장 기업들의 실적이 기대를 밑돌 경우 시장 충격이 불가피하다. 산업 경쟁력을 기반으로 한 실적이 담보되지 않는 한 현재 증시 고점은 쉽게 흔들릴 수 있다. 기업들의 성적표가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면 그간 쌓인 거품은 더 강한 충격으로 되돌아올 수 있다.거품이 사라지는 것을 막기 위해 정부는 증시 활성화 방안에 관한 논의를 조속히 매듭짓고 기업의 글로벌 경쟁력 제고를 뒷받침할 입법·제도 개선에도 속도를 내야 한다. 기업의 체력이 곧 시장의 체력이고 나아가 경제의 기반이 된다. 국내 투자자는 물론 외국인·기관투자자 관점에서도 한국 자본시장이 지속 가능한 매력을 확보하도록 일관된 정책과 실행이 요구되는 시점이다. 예측 가능성은 투자의 밑거름이라는 점을 잊어선 안 된다.
[기자수첩] 정치 논리에 휘둘리는 자사주 소각 의무화의 민낯
개인투자자들의 항의 전화가 빗발치자 하루 만에 법안을 뒤바꾸는 등 정치권의 조급함이 도를 넘었다. 지난 7월 발의된 상법 개정안에서는 '취득 후 3년 이하 범위에서 대통령령이 정하는 기간'으로 명시했는데 "3년이나 미루는 건 말이 안 된다"는 개인투자자들의 항의에 '즉시 소각' 법안으로 재발의한 해프닝이 벌어졌다. 법안의 급진성보다 정책의 일관성과 실현 가능성에 대한 냉철한 검토 없이 여론에 휘둘려 수정했다는 점이 문제로 지적된다.이런 졸속 입법에 대한 우려는 재계 간담회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났다. 9일 서울 중구 대한상공회의소에서 열린 민주당 코스피5000 특위와 경제8단체 간담회에서 박일준 대한상공회의소 부회장은 "상법뿐만 아니라 노란봉투법까지 동시다발적으로 법이 개정되다 보니까 기업들이 걱정이 많다"며 "1차 상법 개정될 때 이사 충실의무에 대한 걱정을 경제계가 많이 하니까 배임죄를 개정하겠다고 약속했는데 현장에서는 해석에 대한 논란이 있는 상태에서 또 2차 개정이 이루어지고 하다 보니까 기업들의 불안이 더 커지지 않느냐"고 토로했다.이는 순차적 검증 없이 정치적 효과만을 노린 졸속 입법의 전형이다. 오기형 민주당 코스피5000특별위원회 위원장이 "야구에 비유해 말하자면 이제 2회를 마치고 3회에 들어가는 상황"이라며 경제 입법에 적극 나서겠다는 의지를 피력했지만 마치 야구 경기처럼 정치적 성과를 쌓아가겠다는 인식 자체가 문제다.현재 상장사 가운데 자사주 보유 비중이 40%를 넘는 기업은 7곳이며, 자사주 보유 비중이 20~40%인 기업은 코스피에 33곳, 코스닥에 19곳이 있다. 롯데지주는 올해 초 기준으로 32.5%의 자사주를 보유했고, SK그룹도 지주사인 SK의 자사주 비중이 24.8%로 매우 높은 편이다. 이들 기업이 1년 내에 수십조원 규모의 자사주를 처리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진다면 그 과정에서 발생할 혼란은 고스란히 주주들의 피해로 전가될 가능성이 높다.더욱 우려스러운 것은 여론에 떠밀려 정책 방향이 하루아침에 바뀌었다는 점이다. 법안 발의 후 의원실에는 개인투자자들의 전화가 이어졌고 결국 소각 기간을 '시행령'이 아닌 '법안'에 명확히 하고 즉시 소각까지 의무화한 법안을 재발의하는 것으로 방향을 틀었다. 다만 항의 전화를 건 개인투자자들이 자사주 소각 의무화의 복잡한 파급효과를 모두 이해하고 있을지 의문이다. 자사주 소각이 곧바로 주가 상승으로 이어진다는 단순한 등식은 현실에서 작동하지 않을 수 있어서다. 삼성전자의 경우 지난해 자사주 10조원 매입 및 소각을 발표했지만 주가 변동이 미미했던 사례도 있다.해외 사례를 봐도 미국 기업들은 충분한 유동성과 안정적인 자본시장을 바탕으로 자사주 소각을 진행하지만, 한국 기업들은 여전히 대주주 중심의 지배구조 하에서 경영권 방어라는 현실적 필요에 직면해 있다. 이런 구조적 차이를 무시하고 단순히 '글로벌 스탠다드'를 들이대는 것은 현실을 외면한 탁상공론에 불과하다.자사주 오남용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분명 필요하다. 본래는 없던 '자사주 의결권'이 인적분할 시에는 생기는 일명 '자사주 마법'이라던가 주주가치제고 목적으로 취득해놓은 자사주를 최대주주에 우호적인 백기사를 확보하는 용도로 처분하는 행위는 분명 개선돼야 한다. 하지만 해결책은 무조건적인 소각 의무화가 아니라 자사주 보유 목적의 투명성 제고와 처분 과정의 공정성 확보여야 한다.현재 민주당은 자사주 소각 의무화와 관련해 경제계 의견 등을 수렴한 뒤 여러 관련 법안을 하나로 모으는 작업을 한다는 목표를 세워두고 있다. 하지만 개인투자자들의 즉흥적인 요구에 휘둘려 졸속으로 만든 법안이 결국 시장 전체의 혼란을 가져온다면 그 피해는 고스란히 모든 투자자들이 떠안게 될 것이다. 정치적 성과보다는 제도의 안정성과 지속가능성을 우선시하는 것이 진정한 주주가치 제고의 길이다.
[기자수첩] 비만약 열풍의 그림자
말 그대로 비만치료제 열풍이다. 비만이 아닌 사람도 비만치료제를 사용하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을 정도다. 운동과 식단조절로 살을 빼면 바보라는 소리도 심심찮게 들린다. 제약사들은 가격 경쟁에 나서며 비만치료제 대중화에 기름을 붓고 있다. 오남용과 부작용에 대한 우려와 경고는 점점 사라져 간다.국내 비만치료제 열풍은 노보 노디스크의 위고비(성분명 세마글루타이드)가 문을 열고 일라이 릴리의 마운자로(성분명 터제파타이드)가 불을 지폈다. 일론 머스크 테슬라 CEO(최고경영자)의 체중 감량 비법으로 유명했던 위고비는 지난해 10월 국내에 출시된 후 품절 대란을 일으켰다. 비만치료제에 대한 대중들의 거부감이 줄어든 순간이다. 지난달부터 국내에 유통된 마운자로는 위고비보다 뛰어난 체중 감량 효과를 바탕으로 일명 약국 '오픈런'을 재현했다.비만치료제로 체중을 감량했다는 주변인들의 후기를 듣는 일도 늘었다. 대체로 "비만치료제를 맞으면 식욕이 싹 사라져 크게 노력하지 않아도 살이 빠진다" "처음엔 약 가격이 부담돼 주저했는데 식비가 줄어드니 사실상 추가 지출은 없는 셈"이라고 한다. 단점은 찾아볼 수 없고 장점이 주를 이룬다. 비만치료제 가격이 기존 40만원대에서 최근 20만~30만원대로 떨어진 점을 고려하면 한동안 이 같은 후기를 더 많이 들을 듯하다.문제는 오남용이다. 위고비와 마운자로 모두 비만이라는 질병을 치료하기 위해 만들어졌지만 현장에서는 미용 목적으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처방 기준이 되는 BMI(체질량지수)와 관계없이 처방이 이뤄지기도 한다. 고용량 약을 처방받은 뒤 환자 임의로 용량을 조절해 맞거나 여러 사람이 나눠 맞는 사례도 흔히 볼 수 있다. 비만치료제를 사용 중인 30대 직장인 A씨는 '의약품을 환자 임의로 사용해도 되냐'는 기자의 질문에 "병원에서 의사가 그렇게 하라고 했다"고 설명했다.간과하고 있는 부작용에 대한 경각심도 필요하다. 비만치료제로 빠르게 체중을 감량하면 담석 등 부작용이 나타날 수 있다. 간에서 분비되는 콜레스테롤의 양이 증가하고 식이량은 감소하면서 담낭 수축 빈도가 줄고 담즙이 정체돼 담석이 생기는 구조다. 이 밖에 구토·설사·변비 등 위장관계 이상 반응, 저혈당증, 급성췌장염, 체액 감소 등도 비만치료제의 부작용으로 꼽힌다.비만치료제는 양날의 검이란 생각이 든다. 비만 환자가 의료 전문가 처방에 따라 허가된 용법대로 사용했을 때는 축복과 같은 의약품이 되겠지만 반대의 경우에는 건강을 해치는 주범이 된다. 스스로 자신을 향해 겨누고 있는 것이 비만치료제 주삿바늘이 아닌 건강을 갉아먹는 칼이 아닌지 다시 한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기자수첩] 신뢰 없이 베푸는 호의의 위험성
최근 이재명 대통령과 한미 정상회담을 마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해외의 디지털 규제'는 자국을 겨냥한 것이라고 말했다. 막강한 파워로 세계를 움직이는 미국 빅테크(대형 정보기술 기업)들을 엄호하는 발언으로 읽힌다. 자연스럽게 국내에서는 구글이 떠오른다. 인앱결제, 망 사용료 이슈까지 대립하던 구글은 이번엔 고정밀 지도까지 내놓으라고 한다. 무리한 요구를 아무렇지 않게 하고 있지만 세계 최고 네트워크 권력을 가진 구글은 전방위 압박을 통해 가능성을 점차 높이고 있다. 구글은 지난 2월 한국의 고정밀 지도 반출을 요구했다. 2007년과 2016년에 이어 세 번째다. 미국 무역대표부(USTR)는 한국의 지도 데이터 반출 제한을 '디지털 무역 장벽'으로 규정하며 압박 수위를 높이고 있다. 국토교통부는 최종 결정을 몇 차례 미루면서 장고를 거듭하고 있다.구글이 원하는 건 축척 1대5000급 고정밀 지도다. 평균 2m 이내의 위치 정확도를 바탕으로 도로와 건물, 지형고도 등 세부 지형지물까지 표현된다. 만약 이 데이터가 구글의 보안 처리되지 않은 위성영상과 결합된다면 국내 주요 군사·보안 시설이 고스란히 노출된다. 단순히 관광 편의성의 차원을 넘어 국가 안보와 직결되는 사안이다.한국 정부는 지난 30여년간 고정밀 지도 유지와 관리에 6700억원을 투입했다. 항공사진 촬영 및 기준점 측량 비용을 빼더라도 매년 유지비만 300억원이 든다. 구글은 1대5000 지도는 고정밀 지도가 아니라고 공식 입장까지 냈지만 국토지리정보원은 해당 주장이 잘못됐다고 했다. 수십년간 국가가 축적한 정보자산을 글로벌 플랫폼이 맨입에 가져가려는 것이다. 구글은 관광객들의 편의성 제고를 내세우지만 실제 목적은 디지털트윈, 스마트시티, 증강현실(AR), 자율주행 등 미래 산업 생태계 장악이 목적이다. 경제적 손익 계산을 넘어 고정밀 지도는 안보 자산이자 산업 비밀과 맞닿아 있는 정보다. 지도를 반출해주더라도 이후에도 사후 관리가 요구된다. 국내에서 데이터를 관리할 수 있도록 체계를 만들고 암호키는 분리 보관하는 등 여러가지 보안 조치가 필수다. 이를 위해선 무엇보다 '신뢰'가 전제돼야 한다. 냉정히 말해 구글은 지금껏 단 한 번도 신뢰를 입증하지 못했다.구글은 유튜브를 통해 막대한 트래픽을 유발하면서도 망 이용대가는 내지 않고 있다. 국회 청문회에서는 책임 있는 답변을 피했고 법규 역시 무시했다. 2023년 국내에서 약 12조원의 매출을 기록한 것으로 추산돼 납부 법인세는 5180억원이지만 구글코리아는 법인세를 155억원만 냈다. 심지어 세계 최초로 한국이 제정한 인앱결제방지법마저 구글은 갖은 방법을 동원해 무력화했다. 겉으로는 법을 지키는 척하면서도 실질적으로는 국내 입법 취지를 비웃은 셈이다.이처럼 상대국가를 존중하지 않고 규제는 형식적으로만 따르며 공정한 책임은 외면해 온 기업에 고정밀 지도라는 국가 핵심 정보를 넘기는 것은 무모하다. 미국 정부와 자사의 힘을 믿고 기존 약속조차 제대로 지키지 않는 구글이 지도 반출 이후 보안 의무와 활용 제한을 성실히 지킬 것이라 기대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안보와 산업 비밀이 걸린 고정밀 지도를 조금의 신의도 보여주지 않은 기업과 나누기란 어렵다. 무소불위의 권력으로 국가 차원의 규제는 가볍게 무시하는 구글에게 우리는 언제까지 무력해야 할까.
[기자수첩] 같은 대본, 다른 배우…중국 '저가 공습'의 무대
철강, 석유화학, 배터리, 태양광 산업을 취재하며 묘한 장면을 반복해서 본다. 무대 위에 올라오는 배우는 매번 다르다. 철강이 퇴장하면 석유화학이 등장하고, 그 자리를 배터리와 태양광이 잇는다. 그들이 읊는 대사는 하나다. "중국의 저가 공세와 전방 수요 부진으로 침체를 겪고 있다." 대본이 바뀌지 않은 채 배우만 교체되는, 길고 지루한 연극이 계속되고 있다.산업의 쌀인 철강은 2021년 전성기를 찍고 내리막을 걷고 있다. 철강업계 맏형인 포스코홀딩스의 매출은 2021년 76조원에서 지난해 72조원으로 비슷했지만 같은 기간 영업이익은 9조3000억원에서 2조2000억원으로 4분의 1수준으로 감소했다. 부동산 경기 침체로 건설 수요가 급감한 영향이다.한국 철강이 주춤하는 사이 그 자리를 중국산 저가 강재가 차지했다. 대규모 증설에 나선 중국 철강사들이 자국에서 소화하지 못한 강재를 한국으로 밀어냈다. 참다못한 업계는 중국산 후판, 열연, 도금·컬러강판, 특수강 봉강 등에 반덤핑(AD)을 제소하며 대응에 나섰다.석유화학도 상황은 비슷하다. 중국은 자급률 100%를 목표로 나프타분해설비(NCC)를 증설해 왔다. 중국은 2014년 1950만톤이던 에틸렌 생산 능력을 지난해 5274만톤으로 확대했다. 2027년에는 7225만톤에 이를 전망이다. 증설 규모는 한국의 연간 생산 능력(1270만톤)의 두 배가 넘는다.한국의 최대 수출 시장이었던 중국이 증설을 단행하면서 국내에서 생산한 물량은 갈 곳을 잃었다. 생산 효율화, 정기 보수 등으로 연명하던 석유화학 기업들은 잇달아 비핵심 사업 매각에 나서며 몸집 줄이기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배터리 산업은 글로벌 시장에서 중국의 역할이 가장 큰 영역이 됐다. 에너지 전문 시장조사업체 SNE리서치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기준 중국 업체 6곳이 글로벌 전기차 배터리 점유율 10위 안에 들었다. CATL이 37.9%로 1위, BYD가 17.8%로 2위를 기록했으며 CALB(4위), 고션(7위), EVE(9위), SVOLT(10위)가 뒤를 이었다.한국 배터리 기업의 점유율을 모두 합해도 2위인 BYD를 넘지 못한다. 국내 배터리 3사(LG에너지솔루션, SK온, 삼성SDI)의 글로벌 전기차용 배터리 합산 점유율은 16.4%로 집계됐다. 자국 정부의 지원을 등에 업은 중국 기업들이 저렴한 가격으로 시장을 선점한 결과다.태양광 역시 중국의 힘이 막강하다. 중국 정부가 적극적인 에너지 전환 정책을 펼치면서 자국 기업들의 역량이 빠르게 성장했다. 2024년에는 중국의 풍력 및 태양광 발전 설비 용량이 사상 처음으로 석탄발전 설비 용량을 초과해 에너지 구조 전환의 분기점을 맞이했다. 막대한 자국 수요로 성장한 중국 기업들은 세계 시장으로 눈을 돌리고 있다. 국제에너지기구(IEA)는 중국이 전 세계 태양광 모듈(패널)의 약 85%를 생산하고 있다고 했다. 산업의 위기 원인은 같고 양상도 비슷하다. 값싼 물량이 밀려오고 시장 수요가 줄며 기업은 궁지에 몰린다. 몇 년 전, 다른 산업에서도 이미 본 장면이다. 해법은 우리 안에 있다. 정부는 무분별한 가격 덤핑에 대응할 무역구제 조치와 원자재·에너지 가격 안정, 산업 전환기에 필요한 세제·금융 지원을 서둘러야 한다. 기업은 범용 대신 고부가, 모방 대신 창조로 승부해야 한다. 무엇보다 산업 전환을 이끌 인재를 길러야 한다.중국발 저가 공습의 무대는 앞으로도 계속 열릴 것이다. 그러나 그 무대에서 우리가 같은 대사를 반복할지, 아니면 전혀 다른 결말을 써 내려갈지는 우리의 선택에 달렸다. 연극은 계속되지만 결말은 우리가 바꿀 수 있다.
[기자수첩] '코스피 5000의 환상'…한국 경제의 불편한 진실
빵을 구워본 사람은 안다. 반죽이 완성됐다고 곧바로 오븐에 넣으면 실패한다는 것을. 밀가루와 물, 이스트가 만나 제맛을 내려면 온도와 습도를 맞추고 충분한 발효의 시간을 거쳐야 한다. 이 과정을 건너뛰면 겉은 부풀어도 속은 덜 익은 빵이 된다.최근 한국 증시를 보면 겉만 부풀고 속은 덜 익은 빵이 떠오른다. 이재명 정부가 '코스피 5000 시대'를 공약으로 내걸자 증시 안팎에 기대감이 번졌다. 인공지능(AI), 조선, 방산 등의 테마가 주가를 밀어올리고 외국인 자금도 다시 한국으로 회귀하는 듯한 흐름을 보였다. 오븐 속 빵이 그렇듯 겉이 부풀었다고 속까지 잘 익었다는 보장은 없다. 기업의 실적과 생산성, 투자 환경은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 한국의 시간당 노동생산성은 50.99달러로 OECD 최하위권에 머물렀다. 설비투자는 4개월 연속 감소하며 경기 회복 흐름은 불안정성을 드러냈다. 산업 현장 곳곳에서는 "미래 먹거리가 보이지 않는다"는 우려가 나온다. 대외 환경도 녹록지 않다. 최근 한미 무역 협상에서 불거진 관세 문제는 미국의 자국 중심 정책이 여전히 견고함을 보여준다. 미국은 자국 산업 보호를 위해 관세를 전략적으로 활용하고 있으며 그 결과 한국 기업들이 자유무역협정(FTA) 발효 이후 누려온 무관세·저관세 혜택이 축소되고 있다. 반도체와 전기차 배터리 같은 핵심 수출 산업에서 이러한 변화는 더욱 뚜렷하다. 미국은 '인플레이션 감축법'(IRA)과 '반도체 지원법'(CHIPS Act)을 통해 생산과 고용을 자국 내로 끌어들이고 있다. 한국 기업이 미국 시장에서 경쟁력을 유지하려면 막대한 현지 투자와 생산설비 이전이 불가피해졌다. 이 과정에서 기술과 자본이 외부로 빠져나가고 국내 산업 생태계가 약화될 수 있다. 국내 기업 경영 환경 역시 갈수록 악화되고 있다. 법인세 인상을 비롯해 8월 임시국회에서 처리가 예고되는 상법 개정안과 노란봉투법 등 잇따른 규제 입법은 기업의 의사결정 속도를 늦추고 경영 불확실성을 확대한다. 상법 개정안의 집중투표제 의무화, 감사위원 분리선출 등은 경영권 방어 장치를 약화시키고 노란봉투법은 노사 분쟁에서 사용자 부담을 높인다. 결국 지금은 대외·대내 환경이 동시에 기업 활동을 제약하는 상황이다. 글로벌 공급망 재편, 보호무역 확산, 국내 규제 강화라는 삼중고 속에서 한국 기업들이 과연 '코스피 5000' 시대를 견인할 만큼의 체력을 유지할 수 있을지 의문스럽다. 빵을 제대로 만들려면 밀가루와 물, 이스트, 온도와 발효의 시간까지 모두 맞아야 한다. 하나라도 빠지면 겉만 그럴듯하다가 식은 뒤 주저앉는다. 증시도 마찬가지다. 실물경제와 제도 개혁이라는 속 재료가 받쳐주지 않으면 오래가지 못한다.진정한 체질 개선 없이 한국 경제를 낙관하는 건 환상에 불과하다. 중요한 것은 눈앞에 보이는 부풀어 오른 그래프가 아니라 그 그래프를 떠받칠 탄탄한 토대다. 지금 진짜 놓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불편한 진실을 묻는 용기가 필요하다.
[기자수첩] 남탓만 하는 카드사의 스테이블코인 늦장 대응
"대세라고 하니 급하게 준비를 하긴 해야 하는데 이해관계가 얽혀 우왕좌왕하는 모습입니다" 금융당국 관계자가 전날 개최된 카드업계의 스테이블코인 대응 회의와 관련해 한 말이다.카드업계가 그동안 미온적인 모습으로 일관하다 이재명 대통령의 공약인 스테이블코인 도입 논의가 본격화하자 뒤늦게 부랴부랴 대책 마련에 나섰다는 얘기다.지난 30일 오후 서울 중구 다동 여신금융협회 회의실. 김은조 여신협회 전무를 비롯해 신한·삼성·KB국민·하나·현대·롯데·우리·비씨카드 등 8개 카드사 디지털 부문 임원들이 마주 앉았다.회의는 당초 계획에 없었지만 최근 일부 회원사에서 필요성을 제기해 급하게 마련된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급하게 준비된 탓인지 스테이블코인을 전담하는 부서가 없는 카드사는 TF(태스크포스) 회의에 영업부서 임원이 참석하는 등 혼란스러운 모습도 보였다. 이날 회의에 참석한 한 관계자는 "자리가 급히 마련된 것으로 안다"며 "그래서인지 현장에서 구체적으로 논의된 사항은 없다"고 전했다.새로운 결제 시장에 대한 카드업계의 어설픈 대응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지난해 여신협회와 카드사들은 카카오 토스 네이버페이 등 간편결제사의 공세에 맞서 QR결제 규격 표준화 서비스를 추진했다. 서비스는 카드사마다 다른 QR코드 규격을 통합한 게 핵심으로 해당 QR규격이 적용된 가맹점도 함께 확보하고자 했다. 하지만 출범 1년이 지난 현재 여신협회는 서비스 가맹점 수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A카드사 앱에 B카드사의 카드를 등록해 결제할 수 있도록 한 '오픈페이' 역시 마찬가지다. 애플페이 상륙과 빅테크의 공세에 맞서 카드업계가 띄운 연합전선이었지만 낮은 인지도와 지지부진한 성과는 존재감을 희미하게 만들었다. 업계 한 관계자는 "오픈페이를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느냐"며 씁쓸한 현실을 꼬집었다.스테이블코인은 달러나 원화 같은 실물 자산에 연동돼 가격이 안정적인 암호화폐다. 현재 소비자가 가맹점에서 POS(포스)단말기로 결제하면 VAN(부가통신사업자)사가 카드사에 결제 정보를 전달하는 구조지만 스테이블코인을 사용할 경우 소비자가 코인을 가맹점에 바로 전송해 실시간 정산이 가능해진다.결제 가맹점 수수료를 기반으로 수익을 내온 카드사 입장에선 생존 방식 자체가 흔들릴 수 있는 변화다. 미국에서는 스테이블코인 논의가 본격화되면서 비자, 마스터카드의 주가가 흔들린 바 있다.카드사들은 가맹점 수수료 인하 압박, 금융당국 규제 강화 등 외부 악재에 실적이 악화일로라고 항변한다. 하지만 세상의 변화에 대응은 늘 늦었고, 실행력은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카드업계가 결제 생태계의 중심에서 밀려나는 게 과연 외부의 문제일까. 변화의 속도는 점점 더 빨라지고 있다. 제때에 노를 들지 않으면 떠내려가는 건 시간문제다.
[기자수첩] STO 법안, 방치하다 '골든타임' 놓친다
STO(토큰증권) 법안 논의가 국회에서 또 지연됐다. 지난 21일 열린 정무위 법안심사제1소위원회에서 안건으로 오르며 관련 업계 기대감을 키웠으나 다뤄지지 못했다. 여야 대립, 의견 충돌 때문이 아니라 '시간이 없어서'였다. 2년 전 금융위원회가 '토큰증권의 발행 및 유통 체계 정비 방안'을 발표한 후, 그 해 21대 국회에서 '전자증권법 및 자본시장법 개정안'이 발의됐다. 하지만 지난해 5월 국회 임기 만료에 따라 법안이 자동 폐기됐다. 22대 국회가 열리면서 지난해 10월 전자증권 및 자본시장법 개정안이 발의돼 현재까지 미뤄진 상황이다.STO 법안은 드물게 여야, 정부, 업계 모두 혁신 과제로 인정하는 사안이다. 하지만 '앞순위 법안 논의 지연'이라는 행정적 사유로 심사가 밀렸다. 빨라야 다음 달에 다시 논의될 수 있으나 이 또한 확언할 수는 없다. 국회는 디지털 금융 패권 경쟁을 강조하면서도 정작 입법의 첫 단추를 끼우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업계에선 여전히 희망을 접지 않는다. 논의 순번만 미뤄졌을 뿐 법안 자체에 대한 여야 간 이견은 없어서다. 업계는 법안이 통과하는 즉시 관련 업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시스템 준비를 마쳤다. 한국예탁결제원은 지난달 '토큰증권 테스트베드 플랫폼'을 발표했다. STO 법제화에 대비한, 투자자 보호를 위한 시스템이다. 증권사, 조각투자사업자 등 업계는 STO 관련 업무 대비를 마무리한지 오래다. 이번 미국과 한국의 입법 과정을 지켜보며 각국이 혁신 과제를 입법화하는 속도에서 뚜렷한 차이가 있음을 체감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지난 18일(현지시각) 달러 기반 스테이블코인을 제도권 내에서 규정하는 'GENIUS Act'(지니어스 법안)에 서명했다. 해당 법안은 불과 지난달 발의돼 같은 달 상원을 통과하고, 이어 17일 하원에서도 통과되며 단기간 내 입법 절차를 마쳤다. 단 한 달만에 통과된 미국의 사례는 한국의 STO 법안이 처한 상황을 돌아보게 만든다. 국가마다 입법 시스템은 다를 수 있으나, 정치 대응 속도는 비교하지 않을 수 없다. STO 법안의 미비로 시장의 기대와 현실 사이의 간극은 점점 커지고 있다. STO가 디지털자산 법제화의 마중물이 될 것이라는 전망은 유효하다. 그러나 발목을 잡는 건 행정적 일정이다. 여야 합의만큼 중요한 건 '집행력'이다. 법안의 당위성은 충분하다. 업계의 바람대로 통과가 조속히 이뤄지길 기대한다.
[기자수첩] 수장 공백 길어지는 금융당국… 혼란 속 시장은 '스톱'
"상황이 어떻게 될 지 모르니 아무것도 못 하고 있어요. 여름휴가 일정조차도 확정하지 못하는 상황입니다."길어지는 금융당국 수장 공백 상태에 대한 한 관계자의 하소연이다. 금융당국 수장 공백이 길어지면서 사실상 모든 현안이 '올-스톱' 된 데 따른 불편을 토로한 것.김병환 금융위원장은 지난 대선 직후 사의를 표명했지만 후임자 지명이 이뤄지지 않으면서 사실상 유임 상태로 업무를 이어가고 있다. 금융위원회 부위원장 자리는 지난 5월 퇴임한 김소영 전 금융위원회 부위원장이 퇴임한 이후 두 달가량 공석이다. 금융감독원장 자리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지난 6월 이복현 전 금감원장이 퇴임한 이후 후보자만 거론될 뿐 공식 발표는 계속 미뤄지고 있다.최근 국내 시장은 국내외 거시경제적인 상황들로 불안정한 국면에 놓여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금융위원장과 금융감독원장이라는 양대 컨트롤타워의 공백이 장기화한 점은 그 자체로 '리스크'다. 그 사이 시장 불확실성은 커지고, 금융 현안도 쌓이고 있다. 글로벌 금융시장은 고금리와 고물가 충격 여파 속에서 휘청이고 있고 미국 정부의 관세 압박도 이어지며 증시 변동성이 확대되는 상황이다. 내부 상황 역시 핀테크 규제 정비, 스테이블코인 법제화, 프로젝트파이낸싱(PF) 부실점검, 은행 자본규제 개편까지 긴급한 국내 현안이 산적해 있다. 그러나 이런 시점에 수장이 부재하고 국장급 실무진이 임시방편으로 대응 중이라는 상황은 불안함을 가중하는 부분이다. 현재 금융정책은 대통령실 경제수석실이 기획 틀을 짜고, 금융위원회가 제도·규제 정비를 설계, 금융감독원이 시장 집행과 감독을 담당하는 삼각형 구조다. 하지만 이 중 두 축이 동시에 공석이라는 건 단순히 자리가 비었다는 차원이 아닌, 시장을 설계하고 조율할 컨트롤타워 자체가 비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에 업계도 '정지 모드'다. 은행, 증권, 핀테크, 보험업계 모두 핵심 정책의 방향이 불분명한 상황에서 섣불리 움직이기 어렵다는 분위기다. 한 증권업계 관계자는 "향후 규제나 완화 방안이 전혀 감도 오지 않는 상황"이라며 "규제 변화가 불확실한 상황에서 섣불리 신사업이나 전략 등을 추진할 수 없어 일단정지 상태"라고 말했다. 이처럼 수장 공백은 단순히 행정적인 차원을 넘어, 금융시장 전체의 '정지 신호'로 작용하고 있다. 움직이지 못하는 정부 아래에서 시장도 함께 멈춰 선 셈이다.정부가 금융당국 조직개편을 추진한다는 얘기도 나오며 금융권의 혼란을 가중하고 있다. 국정기획위원회는 금융정책 기능을 기획재정부로 이관하고 금융감독 기능은 금감원에 일원화해 '금융감독위원회' 체제를 부활시키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금융소비자 보호 기능을 분리해 '금융소비자보호원(금소원)'을 신설하는 방안도 거론된다. 아직 공식 안도 아니고 구체적인 실행 일정도 없지만 해당 내용은 금융권에서 거론되는 것은 물론 언론에도 보도되며 혼란을 더한다.핵심 컨트롤타워가 멈춰 선 금융시장은 방향을 잃었다. 금융소비자 보호도, 자본시장 혁신도, 디지털금융 정책도 수장의 공백 속에서 설 자리를 잃고 있다.이에 "유임이든 교체든 빨리 정해라"는 업계의 목소리가 나온다. 정책의 공백은 결국 시장의 혼돈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과 금융소비자의 몫이 된다. 정부가 원하는 금융 정책을 실현할 인물을 하루 빨리 발굴, 임명함으로써 시장의 신뢰를 회복해야 할 때다.
[기자수첩] '이재명표 바이오' 방향은 옳다… 관건은 '속도'
"인도나 태국 등이 제3국에 많은 투자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누릴 수 있는 시간이 길지 않아요. 3년에서 5년이면 많이 간 것입니다. 그 전에 우리나라 기업들이 글로벌화 돼야 하고 정책적 지원도 글로벌 관점에서 필요합니다."이승규 한국바이오협회 부회장이 지난달 미국 보스턴에서 진행된 바이오USA에서 언급한 내용이다. 지금까지 국내 기업들이 '팔로워'로서 성과를 냈으나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어내는 '퍼스트 무버'로서의 면모는 부족하다는 우려가 섞여 있다.이번 바이오USA의 화두는 중국을 비롯한 후발국의 약진이 두드러진다는 점이었다. 중국 기업들은 대부분 지난해 바이오USA에 참가하지 않았으나 올해는 중국관을 운영하며 존재감을 드러냈다. 한국 바이오산업이 3~5년 안에 의미 있는 발전을 이루지 못하면 글로벌 경쟁에서 뒤처질 수 있다는 걱정이 나온 배경이다.이 부회장은 "옛날에는 중국의 기술을 의심했는데 이제는 그런 것 같지 않다"며 "중국을 무시하지 못하겠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노연홍 한국제약바이오협회 회장 역시 "신약 파이프라인 숫자 등 중국 기업들이 활동하는 역량을 보면 결코 무시할 수 없는 파트너"라고 평가했다.국내 기업이 글로벌 무대에서 영향력을 키우기 위해서는 정부의 적절하고 신속한 정책적 지원이 필요하다. 업계는 이재명 대통령에게 희망을 걸고 있다. 이 대통령이 대선 후보 시절 내세운 제약·바이오 공약의 방향이 옳다고 판단하면서도 빠른 지원이 필요하다고 업계 관계자들은 입을 모았다. 후발국에 추월당하지 않기 위해 '지원 골든타임'을 사수해야 한다는 시각이다.이 대통령은 후보 시절 원료의약품 자립을 공약으로 내세웠다. 중국과 인도에 대한 원료의약품 의존도가 높은 만큼 과거 요소수 사태와 유사한 의약품 대란이 발생할 수 있다는 업계 우려를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기업활동을 보장하기 위해 규제를 네거티브 중심으로 바꾸겠다는 이 대통령의 발언도 업계에서 환영받는다. 규정되지 않은 내용에 대한 규제가 사라지면 신약개발을 보다 자유롭고 빠르게 할 수 있어서다. 이 밖에 R&D(연구·개발) 투자시스템 구축, R&D 투자비율 연동형 약가보상체계 구축 등의 공약도 긍정적인 평가다.관건은 지원이 얼마나 빠르게 이뤄지는지다. 제약·바이오산업은 반도체, AI(인공지능) 등 핵심산업과 견줬을 때 비교적 관심이 떨어지는 게 사실이다. 반도체와 AI가 각각 대한민국의 핵심 산업 및 미래 먹거리인 만큼 제약·바이오산업은 투자 우선순위에서 밀릴 가능성이 크다. 국내 제약·바이오 기업들이 활약할 수 있는 제도적 기반이 늦게 마련될수록 후발국과의 격차는 좁혀지고 선두 주자와의 경쟁은 힘들어질 전망이다.이 부회장은 "제약·바이오산업은 이번 정부에서 키우려는 산업 톱5에 분명히 들어간다"며 "이번 정부에 기대감을 걸고 있다"고 말했다. 이 부회장을 비롯한 제약·바이오업계 관계자들이 만족할 수 있는 정부의 확실한 지원책이 '빠르게' 마련되길 기대를 걸어본다.
[기자수첩]게임업계에 필요한 성장방정식
2022년 치열했던 20대 대통령 선거는 2030세대를 공략하기 위한 게임 공약이 봇물을 이뤘다. 여당과 제1야당을 가릴 것 없이 게이머 친화적인 약속을 연이어 발표했다. 3년 뒤 치러진 이번 21대 대선은 달랐다. 12.3 계엄 사태로 급박하게 치러진 점을 감안하더라도 정책 대결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그나마 더불어민주당 게임정책특별위원회의 움직임이 눈길을 끌었다. '게임은 문화'라는 인식 아래 게임업계의 목소리를 반영한 정책들을 구상했지만 한 걸음 더 나가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과열되는 콘텐츠 경쟁 속 위기를 타파할 과감한 규제 혁파가 절실하다. 게임은 한국을 대표하는 콘텐츠 산업으로 자리매김한 지 오래다. 한국콘텐츠진흥원 '2024 대한민국 게임백서'를 보면 2023년 국내 게임 시장 매출 규모는 전년보다 3.4% 오른 23조원이다. 지난해엔 국내 게임 시장 규모가 25조원을 넘어섰을 것으로 보이는데 K-POP과 한류 열풍을 잇는 K-콘텐츠의 한 축으로서 손색이 없다. 현실은 게임은 '질병이 아니다'라는 해명을 입에 달고 살아야 하는 처지다. 진짜 산업으로 대우받고 있는지 의문이다. 대선마다 등장하는 단골손님처럼 정치권은 청년층 공약으로 '게임 진흥'을 외치지만 제자리만 맴돈다. 이재명 대통령은 세계보건기구(WHO)의 게임 중독 질병 코드 지정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 게임 유저들의 불만이 높은 거버넌스 개혁도 추진할 뜻을 밝혔다. 한국이 명실상부한 e스포츠 강국으로 자리매김하는 데 힘을 쏟겠다는 의지가 읽힌다. 단순한 여가활동이 아니라 문화와 스포츠의 영역이 될 수 있음을 시사한 것이다. 게임업계의 목소리를 반영한 것이지만 아쉽게도 이번 대선에선 공약 수준이 아닌 당 차원의 정책 제안에 그쳤다. 게임업계는 항상 줄타기를 한다. 2021년부터 둔화된 성장세는 회복이 어려운 상황이고 신작 흥행은 일부 게임사를 제외하면 손에 꼽을 정도다. '대작' 하나에 수백억 원이 투입되는 시대에 개발비는 늘었지만 성공 가능성은 줄었다. 넥슨과 크래프톤 같은 자본 여력이 있는 기업을 제외하면 대다수 게임사는 퍼블리싱이나 IP(지식재산) 위탁 형태로 버틴다. 올해 1분기 상장 게임사 실적만 봐도 알 수 있다. 컴투스, 위메이드, 펄어비스 등 다수가 부진한 성적표를 받았다. 대안으로 떠오르는 키워드는 '블록체인'이다. 일명 P2E(Play to Earn·돈 버는 게임)로 가상자산을 통해 보상을 주고 게임 안에서 수익을 창출할 수 있도록 설계된 시스템이다. 다행히 한국 게임사들의 경쟁력이 상당하다. 위메이드 '미르4' 글로벌 버전은 대표적인 성공 사례다. 동남아, 중남미 등 신흥시장에서 큰 반향을 얻고 있고 컴투스, 네오위즈도 관련 생태계를 구축하며 속도를 내고 있다. 게임업계 맏형 넥슨까지 최근 메이플스토리에 블록체인을 가미했고 코인 '넥스페이스'를 발행했다. 앞서가는 게임 기업 역량과 다르게 국내 시장은 얼어붙어 있다. 도박이라는 인식이 강한 탓에 P2E의 인게임 이코노미는 구현이 불가능하다. 전 세계가 블록체인 기술을 도입해 게임 산업을 확장하는데 한국만 '금지'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P2E 자체를 부정적 이미지로만 재단하는 태도는 문제다. 새로운 산업은 규제보다 '성장의 논리'로 접근해야 한다. 김남국 전 의원 사건은 무죄 수순으로 가고 있고 김 전 의원은 이재명 정부의 국민디지털소통비서관으로 선임됐다. 민주당 역시 과거의 과도한 공포감을 떨쳐버려야 한다. 김남국 사태 이후 여론이 악화된 것은 사실이나 기술 자체까지 부정해선 안 된다. 이재명 정부는 과거와 다른 선택을 하길 바란다. 과거 리니지와 던전앤파이터, 배틀그라운드의 성공처럼 블록체인 기반 게임이 그들의 역할을 대신할 수 있다. 산업 시계는 기다려주지 않는다. P2E나 웹3, NFT(대체불가토큰)와 같은 영역은 세계 각국이 주도권 싸움을 벌이는 전장이다. 국내 게임사가 규제의 장벽을 넘지 못하고 경쟁에서 밀린다면 기회는 외국 자본 손에 돌아갈 것이다. 대선 후보 시절 이 대통령은 산업의 '새로운 성장방식'을 강조했다. 말이 아닌 행동으로 보여줄 차례다.
[기자수첩] '산업의 쌀' 철강 멈추다
한국 제조업의 근간인 '철강산업'이 벼랑 끝에 몰렸다. 지난해 포스코가 포항제철소 1제강·1선재 공장을 폐쇄한 데 이어 최근 현대제철과 동국제강도 철근공장을 멈췄다. 현대제철과 동국제강이 철근 생산라인을 전면 중단한 것은 창사 이래 처음이다.철강산업의 부진은 수요 침체와 중국산 공세 때문이다. 국내 철근 수요는 급감한 반면 중국산 저가 철강재는 무차별적으로 밀려들고 있다. 가격이 지나치게 낮아 정상적인 경쟁이 불가능하다. 일시적인 침체가 아닌 구조적이고 장기적인 위기로 이어질 수 있어 상황이 심각하다. 미국의 통상 압박도 위기를 키운다. 지난 3월 미국은 한국 철강에 무관세 수입쿼터를 폐지하고 25% 관세를 부과했다. 이달부터는 관세율을 50%까지 올릴 방침이다. 글로벌 고금리, 중국 부동산 침체까지 겹치면서 철강 수요는 바닥을 모르고 떨어지고 있다. 철강 수요 감소는 철강업만의 문제가 아니다. 철강은 자동차, 조선, 건설, 기계 등 주력 제조업의 기반이다. 철강이 흔들리면 산업 전반이 영향을 받는다. 수출 경쟁력이 악화하고 생산라인이 멈추며 일자리가 줄어드는 연쇄 반응이 이어진다. 철강산업의 위기는 곧 대한민국 제조업 전반의 경쟁력 저하로 직결된다. 철강산업은 현재 방향을 잃은 채 표류하고 있다. 시장 상황은 급변했지만 정부 정책은 과거 틀에 머물러 있다. 철강을 살릴 포괄적이고 체계적인 대책이 시급하다.가장 중요한 것은 한국 철강의 생태계를 지키는 일이다. 중국산 저가재가 무방비로 유입되는 구조를 방치하면 국내 철강업계는 버티기 어렵다. 미국이나 유럽연합(EU)처럼 환경 기준, 품질 인증 등 합리적인 비관세 장벽을 활용해 수입 규제를 정비해야 한다. 싼 가격에 저품질 철강재가 쏟아지면 피해는 기업을 넘어 소비자, 국가경제로 확산된다. 공정한 경쟁 질서를 위한 최소한의 조치다.에너지 정책도 재설계해야 한다. 고로(용광로) 중심이던 철강 생산이 전기로 방식으로 옮겨가는 것은 탄소중립 시대에 발맞춘 행보다. 전기요금 급등으로 전기로 제강사들의 부담은 눈덩이처럼 커지고 있다. 한 푼이라도 줄이기 위해 동국제강은 이례적으로 야간 조업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현행 전기요금 체계는 예측 가능성, 안정성도 부족하다. 요금이 급등락을 반복하면 기업은 장기 투자를 계획할 수 없다. 전기료를 낮춰 달라는 것이 아니다. 철강업계가 계획을 세울 수 있는 예측 가능한 시스템이 필요하다. 친환경 전환을 위한 투자 지원은 선택 아닌 필수다.위기 속에서 한국 철강은 새로운 대통령을 경제 수장으로 맞았다. 국가 운영의 방향타를 새로 쥔 정부는 철강산업부터 다시 바라봐야 한다. 말로 만든 정책은 기대를 낳지만 실행된 정책은 산업을 살린다. 골든타임을 놓치면 더 이상 방법은 없다.
[기자수첩] 대선후보 한마디에 오락가락… 방향성 잃은 한국 증시
"보여주기식 정책만으로 국내 증시는 성장할 수 없습니다."금융투자업계의 한 관계자는 혼란스러운 국내 증시 상황에 대해 우려를 표하며 이같이 말했다. 국내 증시의 장기적인 성장을 위해서는 당장 눈앞의 문제만 해결하는 방법이 아닌 기본적인 성장 토대를 단단히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다.최근 국내 증시는 체력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다. 현재 경기 불안과 국내 기업들의 실적 부진 등으로 국내 주식 시장은 상승 동력을 잃은 상태다. 전체적인 흐름은 박스권에 갇혔는데 대선 후보 이슈에 특정 종목 주가가 널뛰기하는 형국이다. 이렇다 할 증시 주도주가 보이지 않으니 목이 마른 투자자들은 일시적으로 반짝 상승하는 정치 테마주에 몰리게 되는 상황이다. 오는 6월3일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대권 주자들의 말 한마디에 관련 종목들이 급등락을 반복하는 것도 이러한 문제점을 명확하게 드러낸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가 지난 4일 자신의 SNS를 통해 골목상권 활성화를 위해 지역화폐와 온누리 상품권을 확대하겠다고 말하자 지난 7일 지역화폐 관련주 웹케시와 코나아이 등은 일제히 상한가를 기록했다. 테마주도 난립하고 있다. 7일 김문수 국민의힘 대선 후보와 한덕수 전 국무총리가 단일화를 논의한다는 소식에 평화홀딩스 등 김 후보 관련 테마주가 상한가를 기록했다. 평화홀딩스는 계열사 피엔디티가 김 후보 고향인 경북 영천에 공장을 보유하고 있으며, 김종석 평화홀딩스 회장이 김 후보와 같은 경주 김씨라는 이유로 김문수 테마주로 분류된다.증시 부진이 지속될수록 이 같은 현상은 더욱 심화하는 모양새다. 기댈 곳 없는 투자자들의 마음을 공략하기 위해 대선후보들은 일제히 국내 증시 활성화를 공약으로 내걸고 있다. 이재명 후보는 주식시장을 활성화해 코스피 5000시대를 열겠다고 주장했다. 김문수 후보는 'K-자본시장 선진화'를 전면에 내세우며 자본시장에 대한 국제적 신뢰 회복을 핵심 과제로 제시했다. 증시 부양 공약은 역대 대통령 선거마다 등장했지만 이렇다 할 결과물 없이 흐지부지되기 일쑤였다. 앞서 윤석열 정부에서 추진했던 '코리아 밸류업' 정책은 정치적 리스크 속에서 동력을 잃고 이제는 언급조차 되지 않는다. 문재인 정부에서 자본시장 선진화 방안으로 도입했던 금융투자소득세는 내년부터 시행될 예정이었지만 시장과 투자자들의 반대에 폐지가 공식화됐다.이 같은 흐름은 더 이상 반복돼선 안 된다. 지난해 12월 기준 국내 개인투자자 수는 1410만명으로 집계됐다. 투자 인구는 점점 늘어나는 반면 국내 증시 수준은 우왕좌왕하는 정부 정책 속에 제자리에 머물러있다.대권주자들도 증시 혼란을 가중하기만 하는 '보여주기식 공약'은 이제 그만해야 한다. 국내 증시의 근본적인 문제점으로 꼽히는 국내 경제의 구조적 취약성, 코리아 디스카운트, 시장 신뢰성 등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현실적인 방향성을 제시해야 한다. 앞선 사례를 봤을 때 정치적 이슈에 휘둘리는 정책이 아닌 중장기적으로 실행될 수 있는 방법이어야 하는 것도 필수다. 증시 부양을 누구보다 바라는 건 1400만 개인 투자자들이다. 보여주기식 표심 잡기가 아닌 장기적인 증시 부양과 성장을 바라는 간절한 투자자들의 마음이 대선 후보들의 공약에 담길 수 있기를 바란다.
[기자수첩] '안갯속' K바이오 컨트롤타워
"탄핵 정국을 거치면서 투자를 유치하기 어려워졌어요. 국내 정치 상황이 안정되면 그때 지갑을 열겠다는 투자자들이 많아지는 분위기입니다. 12·3 비상계엄과 탄핵 정국을 거치면서 정부도 제 역할을 못 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죠. 기대를 모았던 국가바이오위원회는 사실상 유명무실해졌지 않습니까?"최근 만난 한 바이오 벤처 대표의 푸념이다. 기술 개발과 사업 안정화를 위해선 투자 유치가 절실한데 계획대로 되지 않고 있다고 한다. 정부의 도움은 사실상 기대하지 않는 눈치다. 해외 업체와 추진하고 있는 기술이전 계약이 체결되기만을 바란다는 그의 눈빛엔 성과 창출에 대한 기대감과 우려가 섞여 있었다.투자 유치만 어려운 게 아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관세 정책이 본격화하면서 국내 기업들의 해외 사업에 차질이 생기는 것 아니냔 걱정도 잇따른다. 트럼프 대통령은 의약품에 관세를 매기겠다고 수차례 공언했다. 미·중 갈등이 본격화하는 상황에서 중국 기업에만 의약품 관세를 물린다는 관측이 나오지만 아직은 희망사항에 가깝다. 미국 상무부는 의약품 관세 부과를 위해 사전 조사에 착수한 상태다.관세 영향권에 있는 국내 제약·바이오 회사들은 자체적으로 대응책을 마련했다. 셀트리온은 올해 미국에서 판매 예정인 제품에 대해 지난 1월 말 기준 9개월분의 재고를 확보해 관세 영향을 최소화했다. SK바이오팜은 미국 식품의약국(FDA) 승인을 받은 미국 내 CMO(위탁생산) 시설을 미리 확보하고 필요에 따라 즉시 생산할 수 있는 체계를 마련했다. 두 회사 모두 대응책 마련 과정에서 정부 도움은 없었던 것으로 알려졌다.제약·바이오 사업 환경이 변하는 상황에서 정부 컨트롤타워인 '국가바이오위원회'는 되레 영향력 축소 우려를 받고 있다. 12·3 비상계엄 사태와 탄핵 정국, 조기 대선 일정 시작 등으로 인해 국가바이오위원회가 출범 초기부터 힘을 잃고 있다고 업계 관계자들은 입을 모은다.대통령 직속 위원회인 국가바이오위원회는 당초 지난해 말 출범 예정이었으나 12·3 비상계엄 사태를 거치며 계획보다 늦은 올 1월 출범했다. 불안한 출범과 함께 1차 회의를 진행한 뒤 약 3개월이 지난 지금까지 2차 회의를 진행하지 않았다. 앞으로 잡힌 회의 계획도 아직 없다. 국가바이오위원회 관계자는 "회의 안건을 준비하고는 있으나 향후 어떻게 진행될지 공식적으로 이야기할 수 없다"고 말을 아꼈다.국가바이오위원회 수장이 계속해서 바뀌는 점도 우려 사항이다. 정책의 연속성은 물론 지원 동력에 문제가 생길 가능성이 크다. 국가바이오위원회는 출범 당시 최상목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위원장 역할을 맡았다. 이후엔 한덕수 국무총리가 위원장 역할을 대신했다. 대통령이 공석인 상황에서 두 사람이 권한대행을 맡았기 때문이다. 대선 이후에는 새로운 대통령이 위원장을 맡는다.국내 제약·바이오업계의 현 상황을 설명하는 사자성어로 '암중모색'(暗中摸索)이 적절해 보인다. 어둠 속 손을 더듬어 물건을 찾는다는 의미다. 막연한 상황에서 해법을 찾아 나가는 기업들의 모습과 겹친다. 기업들이 혼란한 상황 속에서 방향을 잡고 사업을 이끌어 가기 위해서는 정부 도움이 절실하다. 어렵게 출범한 국가바이오위원회가 제 역할을 하고 어둠 속 빛이 돼 기업들이 나아갈 방향을 안내해주길 바란다.
[기자수첩] 혼돈의 트럼프시대, '노인과 빈공장'만 남을 한국
도널드 트럼프이 내건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드는 핵심은 '리쇼어링'이다. 무역적자를 명목으로 전세계를 겨눈 관세 총구도 미국 제조업의 부활을 겨냥하고 있다. 2010년대부터 시작된 제조 외주화가 '팍스 아메리카나'에 대한 도전을 불러왔다는 것이 미국의 생각이다. 미국을 시작으로 유럽 등 서구 선진국도 제조업 부활을 외치고 있다. 국내 기업들은 어쩔 수 없이 배터리·자동차를 넘어 국가기간산업인 방위산업조차 해외에 생산기지를 세우고 있다. 기업 입장에서 손해보는 장사는 아니다. 바이든 행정부의 인플레이션감축법(IRA)과 반도체지원법 시행 이후 우리 기업들은 미국 현지 생산 확대를 통해 배당·이자 수익을 늘려가고 있다. 2022년 한국 기업들의 미국 현지법인에서 벌어들인 직접투자 소득은 118억달러(16조8409억원)에 달했다. 공장은 해외에 짓고, 이익은 본사로 가져오는 구조다. 외화 유출도 늘었다. 수출로 외화를 벌던 구조는 점차 배당·이자에 의존하는 구조로 전환되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국내 산업 기반의 약화라는 구조적 리스크를 키우고 있다. 문제는 이런 자본화된 경제 구조가 국내 산업과 일자리 기반을 갉아먹는다는 점이다. 생산기지 이전이 늘어나면 일자리는 줄고, 고용 기회가 사라진 지역부터 청년 인구가 빠져나간다. 일자리가 사라진 곳엔 소비도, 투자인력도 남지 않는다. 제조 경제가 무너진 자리에 금융 수익만 남으면 결국 스스로 먹고살 힘을 잃어버린 사회로 전락하게 된다. 이러한 현상은 국내 지방 거점에서 이미 나타나고 있다. 청년 인구 감소는 소비 위축과 투자 감소로 이어지고, 지역 경제는 서서히 활력을 잃어간다. 일자리가 줄면 고용 기회는 더 좁아지고 결국 남아 있는 생산가능인구마저 빠져나간다. 그렇게 남겨진 도시는 고령화와 침체로 허덕인다. '노인과 바다'만 남았다는 별명이 붙은 부산이 대표적인 사례다. 한때 '세계 신발 생산 1위 도시'로 불리던 부산은 2000년대 이후 제조업 붕괴와 함께 매년 인구가 줄었다. 청년층 유입률은 광역시 평균(20%)의 절반도 안된다. 올해 3월 기준 부산의 65세 이상 고령인구 비중은 24.3%로 전국 17개 시·도 중에서 가장 높다. 2023년 부산의 1인당 지역내총생산(GRDP)은 약 3476만원으로 전국 17개 시·도 중 15위, 전국 평균(4649만원) 대비 25% 낮다.부산 등 주요 인구감소 지역을 지켜본 전문가들은 제조업 비중이 높을수록 지역 인구가 늘어난다는 통계적 근거를 제시했다. 공장이 많은 지역일수록 사람이 늘어날 가능성이 최대 45%까지 높아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공장이 사라지면 사람이 떠난다는 사실이 숫자로 입증된 셈이다.산업연구원은 보편관세 부과 시 대미 수출 감소로 인해 감소할 국내 자동차 산업의 부가가치 규모는 최대 10조6000억원이라 계산했다. 이는 명목상 손실에 불과하다. 생산량이 감소하고 일자리가 감소하면 지역 소비는 줄어들고 서비스업·자영업은 폐업 위기에 내몰린다. 그 손실을 과연 숫자로 계산할 수 있을까. 미국의 일격에 청년들이 미래에 설 자리는 더 좁아지고 있다. 기업들의 한국탈출을 속수무책으로 지켜보며 더 적게 벌고 포기하는 삶을 배우라는 말 대신 정부가 과연 청년들의 미래를 위해 무엇을 대비했는지 돌아볼 때다. 6월에 새로 들어설 새 정부는 '생산 없는 소득'은 거품이고 '소득없는 성장'은 허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아주길 바란다. 간단하게 숫자를 움직여 청년들을 달랠 시기는 지났다. 한국 경제의 진짜 위기는 숫자 상의 성장 둔화가 아니다. 일할 공장도, 살 집도, 미래도 없는 사회에서 청년이 등을 돌리고 떠나는 나라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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