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노트
[기자노트] 거래소 시간 연장, 누구를 위한 개혁인가
한국거래소가 오는 6월 말 주식거래 시간을 오전 7시부터 저녁 8시까지, 하루 13시간으로 확대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글로벌 경쟁력 강화라는 명분을 내세우고 있으나 증권업계의 반발은 가라앉지 않고 있다. 전국사무금융노동조합은 지난달 두 차례 성명을 통해 "명분 없는 졸속 추진"이라며 강력한 반대 의사를 표명했고 증권사들도 시스템 준비 부족에 대한 우려를 쏟아내고 있다. 이재명 대통령이 '공정한 시장 구축'을 주문했음에도 거래소는 그 해법을 엉뚱하게도 '거래시간 확대'에서 찾고 있는 모습이다.거래소가 서두르는 배경에는 지난해 출범한 대체거래소 넥스트레이드에 대한 경계심 때문이다. 노조 측은 성명에서 "넥스트레이드의 오전 8시 개장으로 인한 거래소의 수익성 악화를 만회하려는 점유율 방어"라고 지적했다. 실제로 넥스트레이드 참여사가 늘어나자 거래소는 한 시간 더 빠른 '7시 개장'이라는 맞불을 놓은 셈이다. 거래 연장 명분으로 '글로벌 스탠다드'를 내세우지만 대표 사례로 꼽히는 미국의 24시간 거래는 동·서부 간 시차 해결이 목적이다. 단일 시간대인 한국에서 새벽 개장과 거래시간 연장이 과연 어떤 효용가치가 있을지 반문하지 않을 수 없다.촉박한 추진 일정 역시 문제다. 거래소는 3월 중순까지 시스템 개발을 완료하고 모의시장을 운영할 계획이지만 실제 개발 기간은 2~3개월에 불과하다. 증권사들이 HTS와 MTS 등 모든 채널을 전면 개편해야 하는 점을 고려하면 물리적인 준비 시간이 턱없이 부족한 상황이다.자금력이 취약한 중소형사들엔 더 가혹한 현실이 기다리고 있다. 수십억원의 비용이 투입된 과거 넥스트레이드 사례를 반추해보면, 이들은 이미 감당하기 버거운 '선택의 기로'에 내몰린 셈이다. 거래소 측은 '자율 참여'라고 선을 긋지만 업계가 선택할 수 있는 폭은 사실상 제한적이다. 초기 15곳에 불과했던 대체거래소 참여사가 치열한 경쟁으로 인해 현재 32곳으로 늘어난 사실이 이를 방증한다. 더 심각한 대목은 감시 체계의 허점이다. 노조는 성명에서 "지금도 인력 부족으로 이상 거래 징후 포착에 한계가 있는 상황에서 감시 시스템 고도화와 인력 충원 없는 새벽 개장은 투기 세력에게 활개 칠 시간만 벌어주는 꼴"이라고 비판했다. 현재도 거래소는 감시 인력 부족으로 이상 거래 징후를 실시간 포착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이런 상황에서 거래 시간을 연장하는 것은 사각지대를 넓혀 개인투자자의 피해를 방치하겠다는 것과 다름없다.대통령이 강조한 시장개혁의 본질은 불공정 거래 척결과 투명성 확보다. 주가 조작과 부실한 상장 심사 등 뿌리 깊은 적폐를 도려내라는 취지였지만 거래소는 이를 '영업시간 연장'으로 오독했다. 시장에 대한 신뢰는 '문을 여는 시간'이 아니라 '규칙의 엄정한 집행'에서 나온다. 서학개미들이 미국 시장을 찾는 이유 역시 긴 거래시간 때문이 아니라 시장 시스템을 믿기 때문이다.따라서 거래소가 진짜 개혁에 나서려면 방향을 바꿔야 한다. 불공정 거래 적발 시스템 강화와 상장 심사 기준 정비가 우선이다. 운영시간을 늘린다고 글로벌 경쟁력이 높아지는 것은 아니다. 현장의 준비 상태를 무시하고 일정부터 못 박는 방식이 과연 시장 선진화로 가는 길인지, 이제라도 거래소는 스스로에게 되물어야 할 때다.
[기자수첩] '소통 강조' 이 대통령, 외면받는 제약업계
"소통과 대화를 복원하고 양보하고 타협하는 정치를 되살리겠습니다."(지난해 6월4일 이재명 대통령 취임사)"산업 현장의 목소리를 외면한 산업 정책은 결코 성공할 수 없습니다."(지난 22일 약가 제도 개편 현장간담회 노연홍 한국제약바이오협회장 발언)이재명 대통령은 소통을 강조하며 임기를 시작했다. 이후 국무회의와 지역 타운홀 미팅을 생중계하는 등 소통 정치를 본격화했으나 정작 제약업계의 목소리는 듣지 않는다는 지적이 잇따른다. 제약산업 경쟁력 약화, 양질의 일자리 축소 등과 직결되는 약가 제도 개편에 대한 업계 우려를 고려하지 않는다는 게 핵심이다.정부는 약가 제도를 개편해 현재 오리지널 의약품의 53.55%인 제네릭(복제약) 약가 산정률을 40%대로 낮출 계획이다. 국민의 약제비 부담을 경감하고 제약사의 신약개발을 독려하겠다는 취지다. 약가 제도는 다음 달 건강보험정책심의위원회 의결을 거쳐 올 하반기 개편될 예정이다.정부의 약가 제도 개편 추진 소식이 들리자 업계는 즉각 반발했다. 제약산업의 근간이 흔들릴 것이란 이유에서다. 정부가 제네릭 약가 인하 취지 중 하나로 내세운 신약개발 투자 역시 되레 위축될 가능성이 크다고 업계는 평가했다.국내 제약사들은 제네릭에서 창출한 수익을 신약개발 R&D(연구·개발)에 투자하는 사업 구조를 갖고 있다. 제네릭 수익이 끊기면 R&D 투자 위축은 불가피하다. 정부의 약가 제도 개편안으로 인한 산업계 매출 축소 규모는 3조6000억원에 달할 전망이다. 한 대형 제약사 관계자는 약가 개편으로 순이익의 20% 정도가 증발할 것으로 내다봤다. 기업 수익이 1% 감소할 경우 R&D 활동은 1.5% 줄어들 것으로 제약업계는 예상한다.약가 제도가 개편되면 양질의 일자리가 감소할 것이란 걱정도 잇따른다. 제약업계 노동자도 약가 제도 개편에 반대하는 배경이다. 제네릭 약가 인하로 기업의 수익성이 꺾일 경우 대규모 구조조정은 불 보듯 뻔하다. 약가 제도 개편 시 산업 전체 종사자 12만명 중 10% 이상이 실직할 전망이다. 한국노동조합총연맹(한국노총) 화학노련 의약·화장품분과는 약가 제도 개편으로 인한 고용불안에 맞선 투쟁을 고려하고 있다.제약업계는 지난해 11월 '약가 제도 개편 비상대책위원회(비대위)'를 꾸리고 약가 제도 개편의 부당함을 호소하고 있으나 정작 정부는 귀를 닫은 모양새다. 언론 기자회견과 현장간담회를 진행해도 정부의 공식적인 반응이 없다. 업계 관계자는 "정부가 이미 답을 정해놓은 것 같지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고 토로했다.이 대통령은 평소 국민 집단지성의 중요성을 강조해 왔다. 바탕은 국민과의 소통이다. "급격하고 전례 없는 규모의 약가 인하가 그대로 시행된다면 전면적 투자 중단은 물론 생산, 연구, 품질관리 등 국내 제약산업 전 부문에서 일자리 감축 사태가 빚어질 것"이라는 비대위의 '의약품 생산 최전선에서 드리는 호소문'에 대해서도 귀를 열길 바란다.
[기자수첩] 국가대표 AI 재공모, 패자부활전 vs 패자낙인전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추진 중인 독자 AI 파운데이션 모델 프로젝트가 흔들리고 있다. 지난 15일 1차 평가 결과를 통해 SK텔레콤, LG, 업스테이지 컨소시엄만 남기고 네이버클라우드와 NC AI 컨소시엄을 탈락시키면서다. 당초 정부는 4강 체제를 전제로 사업을 설계했지만 3강 구도로 급선회했다.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과기정통부가 남은 한 자리를 두고 재공모 절차를 시작하겠다고 밝히면서 혼란은 더 커지고 있다.과기정통부는 네이버클라우드에겐 '독자성' 부분을 지적하며 국가대표 AI의 자리를 허락치 않았고 NC AI에겐 성능 미달을 이유로 들었다. 충격적인 결과를 발표하면서 과기정통부는 남은 한 자리를 두고 패자부활전을 제안했다. 자칫 기회의 문이 열리는 것처럼 들릴 수 있지만 기업들이 받아들이는 현실은 딴판이다. 개인 개발자나 소규모 업체라면 '도전정신'으로 포장할 수 있지만 대기업이나 중견 IT 기업에겐 '독이 든 성배'다. 국책 사업에서 미끄러지는 것은 곧바로 '실패한 기업'이라는 낙인으로 이어진다. AI처럼 기술력과 신뢰도가 브랜드 가치에 직결되는 분야에서는 한 번의 탈락이 갖는 상징성이 가볍지 않다.이미 탈락한 기업들이 난색을 표하는 배경도 여기에 있다. 이미 1차 평가에서 "기준에 미달했다"는 공식 판단을 받은 상황에서 다시 도전하는 것은 성공하더라도 부담이 남고 탈락하면 치명상이 될 수 있다. 두 번 연속 정부 평가에서 떨어진 기업이라는 꼬리표가 붙게 된다. 더 큰 문제는 재공모를 통해 이전보다 진일보한 아이디어가 나올 수 있느냐는 점이다. AI업계는 회의적으로 본다. 앞선 공모를 거치며 국내 주요 기업들은 보유한 기술력과 전략은 대부분 공개했다. 수개월에 걸친 준비 끝에 제출된 제안서들 가운데 우수한 아이디어와 현실적인 방안들은 1차 공모에서 상당 부분 소진됐다. 짧은 시간 안에 기존 제안보다 확연히 앞선 구상이 새롭게 등장하기는 쉽지 않다. 기존에 제출됐던 안을 일부 수정하거나 표현을 바꾸는 수준에 그칠 공산이 크고 이를 두고 '새로운 경쟁'이라고 부르기에는 무리가 있다. 한 차례 탈락했던 기업이 재공모를 통해 통과할 경우 이번에는 또 다른 형태의 공정성 논란이 불거질 수 있다. '처음에는 왜 떨어뜨렸느냐', '재도전에서 기준이 완화된 것 아니냐'는 의문이 뒤따를 수밖에 없다. 애초에 네이버클라우드와 같은 대형 사업자에 대해 조건부 합격이나 보완 기회를 부여하는 방식이 더 합리적이었을 것이라는 시각도 있다. 1차 평가 발표 전 중국산 AI 논란이 커질 때라도 기준을 분명히 밝혔으면 갑자기 달라진 3강 구도에 대한 의구심도 적었을 것이다. 독자 파운데이션 모델은 단기간 성과를 내기 어려운 사업인 만큼 기술력뿐 아니라 장기적인 투자 여력과 운영 역량이 필수적이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일정 수준의 체급을 갖춘 기업들이 대거 이탈한 상태에서 사업이 과연 실질적인 성과를 낼 수 있을지 의문이라는 목소리가 커진다. 현재까진 AI 스타트업 모티프테크놀로지스와 트릴리온랩스만 출사표를 냈다. 이에 재공모 논란은 '패자부활전'이 아니라 '패자낙인전'이라는 표현이 어울린다. 형식적으로는 다시 한 번 기회를 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기업 입장에서는 실패의 기억을 되살리고 추가적인 리스크를 떠안는 선택이기 때문이다. 이는 도전의 장려가 아니라 도전을 주저하게 만드는 구조다. 국책 사업은 무엇보다 예측 가능성과 일관성이 중요하다. 평가 기준이 어떻게 적용되고 탈락 이후 절차가 어떻게 이어지는지 명확해야 기업들도 전략을 세울 수 있다. 이번처럼 계획이 수시로 바뀌고 탈락 이후의 경로가 불투명하다면 향후 과기정통부가 추진하는 다른 국책 사업들 역시 신뢰를 얻기 어려울 수밖에 없다.중요한 사업일수록 국가의 백년대계가 걸린 만큼 잡음이 나와선 안 된다. 이번 독자 AI 파운데이션 모델 사업이 시작부터 '기술 경쟁'이 아닌 '절차 논란'으로 기억될 개연성이 크다. 그 부담은 정책을 믿고 뛰어든 기업들과 장기적인 국가 AI 경쟁력이 짊어져야 할 수 있다.
[기자수첩] 지역 인재 전형, 공기업 경쟁력 떨어뜨렸다
지역균형발전을 목적으로 도입된 공공기관의 지역인재 의무채용 제도가 대학 내 카르텔을 고착화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혁신도시로 이전한 기관들이 지역 대학 출신의 비율을 맞추는 과정에 인재풀은 더 좁아지고 특정 대학 중심으로 채용 쏠림 현상마저 심화돼 제도의 취지가 왜곡되고 있다.2018년 도입된 지역인재 의무채용은 지방에 양질의 일자리를 공급하는 지역균형발전을 목표로 설계됐다. 국토교통부 산하 한국토지주택공사(LH)·한국국토정보공사(LX)·한국도로공사·주택도시보증공사(HUG)·한국부동산원 등 주요 공공기관은 2022년까지 신규 채용의 30% 이상을, 이후에는 법 개정으로 35% 이상을 지역인재로 뽑아야 한다.LH의 지역인재 채용률은 2018년 19%→2020년 24%→2022년 35%→2024년 33% 등으로 증가세를 보였다. 한국도로공사와 LX도 해당 비율이 2018년 20% 미만에서 2024년 30% 이상으로 늘었다. 부산에 위치한 HUG는 30% 이상을 유지했고 부동산원은 2024년 기준 50%를 기록했다. 겉으로 드러난 지역인재 채용 달성률의 이면에 다양성의 붕괴라는 새로운 문제가 드러났다. 전문성 확보의 어려움, 지역 간 형평성 논란이다. 공공기관 내부에서 구조 문제로 지적돼 온 전관예우·카르텔이 신규 채용으로 내려와 더욱 견고한 그들만의 성을 구축했다는 우려도 나온다.특정 대학 인맥 중심의 폐쇄적인 네트워크가 형성되면 인사·승진·부서 배치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게 관계자들의 말이다. 이는 투명하게 운영돼야 할 공공기관의 경쟁력 저하로 이어질 수 있다.전북혁신도시(전주)의 전북대·전주대, 강원혁신도시(원주)의 강원대, 경남혁신도시(진주)의 경상대 등이 대표 사례다. 동일 지역 출신이라도 타 지역 대학의 졸업자가 채용 기회에서 배제되는 차별은 오래전부터 논란이 돼왔다. 이는 전문성 확보와 경쟁력 강화라는 공공기관 본연의 역할과는 충돌한다. 국토부 산하 기관들은 사업 특성상 기술·안전 분야와 부동산 분석 등 높은 전문성을 필요로 한다. 인재 수급의 다양성이 약화되고 있다는 우려의 소리가 거세다.혁신도시 기업의 한 관계자는 "전문직렬이 특정 대학의 커리큘럼만으로 수요를 채워선 안된다"며 "내부에서 필요 인재보다 비율을 채울 수 있는 인재를 뽑아야 한다는 자조가 나온다"고 말했다.지역 의무채용제도는 해마다 강화돼 지방대와 공공기관 간 인련 순환이 고착화되고 있다. 앞으로 부동산과 건설산업은 인프라 고도화와 재난안전 시스템, 미래도시 전략 수립 등 복잡한 업무를 수행해야 하며 지역 편향 채용에 대한 고민을 다시 해야 한다.공공기관이 우물 안 개구리가 되지 않도록, 혁신도시는 지역을 가두는 울타리가 아니라 더 폭넓은 인재를 끌어들이는 열린 플랫폼 되어야 한다.
[기자수첩] '컨트롤타워' 부재에 멈춰 선 현대차 자율주행
세계 최대 규모의 생산시설을 갖추고 수십 년간 자동차 산업을 이끌던 기업이 있다. 이 회사는 막대한 자본을 투입해 소프트웨어 전문 자회사를 세우고 수천명의 개발자를 영입해 자율주행 기술 개발에 나섰다. 더 이상 기름 냄새 나는 제조사가 아닌 '테크 기업'으로 거듭나겠다는 야심 찬 포부도 밝혔다. 결과는 처참했다. 부서 간 주도권 다툼 속에 소프트웨어 개발은 지연됐고 핵심 모델 출시는 수년씩 늦어졌다. 결국 경영진 교체와 수익성 악화라는 후폭풍으로 되돌아왔다.전기차·소프트웨어 전환 실패의 교과서로 불리는 독일 폭스바겐과 자회사 카리아드의 사례다. 하드웨어의 강자가 소프트웨어라는 낯선 영역에서 어떻게 침몰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이 이야기는 더 이상 남의 나라 얘기가 아니다.폭스바겐의 비극은 현재 대한민국 자동차 산업의 심장부인 현대자동차그룹에서도 반복되고 있다. 그룹의 미래 먹거리 SDV(Software Defined Vehicle) 전략을 총괄하던 핵심 수장의 자리가 공백이다. 네이버 최고기술책임자(CTO) 출신으로 기대를 모았던 송창현 사장이 물러난 이후 그가 이끌던 AVP(미래차플랫폼) 본부의 사령탑은 여전히 비어 있다.현대차그룹은 포티투닷(42dot)에 수조 원을 투입하고 있지만 그룹 전체 소프트웨어 아키텍처를 통합·조율할 실질적 리더십은 약화된 상태다. 하드웨어 중심의 기존 조직과 소프트웨어 중심의 신설 조직 사이에서 갈등을 중재하고 방향을 제시해야 할 구심점이 사라진 셈이다.인선이 지연되는 사이 글로벌 경쟁 구도는 빠르게 재편되고 있다. 테슬라는 통합 전자제어장치(ECU)와 자체 운영체제(OS)를 기반으로 차량 전체를 실시간으로 업데이트하는 OTA 체계를 이미 구축했다.더 위협적인 존재는 중국이다. 샤오미와 화웨이 등 빅테크가 가세한 중국 전기차 업계는 '바퀴 달린 스마트폰'을 구현하는 속도에서 전통 완성차 업체들을 앞질렀다는 평가를 받는다.중국차의 경쟁력은 단순한 가격이 아니다. 스마트폰 수준의 유연한 사용자 경험(UX)과 이를 뒷받침하는 소프트웨어 아키텍처에 있다. 현대차가 하드웨어 신뢰도를 쌓는 데 50년이 걸렸다면 소프트웨어 경쟁은 그 10분의 1 시간 안에 판가름 난다. 이 속도전에서 전략을 설계하고 진두지휘할 C레벨의 부재는 사령관 없이 전장에 나선 군대와 다르지 않다.OS 개발이 늦어지고 통합 플랫폼 구축이 지연된다면 현대차의 SDV는 겉모습만 스마트한 자동차에 머물 수 있다. 하드웨어 경쟁력이 정점에 이른 지금이 오히려 가장 위험한 시점이다. 한때 휴대폰 시장의 절대 강자였던 노키아가 구시대적 OS에 안주하다 아이폰 등장과 함께 몰락했듯 자동차 산업에서도 같은 장면이 재현되지 말라는 법은 없다. 폭스바겐이 카리아드 실패 이후 리비안에 수조원을 투자하며 외부 기술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사례는 현대차에도 중요한 시사점을 던진다.
[기자수첩] 무너진 사전청약, 공급 실험이 남긴 불신
사전청약 제도는 집값 급등기였던 문재인 정부 시절 공급 신호를 앞당겨 시장 불안을 잠재우기 위한 카드로 등장했다. 무주택 실수요자에게 청약 기회를 제공해 희망을 주고, 정부로서는 단기간에 공급 성과를 보여줄 수 있다는 판단이었다. 하지만 속도를 앞세운 정책 실행 과정에서 사업 무산 시 책임 구조와 리스크 관리 장치는 충분히 마련되지 못했다.급조된 정책의 위험 부담은 자연스레 수요자에게 전가됐다. 2021년 정부는 사전청약을 통해 99개 단지(5만2000가구) 공급 계획을 발표했지만 실제 본청약까지 이어진 단지는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입주 지연 등 부작용이 속출하자 정부는 지난해 5월 제도 도입 3년 만에 신규 사전청약을 사실상 폐지했다. 정책이 허술하게 설계됐다는 방증이다. 올 들어 사전청약이 무산된 경기 파주운정3지구의 재입찰 결과는 속도에 쫓긴 정책의 한계를 적나라하게 드러낸 사례다. 계약을 포기했던 기존 시행사의 관계사가 해당 공공택지를 다시 낙찰받는 과정은 현행 제도 안에서 가능했다. 인창개발은 동일 법인이 아니라는 점을 들어 특수관계 법인을 앞세운 우회 참여에 성공했다. 계약 포기에 따른 실질적인 제재가 이뤄지지 않은 것이다.당국은 '합법적 재입찰'이었다고 설명하지만 정책 신뢰는 크게 훼손됐다. 파주운정3지구의 사전청약 당첨자들은 "지난 10월 해약 처리가 끝났는데 불과 한 두 달 사이에 기업의 재무 상태가 얼마나 달라졌는지, 투자 여력이 실제로 확보됐는지 믿을 수 없다"며 "과연 사업이 끝까지 정상적으로 진행될 수 있을지 불안하다"고 우려한다. 당시 정부는 대규모 물량을 빠르게 확보하는 데 집중한 나머지 사업을 이끌 시행사의 재무 안정성에 대한 검증은 부족했다. 이행 보증 강화나 사업 포기 불이익 등 계약 이행의 실패에 대비한 책임 구조도 정교하게 설계하지 못했다. 가장 큰 문제는 정부의 청약 시스템이 청약자의 지위 상실을 너무 쉽게 감내하도록 설계됐다는 점이다. 사전청약은 수요자에게 기다림을 요구하는 제도다. 사전청약 당첨자는 입주까지 통상 5~7년 이상을 기다려야 한다. 이 기간 동안 다른 청약 기회를 포기하고 주거 계획을 유예한다. 그럼에도 사업 지연이나 시행사 변경 과정에서 발생하는 불확실성은 고스란히 개인의 몫으로 남는다.사전청약은 기다린 시간만큼 손해가 쌓이고 피해는 뒤늦게 드러나는 지연형 리스크다. 기다림이 비용이 되는 구조에서, 내 집 마련을 기대하며 기다린 이들로서는 제도를 믿고 선택한 시간이 손실로 돌아온다고 느낄 수밖에 없다. 정부의 주택 정책은 '공급 확대'라는 단일 목표에만 집중해왔다. 어떤 방식의 공급인지, 누가 어떻게 책임을 지는 공급인지 후순위다. 그 결과 사전청약은 청약 시점을 앞당긴 제도가 아니라 주거 선택권을 장기간 묶어두는 제도로 작동했다. 지금 필요한 것은 보다 촘촘한 정책 설계를 통해 시장 신뢰를 회복하는 일이다. 내 집 마련의 꿈을 지탱하는 국가 시스템 전반을 재점검해야 한다.
[기자수첩] 은행 달력이 사라지지 않는 이유
"은행 달력 있어?" 연말이 되면 어김없이 주변에서 이런 질문을 받는다.휴대폰 앱 하나면 일정 관리가 충분한 시대지만, 은행 달력만큼은 여전히 자리를 지킨다. 집에 걸어두면 돈이 들어온다는 말은 반쯤은 우스갯소리처럼 들리지만, 어쩐지 희망을 걸고 싶은 오래된 믿음이기도 하다. 연말이 되면 중고거래 사이트에서 은행 달력은 귀한 몸이 돼 웃돈을 얹어 거래된다.은행은 돈을 다루는 금융기관을 넘어 서민들의 거실과 책상 위까지 들어왔다. 연말이면 부지런히 새해를 맞이한 은행 달력이 가장 사적인 공간에 걸린다.이는 사회가 은행을 단순 금융기관 이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은행이 주는 안정감에 기대 한 해를 정리하고 다음 해를 준비하는 연말 풍경이 반복되는 이유다.내년 은행들의 달력을 채우는 건 다름 아닌 '생산적 금융'이다. 정부의 '생산적 금융 대전환'에 맞춰 은행들은 대규모 관련 투자 계획을 잇달아 내놓고 있다. 이제 은행은 '돈을 얼마나 벌었는가'보다 '돈을 어디로 흘러가게 했는가'로 평가받는다. 부동산 등이 아닌 자영업자와 소상공인, 혁신 기업과 미래 산업으로 자금이 흐르도록 만드는 생산적 금융은 은행의 선택이 아닌 역할에 가깝다.신한은행은 초혁신경제·국가핵심 산업 및 제조업 등을 대상으로 총 6조9000억원 상당의 '생산적 금융 성장지원 패키지'를 가동했고 하나은행은 신용보증기금과 기술보증기금에 98억원을 추가 출연해 4500억원 규모의 생산적 금융을 본격화한다.우리은행은 기술주도 신사업과 성장기반 분야의 중소·벤처기업을 지원하기 위해 기술보증기금에 50억원을 특별 출연하고 약 2000억원 규모의 대출을 공급할 예정이다. KB국민은행 역시 신용보증기금과 기술보증기금에 총 140억원 규모의 출연을 통해 협약 보증서를 담보로 약 4000억원 규모의 대출을 지원한다.다만 이를 둘러싼 환경은 녹록지 않다. 고환율 기조가 장기화되며 자금 조달 비용과 건전성 부담이 커졌고 경기 둔화 속에서 대출 리스크 관리에 대한 압박도 커지고 있다. 급격한 자금 공급 확대 역시 은행에겐 부담이다.하지만 은행을 향한 사회적 기대는 줄지 않는다. 은행은 이제 여신·수신 기능을 넘어 자금이 우리 사회 어디로 흘러가야 하는지를 보여줘야 하는 위치에 서 있다. 실적 방어는 물론 금융 생태계 관리까지, 내년 은행들의 달력은 그 어느 때보다 무겁고 빼곡하게 채워질 전망이다.내년 연말에도 사람들은 또다시 은행 달력을 찾을 거다. 은행이 지켜온 신뢰가 증명되는 한 해가 되기를 바란다.
[기자수첩] 법인 가상자산 시장 참여, 이번엔 놓치지 말아야 한다
업비트·빗썸·코인원 등 국내 가상자산 거래소들이 앞다퉈 법인 고객 유치 경쟁에 나섰지만 정작 이를 뒷받침할 정부의 가이드라인은 여전히 완성되지 않아 업계 혼선이 이어지고 있다.금융위원회 산하 가상자산위원회는 최근 반년 동안 공식 움직임이 없었다. 올해 초 1단계 법인 시장 참여를 허용한 뒤 지난 5월 제4차 회의가 마지막이다. 정책 논의가 중단되는 동안 시장의 불확실성은 커졌고 제도 공백이 지속됐다. 당국은 당초 올해 안에 가상자산 거래소의 법인계좌 운영 및 관리에 관한 가이드라인을 발표할 예정이었다. 올해는 한 달도 채 남지 않았고, 가상자산위원회는 여전히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다.법인의 가상자산 시장 참여는 거래소 입장에서 단순한 고객층 확대가 아니라 시장 구조의 질을 바꿀 기회다. 개인 중심 시장은 변동성이 커질 수밖에 없지만, 법인이 참여하면 거래 규모와 유동성이 늘어 가격 충격이 줄어들고 시장 안정성이 확보된다. 거래소들이 법인 서비스에 투자를 아끼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개인 투자자만 참여하는 건 가상자산 산업과 시장 성장에 한계 구조를 만든다. 닫힌 문이 열리면 바로 서비스를 활성화할 수 있도록 거래소들은 이미 준비를 끝냈다. 검찰·세무 당국·지자체 등 몰수 자산 처분 법인, 기부 코인을 처리해야 하는 학교·단체, 수수료로 가상자산을 수취하는 거래소 등 이미 현금화가 필요한 법인 수요도 꾸준히 존재한다. 전문 투자 법인과 기관투자자는 재무·투자 목적의 가상자산 활용 수요까지 갖고 있다.문제는 법인 참여가 막혀 있다는 점이 기업 경영의 활동까지 제약한다는 것이다. 블록체인 서비스 도입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발생하는 토큰 취득·처분이 제도적으로 허용되지 않아 회계·세무 처리에 혼란이 생기고 변동성 헤지 등 기본적 재무 관리도 불가능하다. 이는 결국 자본·기술·인재의 해외 유출로 이어져 기업들이 미국·싱가포르 등 법인 친화적 국가에서 사업을 전개하는 악순환을 초래했다. 대기업 투자와 스타트업 창업 모두 해외 중심으로 재편된 것도 이러한 구조적 제약 때문이다.나아가 법인 참여는 글로벌 규제 논의를 따라가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이기도 하다. 스테이블코인 이용자 상당수가 법인이고, 가상자산 현물 ETF(상장지수펀드) 도입을 위해서는 증권사·운용사가 기초자산을 보유할 수 있어야 한다. 즉 법인이 시장에 들어오지 못하면 ETF·기관투자·증권사 참여·외국인 유입 등 다음 단계의 산업 확장은 불가능하다. 여러 규제 과제의 시작점이 법인 참여라는 점에서 이를 제도권에 편입하지 못하면 한국 가상자산 산업은 글로벌 경쟁력 회복의 기회를 잃을 수밖에 없다.한국의 현실은 글로벌 흐름에 뒤처질 위험에 놓였다. 미국, EU(유럽연합), 일본, 싱가포르 등이 이미 법인 중심 규제 체계를 정비하고 ETF·스테이블코인 규율을 마련했지만 한국은 여전히 멈춰있다. 글로벌 가상자산 시장이 법인 중심 구조로 구성되는 가운데 정체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격차는 더 크게 벌어질 수밖에 없다.숫자로 보면 위험성이 더욱 도드라진다. 금융정보분석원(FIU) 조사에 따르면 가상자산시장 참여 일반법인 개수는 2021년 하반기 4500곳에서 2025년 상반기 220곳으로 줄었다. 이는 국내 시장에서 규제와 정책의 영향으로 법인들의 가상자산 시장 참여가 위축된 것을 보여준다. 업계가 일반법인 시장 참여 로드맵 완성이 시급하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현 정부의 가상자산 ETF 도입에서도 법인 참여는 핵심 전제조건이다.2017년 이후 7년 동안 이어진 부정적 규제 기조는 벤처 인증 제외, ICO(가상자산공개) 금지, 외국인·법인 진입 제한으로 이어졌고 국내 스타트업 생태계는 사실상 고사했다. 그 사이 코인베이스 등 해외 기업은 몇 단계나 앞서 나갔다. 업계 관계자들이 "또다시 같은 실수를 반복할 수 없다"고 말하는 이유다.정책이 산업 속도를 따라가는 것은 어렵지만 지금 한국은 따라가기 위한 시도조차 멈춰 있는 상황이다. 법인 참여 가이드라인 완성이 지연될수록 한국은 글로벌 경쟁에서 다시 한번 뒤처질 가능성이 커진다. 거래소도 기업도 준비를 마쳤다. 법인의 가상자산 시장 참여는 선택지가 아니라 글로벌 시장에서 살아남는 생존 조건이다. 이번엔 타이밍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기자수첩] 예금도 펀드도 아닌 IMA… 성공 열쇠는 '시장 신뢰'
"시장에 없던 새로운 상품이니까요. 당국도 업계도 투자자도 다 긴장하고 있죠."최근 만난 IB(투자은행)업계의 한 전문가는 종합투자계좌(IMA) 첫 상품 출시를 앞두고 이같이 말했다. 초대형 IB 육성제도가 국내에 도입된 지 8년 만에 국내 최초로 IMA 인가를 받은 한국투자증권과 미래에셋증권은 연내 첫 상품 출시를 앞두고 있다.IMA는 정부가 강조해 온 '생산적 금융'과 '모험자본 공급'이 제도권 안에서 처음 현실화한 사례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자기자본 8조원' 문턱을 넘은 초대형 증권사 신용을 바탕으로 하는 IMA 상품 출시로 국내 장기·모험자본이 안정적으로 흘러갈 수 있는 제도적 관문이 마련됐다는 평가다.하지만 새로운 제도를 받아들이는 시장의 경계심과 리스크도 적지 않다. IMA는 고객이 예탁한 자금을 증권사가 통합 운용해 수익을 나누는 구조로 예금도 아니고 펀드도 아닌 독특한 형태다. '원금보장형 실적배당 상품'이라는 장점이 있지만, 중도 환매 시 손실이 발생할 수 있는 구조적 특성도 함께 갖고 있다. 문제는 이 생소하고도 복잡한 구조가 시장은 물론 투자자에게도 너무나 낯설다는 점이다. 만약 투자자에게 상품 구조에 관해 완전히 고지되지 않고 고객이 온전히 이해하지 못할 경우 불완전판매 리스크로 이어질 수도 있다. '모험자본 공급 확대'라는 순기능이 희석될 우려도 있다.IMA는 2028년까지 조달액의 25%를 모험자본에 의무 공급해야 한다. 이는 분명 정부가 의도한 '생산적 금융'의 핵심 축이다. 하지만 '모험자본'이라는 명목 아래 무리한 위험자산 확대나 레버리지 조달이 이뤄질 가능성이 있다. 반대로 증권사가 '모험자본'이라는 목적을 잊고 안정적인 수익 확보에만 집중할 경우 제도 본연의 역할도 희석될 수 있다. 원금보장 구조와 수익 분배 모델은 자칫 보수적 운용으로 기울게 만들고 이는 IMA가 지향하는 '생산적 금융'과 충돌할 수 있다.이에 요구되는 것은 투명하게 공개되는 증권사의 내부통제 기준과 운용 원칙, 리스크 허용 한도다. 이 모든 내용은 시장과 고객에게 철저하게 고지돼야 한다. 실제 금융감독원도 IMA 사업자에 "성과보상체계부터 판매·사후관리까지 완전판매 시스템을 정비하라"고 주문한 상황이다. 금감원은 지정 다음 날부터 태스크포스(TF)를 꾸려 상품설명서·약관·리스크 문구를 하나씩 점검하고 있다. 첫 상품이 시장 기준이 되는 만큼 "깐깐하게 보겠다"는 입장이 분명하다. 시장에서는 한국투자증권이 연내 1호 IMA 상품을 출시할 것으로 전망했지만 상품구성·투자대상·리스크 문구 조율에 꼼꼼한 협의와 조정이 더해지며 출시 일정이 지연됐다. 다만 새로운 제도가 시장에 뿌리내리는 데 있어 '첫 단추'가 중요하기 때문에 신중에 신중을 거듭하겠다는 판단이다.IMA가 순기능을 하려면 결국 세 가지 조건이 충족돼야 한다. 복잡한 구조를 명확하고도 투명하게 시장에 설명하는 것, 레버리지·투자대상·운용전략에 대해 공개하는 것, 판매 단계에서 완전성을 확보하는 것이다.시장에 없던 새로운 제도를 성공시키는 힘은 결국 시장의 신뢰에서 나온다. IMA가 생산적 금융의 새 축이 될지, 기존 발행어음 제도의 변형 판에 그칠지는 지금의 설계·검증·설명 과정에 달려 있다.새로운 제도를 시장에 안착시키는 데 있어 '속도'보다 중요한 것은 '안전성과 투명성'이라는 점을 잊어선 안 된다.
[기자수첩] 1997년 외환위기의 데자뷔, 또다시 국민 탓인가
원/달러 환율이 1500원을 돌파할 것이라는 우려가 커지자 금융당국은 지난 21일 주요 증권사 9곳을 긴급 소집했다. 서학개미의 해외주식 매수세가 환율 상승 압력으로 작용한다는 이유에서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국내 개인의 해외 주식 순매수액은 10월에만 68억5499만달러로 통계 작성 이후 최대를 기록했다. 연초부터 11월까지 누적액은 43조원에 달한다. 하지만 이는 현상의 일부만 본 피상적 분석이다. 시장 전문가들은 진짜 원인은 오래전부터 누적된 해외투자 구조 변화와 금융계정 악화에 있다고 지적했다. 거주자의 대외금융자산이 3분기 말 2조7976억달러로 집계됐고, 증권투자 잔액은 분기 대비 890억달러나 증가했다. 작년부터 이어진 해외투자 확대가 환율 체력을 근본적으로 바꿔놓았다.더 심각한 것은 10월 이후 외국인 자금이 유출로 돌아섰다는 점이다. 그간 개인의 달러 환전 수요를 외국인 자금 유입으로 상쇄했다. 하지만 외국인이 국내 투자를 정리하면서 환율이 급등했다. 여기에 연말 자금 경색과 은행권 달러 조달 어려움, 기업들의 해외투자 패턴 변화까지 겹쳤다. 그 여파로 지난해까지 1364.38원이던 연평균 환율은 현재 1410원을 넘어섰다. 이러한 상황에서 서학개미들은 왜 해외주식에 투자하는가. 답은 명확하다. 수익률이 국내보다 월등히 높기 때문이다. 국내 증시가 코리아 디스카운트에 시달리며 제자리걸음을 하는 동안, 미국 증시는 연일 최고가를 경신했다. 투자자들이 수익을 찾아 해외로 눈을 돌린 것은 지극히 합리적인 선택이다.정부는 이런 구조적 문제는 외면한 채 서학개미 탓만 하고 있다. 국내 증시를 매력적으로 만들지 못한 정책 실패는 묻지 않고, 투자자들의 합리적 선택을 문제 삼으면서 서학개미를 환율 급등의 주범으로 몰아가고 있다. 코리아 디스카운트 해소는 뒷전이고, 외국인 자금 유입을 늘릴 근본 대책도 없다. 외환시장의 구조적 취약성을 개선할 장기 전략도 현재로선 보이지 않고 있다.1997년 외환위기 때 정부가 금 모으기 운동으로 위기의 책임을 국민에게 전가했던 것처럼, 28년이 지난 지금도 같은 일이 반복되고 있다. 하지만 국민들은 더 이상 정부의 책임 전가에 속지 않는다. 서학개미만 탓하기 이전에 정부가 먼저 자신을 뒤돌아봐야 할 때다.
[기자수첩] 같은 바이오, '극과 극' 주주 신뢰
한마디 말은 천금같이 무겁다. 자신이 내뱉은 말을 지켰는지 여부가 곧 그 사람의 신뢰도로 이어질 정도다. 오죽하면 일언중천금(一言重千金)이란 격언이 있겠는가. 기업을 이끄는 총수의 공식 발언이라면 더욱 그렇다.사업 청사진이 실현될 때 기업은 투자자들의 신뢰를 받을 수 있다. 회사 성장세를 예측해 안전하게 투자할 수 있고 성과에 대한 투자 보상 기대감도 커지기 때문이다. 최근 에이비엘바이오가 주식 시장에서 주목받고 있는 이유도 같은 맥락이다.에이비엘바이오는 지난 12일 공시를 통해 글로벌 빅파마 일라이 릴리와 이중항체 플랫폼 그랩바디-B 관련 총 3조8072억원 규모 기술이전 계약 소식을 알렸다. 지난 4월 영국 GSK에 4조1104억원 규모 그랩바디-B 기술이전 이후 조단위 계약을 다시 따내는 성과를 냈다. 이상훈 에이비엘바이오 대표가 GSK 기술이전 계약 후 온라인 간담회에서 "지속적인 기술이전이 가능할 것"이라고 말한 내용을 지키는 모습이다.반복된 기술이전 성과에 대한 시장 반응도 뜨거웠다. 에이비엘바이오는 지난 12일 12만6700원(이하 종가 기준)을 기록, 전 거래일(9만7500원) 대비 30.0% 상승했다. 상승세는 다음 날까지 이어지며 16만3000원(전 거래일 대비 29.0% 상승)으로 거래를 마쳤다. 연초(1월2일) 2만9750원과 비교하면 주가 상승률은 447.9%에 달한다. 일각에서는 반도체와 '조방원'(조선·방산·원전)에 집중됐던 투자심리가 바이오로 옮겨갈 것이란 기대감마저 나왔다.에이비엘바이오가 주주 신뢰를 강화한 가운데 셀트리온은 반대 상황에 직면했다. 소액주주들이 임시 주주총회 소집 등 단체행동을 예고하며 경영진을 몰아세우고 있는 것. 소액주주들은 셀트리온 주가가 수년째 박스권에 머무는 원인으로 서정진 셀트리온 회장이 제시한 목표와 실적 간 괴리를 꼽았다. "허언에 가까운 가이던스가 공매도 세력에 빌미를 제공했다"는 게 셀트리온 소액주주 비상대책위원회 관계자 주장이다.서 회장은 당초 올해 셀트리온 연 매출 목표를 5조원으로 잡았으나 지난 7월 간담회에서 목표치를 4조5000억원 수준으로 하향 조정했다. 자가면역질환 치료제 짐펜트라의 올해 매출 목표치는 1조→7000억→3500억원 등으로 낮췄다. 유통구조 판단 착오 등이 이유였다. 서 회장은 지난 5월 간담회에서 "경험이 미숙해 (상황을) 너무 낙관적으로 생각했던 것 같아 투자자들에게 죄송하다"고 했다.흔히 바이오산업은 믿음을 바탕으로 성장한다고 말한다. 미래 성과에 기대를 거는 경향이 많아서다. 사업 목표가 실현되지 않는 상황이 반복되면 투자자들의 신뢰는 저하되기 마련이다. 셀트리온이 주주들의 신뢰를 받기 위해서는 합리적인 목표를 설정하고 끝까지 이행하는 모습이 필요하다.
[기자수첩] 연임 포기한 김영섭 대표… AI 3강 시대 '위태로운 KT'
KT의 새로운 선장 찾기가 시작됐다. 월드컵처럼 돌아오는 익숙한 풍경이다. 이사회는 서둘러 후임자 물색에 돌입했다. 표면적 이유는 해킹 사태지만 근본적으론 정권 교체기마다 최고경영자(CEO)의 명운이 출렁이는 악순환이 반복되는 수순이다. 김영섭 대표가 해킹 사태에 대한 책임을 이유로 연임을 포기하면서 전임 대표 시절과 같은 혼란은 없지만 여전히 외풍에 휘둘릴 KT의 미래가 눈에 선하다. KT는 민영화 이후 '정권과의 거리'에 예민했다. 엄연히 민영기업인 CEO 임기와 경영 권한이 법적·제도적으로 보장되어 있음에도 실제론 달랐다. 새 정부가 출범할 때마다 정치권은 '우호적 인사'를 암암리에 요구하거나 이사회와 주요 주주의 의사결정에 신호를 보내는 방식으로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전문성과 역량보다 정권과의 코드 적합성이 생존의 핵심 요인이었다. 이 같은 구조에서는 장기 복안을 마음껏 구상하기 어렵다. 새로운 CEO가 수립한 전략이 정권 기류 변화에 따라 무력화될 수 있다는 불안감이 팽배하다. 신임 수장이 3~5년에 걸쳐 추진해야 하는 중장기 전략보다 당장의 정치적 신호를 관리하는 데 공력을 더 많이 들여야 한다. 수차례 성장 동력을 제대로 완성하지 못한 데엔 이유가 있었다. 김영섭 대표도 이러한 현실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전임 구현모 대표가 힘을 쏟던 AI '믿음'을 이어받기보다 방향을 180도 틀었다. 마이크로소프트(MS)와의 강력한 연대를 바탕으로 2조4000억원에 달하는 투자를 결정했다. 그 결과 정부 주도의 '국가대표 AI' 프로젝트에서 탈락하며 자존심을 구겼다. 이를 위해 한국형 AI를 추진하겠다며 '믿음2'를 급조하기도 했다. 변화하는 정치·산업 환경을 읽은 부분도 있겠지만 KT의 특수한 환경이 주효했다는 시각도 많다.다소 성급했던 MS와의 협력 확대는 김 대표에게 부메랑이 될 가능성이 크다. 이미 레임덕에 빠진 김 대표에게 사업 추진은 어려운 일이다. 오히려 안정적인 퇴임을 위해 해당 사업을 수습하는 데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AI 경쟁이 하루가 다르게 격화되는 상황에서 이러한 혼란은 치명적이다. KT는 'AI 3강 시대의 주역'이 되고자 하지만 실상은 CEO 불안정성과 정치적 간섭을 넘지 못하고 있다. 글로벌 빅테크는 장기 전략을 일관되게 추진하며 경쟁하는데 재계 12위이자 매출 26조원의 기간통신사업자 KT는 CEO 교체로 전략과 조직 구조가 원점으로 돌아가는 일이 되풀이됐다.KT가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또 한 번의 경영진 교체가 아니라 안정적이고 성숙한 거버넌스 체계다. 정권이 바뀌어도 흔들리지 않는 CEO 권한 보장, 정치적 간섭을 최소화하는 이사회 구조, 전문성 중심의 경영 승계 원칙이 마련돼야 한다. KT만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 공기업·준공공기업이 오랫동안 견뎌온 고질적 병폐이기도 하다.차기 대표에게 요구되는 자질 역시 분명하다. 정치와 일정한 거리를 둘 수 있는 독립성이 필요하고 AI·네트워크·디지털 인프라 등 KT의 핵심 사업 구조를 깊이 이해하고 장기적 비전을 세울 수 있는 기술 기반의 리더십이 요구된다. 전략의 일관성을 유지하면서도 시장 환경 변화에 대응할 수 있는 유연성을 갖춰야 한다. 과거 통신이 주업이었던 시절과 다른 획기적인 변화가 절실하다. 정치권 역시 반성해야 한다. KT의 대표 선임 과정에 공식적·비공식적 영향력을 행사해 왔던 관행에서 손을 떼지 않는 한 공기업·민간 기업 어디에서도 혁신은 기대할 수 없다. KT를 정권 친화 인사 교체의 장으로 삼지 않겠다는 약속을 행동으로 보여야 한다. 필요하다면 CEO 임기 보장 및 독립성을 강화하는 법·제도 정비도 검토해야 한다.한국 AI 산업의 경쟁력, 디지털 인프라의 안정성, 국가통신산업의 미래가 걸린 중대한 분기점이다. 더 이상 이해관계에 흔들릴 시간을 허비할 여유도 없다. 이번 대표 선임 과정이 KT의 오랜 고질병을 반복할지 아니면 환골탈태의 계기가 될지 지켜볼 일이다.
[기자수첩] 건설 R&D 투자 '1%'… 안전관리 규제의 한계
'중대재해 처벌 등에 관한 법률'(중대재해처벌법) 시행과 각종 규제 강화에도 건설현장에서 발생하는 안전사고는 줄어들지 않았다는 통계가 확인된다. 사고는 수습보다 예방이 중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규제뿐 아니라 노동자의 협력, 그리고 기술 투자가 함께 작동해야 한다. 올 상반기 10대 건설업체(삼성물산·현대건설·현대엔지니어링·대우건설·DL이앤씨·GS건설·HDC현대산업개발·포스코이앤씨·롯데건설·SK에코플랜트)의 매출 대비 연구개발(R&D) 투자비는 평균 0.7%에 불과했다. 매출의 1%에 미치지 못하는 기술 투자비가 건설산업의 현실을 보여준다.정부가 인공지능(AI) 응용사업에 수조원을 투자하고 기업들은 안전관리 시스템에 드론 감시, 스마트 헬멧 등 기술을 적용하려 노력하고 있다. 해외 현장에서는 이 같은 안전관리 자동화가 이미 표준으로 자리잡았다는 게 업계 관계자들의 말이다.하지만 국내 건설업체들은 쉽사리 대규모 투자에 나서지 못한다. 수년째 지속돼온 건설경기 침체와 원가 부담, 실적 하락 등으로 R&D 예산을 오히려 줄이는 실정이다. 한 대형 건설업체 관계자는 "안전기술에 대한 투자가 필요한 것을 알지만, 전문경영인 체제에선 실적 방어가 더 중요하므로 R&D 예산을 늘리기가 쉽지 않다"고 토로했다. 총수 경영 체제가 아닌 기업의 최고경영자(CEO) 임기는 통상 3년으로 경영실적에 따라 연임 여부가 결정될 수 있는 환경에선 고수익 수주와 영업이익률에 치중할 수밖에 없다. 눈앞의 실적을 보장하지 않는 R&D 투자는 후순위가 되는 것이 당연하다.정대기 대우건설 기술연구원장은 "안전기술은 한 번의 시스템을 도입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며 "현장의 인식과 문화가 바뀌어야 지속할 수 있다"고 말했다.정부도 기업에 대한 처벌만이 아닌 기술개발에 좀더 힘을 써야 한다. 기술 인센티브와 공동 연구 플랫폼 구축 등 구조 지원을 병행할 수 있다. 제도와 기술이 한 팀이 되어 움직여야 구조의 문제를 푸는 데 다가설 수 있다. 건설현장에서 발생하는 사고는 산업재해의 절반 가까이를 차지한다. 국회 기후에너지환경노동위원회 소속 이학영 의원(더불어민주당·경기군포)이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2020년부터 2024년까지 현대건설 17명, 롯데건설 14명, 대우건설 13명의 사망사고가 발생했다. 올 초 현대엔지니어링과 포스코이앤씨, DL건설, GS건설, 대우건설, 삼성물산 등이 시공한 현장에서도 사고가 잇따랐다.백지장도 맞들면 낫다는 속담이 있는데, 건설현장 사고 예방은 기업의 노력만으로는 이뤄지기가 힘들다. 정부가 지원을 고민하고 기술 발전에 협력해야 하며 외국인 이주노동자 교육 등 풀어야 할 문제가 매우 많다.
[기자수첩] 수의계약 무산된 KDDX… '상생'이 전력화 속도 높인다
2년 가까이 표류하던 한국형 차기구축함(KDDX) 사업이 마침내 전환점을 맞았다. 방위사업청이 추진해온 수의계약 방식은 사실상 무산됐다. 정치권 전반에선 '연내 상생 방안 도출'에 공감대가 형성됐고 오는 11월 방위사업추진위원회가 향후 방향을 가를 분수령으로 주목된다.올해 방위사업청 국정감사에서도 KDDX 사업 방식이 주요 쟁점으로 떠올랐다. 박선원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계속해서 수의계약을 주장한다면 세계시장에서 우리 국가와 방사청의 신뢰 문제가 발생할 것"이라고 지적했다.정치권의 비판은 단순히 절차 문제를 넘어 '신뢰의 위기'에 대한 경고였다. 방사청이 '적기 전력화'를 명분으로 내세우며 수차례 수의계약 안건을 상정했지만 민간위원과 국회 모두가 "공정성과 투명성이 결여됐다"고 반대했다. 이제 수의계약은 정치적으로도 행정적으로도 추진 불가능한 단계에 이르렀다는 평가가 나온다. 남은 길은 하나 '상생'이다. 부승찬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국회 국방위원회 내에서도 상생 방향에 공감대가 형성됐다"며 "올해 결론이 날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안규백 국방부 장관 역시 "KDDX는 더이상 미룰 일이 아니다"라며 신속한 결정을 예고했다.이처럼 정부와 국회 모두 상생협력형 대안을 검토하는 방향으로 기류가 전환됐다. 방사청이 내부 검토를 마치는 대로 11월 방추위에서 사업자 선정 방식이 확정될 전망이다.남은 안은 상생안(공동개발)과 경쟁입찰뿐이다. 업계에선 공동개발이 가장 현실적인 방안이라고 본다. 올해 초 산업통상자원부가 한화오션과 HD현대중공업을 KDDX 사업의 복수 방산업체로 지정하면서 두 기업이 함께 상세설계에 참여하고 1·2번함을 나눠 동시 발주하는 '공동개발 모델'이 급부상했다. 이 모델은 최신 기술을 병행 반영하고 공정을 병렬로 진행해 전력화 일정을 단축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방산 업계 관계자들도 "정치적 갈등으로 표류한 사업을 정상화하려면 '윈-윈' 구조가 필요하다"며 "공동개발을 통해 기술 경쟁력과 일정 안정성을 동시에 확보할 수 있다"고 입을 모은다.문제는 '결단'이다. 정치권이 방향을 제시하고 업계가 현실안을 내놨다면 이제 방사청이 중심을 잡아야 한다. 그동안 방사청은 결단을 미루며 사업 혼란을 키워왔다. 백선희 조국혁신당 의원이 "KDDX 문제를 어렵게 만든 것도 해결해야 하는 것도 방사청"이라고 질타한 것도 이런 이유다.방위사업은 어느 한쪽의 승패로 끝나선 안 된다. 국산 방산 시스템의 신뢰는 협력과 균형 위에서만 유지된다.KDDX는 단순한 조선 프로젝트가 아니다. 선체부터 전투체계, 레이더 등 핵심 무장을 국내 기술로 자체 개발해 건조하는 '국산 구축함의 상징'이다. 총 6척 건조에 약 7조8000억원이 투입되는 국가 전략사업이다.한 치의 판단 착오가 국가 방산 산업 전체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방위사업청이 지금 내릴 결정은 단순한 계약 방식의 문제가 아니라 향후 한국 해군의 기술 자립과 산업 생태계의 방향을 결정짓는 일이다.이제 중요한 것은 '어떻게 함께 가느냐'다. 상생의 틀 안에서 사업을 조속히 정상화하지 못한다면 그 피해는 결국 군과 국민에게 돌아간다. 방사청은 흔들림 없는 결단으로 KDDX를 한국 방산 신뢰의 출발점으로 만들어야 한다. 이것이 수년 넘게 표류한 KDDX사업이 우리에게 준 교훈 아닐까.
[기자수첩] 무더기 기업인 '국감 소환'…필요할 때만 민관 협력인가
"성공한 사람을 끌어내려서는 나라를 세울 수 없다." 리콴유 전 싱가포르 총리는 정치권이 기업인을 포퓰리즘적으로 공격하려는 상황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그는 기업의 성장이 곧 국가 발전의 토대라고 강조했다. 독재 통치로 명암이 엇갈리지만 그의 기업 친화적 정책은 싱가포르를 1인당 GDP 7만 달러 수준의 선진국으로 끌어올렸다. 정부가 주도하고 기업이 협력한 결과다. 최근 한국에서도 민관 협력이 주목받는다. 한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국내 주요 그룹 총수들은 미국을 찾아 각 기업이 미국 경제에 기여할 방안을 미 정부에 직접 전달했다. 최근 정부와 트럼프 측이 관세 협상안을 두고 이견을 빚자 국내 5대 그룹 총수들이 다시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마러라고 리조트에서 트럼프를 만나 돌파구를 모색하기 위해서다.두 국가 모두 민관 협력을 중시하지만 가장 큰 차이는 정치권이 기업인을 바라보는 시각이다. 싱가포르는 기업을 국정 파트너로 여기는 반면 한국은 규제와 감시 대상으로 본다. 올해 국정감사에서 기업인 증인 채택을 줄인다고 했지만 지난해보다 8명 늘어난 164명이 소환됐다. 수 자체를 문제 삼을 수는 없지만 일부 증인은 실수로 소환된 것 아니냐는 의혹이 남는다. 국감 첫날 최주선 삼성SDI 대표는 리튬 배터리 사고 관련 질의를 위해 소환됐다. 문제의 사고는 창천동 배터리 화재였지만 삼성SDI 제품은 아니었다. 중국산 배터리라는 것이 밝혀졌지만 국회는 확인 없이 최 대표를 증인으로 불렀다. 국가정보원 화재 관련 증인으로 채택된 김동명 LG에너지솔루션 대표도 사고는 교체 과정의 부주의 때문이었지만 제조사라는 이유만으로 증인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올해도 기업인들은 국감 회의장 뒷편을 가득 메웠다. 경제가 급박하게 돌아가지만 이들은 하염없이 답변할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제프 베조스 아마존 창립자는 CEO의 역할을 두고 '중요한 결정에서 마지막 책임을 지는 사람'이라고 했다. 국감에 나온 기업인들은 질의하는 의원이 바뀔 때마다 답변과 사과를 반복해야 했다.기업을 필요할 때만 이용하는 풍토가 자리 잡아서는 안 된다. 민관 협력은 기업이 정부를 돕는 것이 아니라 국가와 기업이 힘을 합쳐 모두의 성장을 이끄는 것이다. 철강업계는 미국·EU 고율 관세와 중국 저가 공세로 현대차는 일본보다 높은 25% 관세로 경쟁에서 밀리고 있다. 배터리 업계는 미국의 전기차 보조금 중단으로 고충이 쌓이고, 반도체 업계는 미중 갈등과 관세 여파로 수익이 감소할 조짐이다. 하지만 지난 8월 여야 의원 106명이 발의한 K스틸법은 정쟁 속 국회에 계류돼 있고, 배터리 업계의 R&D 세금 감면 외 '직접환급형 세액공제' 요구에 정치권은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반도체 업계 지원을 위한 9개 법안도 국회에서 처리되지 못한 채 맴돌고 있다. 정치권이 기업을 상호협력 대상으로 바라보지 않는다면 기업은 살 길을 찾아 눈을 돌릴 수밖에 없다. 1983년 스웨덴에서는 포퓰리즘성 법안인 노동자 기금법 통과 이후 기업들이 다른 나라로 본사를 옮겼고 경제가 흔들렸다. 한국도 기업만 국가를 돕는 구조가 고착화된다면 같은 결과를 맞게 될 수도 있다. 내우외환 속 한국 경제 성장률은 1% 아래로 추락했다. 기업과 국가가 공생하는 문화를 만들어야 할 때다.
[기자수첩] '규제의 덫'에 갇힌 부동산 대책
이재명 정부가 오늘(15일) 새 부동산 대책을 발표했다. 정부 출범 4개월 만에 세 번째 대책이다. 앞서 6·27 대출규제와 9·7 공급대책으로 가격 안정을 꾀했지만 서울 아파트값은 나날이 고공행진하고 강남에선 신고가 거래가 잇따랐다. 9·7대책은 '맹탕 대책'으로 평가됐다. 정부는 2030년까지 수도권에 135만가구의 신규 주택을 착공하겠다는 공급 계획을 제시했지만 현장에선 이를 체감하지 못했다. 집값 상승세가 안정되지 않으면서 이달 추석 연휴를 앞두고 정부가 추가 규제를 발표한다는 사전 정보가 시장에 불안을 안겼다.지난 12일 고위 당정 회의를 통해 부동산 종합대책 발표를 공식화한 정부는 이번 대책에서 서울 전역과 경기 12개 지역을 규제지역(조정대상지역·투기과열지구·토지거래허가구역)으로 지정했다. 고가 주택의 주택담보대출을 축소하고 실거주 목적이 아닌 경우 주택 매수를 허가하지 않는 것이 골자다.자금줄을 조인다고 해서 집값이 안정될지는 미지수다. 그동안 시세 상승을 주도해온 강남·용산 등 고가 주택들은 대출 영향을 크게 받지 않는다는 지적이 지속해서 제기됐다. 이미 6·27 대출규제를 통해 주택담보대출 한도는 6억원으로 제한돼 있다.부동산 전문가들은 정부의 이번 대책은 단기 효과에 그칠 것이라고 전망했다. 정부 규제가 강화될수록 '더 오르기 전에 투자해야 한다'는 불안 심리가 팽배하다. 오히려 내 집 마련이 필요한 실수요자 피해 등 부작용만 반복되고 있다.부동산대책의 가장 큰 과제는 정부 정책에 대한 신뢰를 회복하는 것이다. 문재인 정부의 부동산정책 실패는 규제가 과거와 같이 거래시장을 움직일 수 없다는 큰 교훈을 남겼다.문재인 정부 5년 동안 28차례 부동산대책을 발표했지만 서울 아파트 가격은 109% 상승했다. 무주택자의 임대차시장 불안 등 피해도 우려된다.규제에도 내성이 있다. 당국의 지나친 개입은 정부가 부동산에 집착한다는 인상을 주고 있다. 부동산 투기에 대한 기대를 높인다는 문제점도 지적된다.지속 가능하고 일관된 시장 안정화 정책은 실수요자를 위한 주택 공급을 늘리는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아 말한다. 정권 교체에도 흔들리지 않는 주택정책의 시그널이 내 집 마련을 준비하는 실수요자의 불안을 가라앉힐 수 있다.
[기자수첩] ETF 투자, 유행 따르기보단 '장기 보유'가 성공 지름길
국내 ETF(상장지수펀드) 시장이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순자산총액은 230조원을 돌파했고 상장 종목 수는 1000개가 넘는다. 4년 전만 해도 순자산총액 73조원, 500개 상품에 불과했지만 가파른 속도로 시장이 확대됐다.ETF가 이처럼 성장한 이유는 분명하다. 거래소에 상장돼 주식처럼 실시간으로 사고팔 수 있으면서도 일반 펀드에 비해 투자 비용이 낮고 지수를 추종하는 특성상 분산 투자 효과가 뛰어난 구조 덕분이다. 투자자는 소액으로도 다양한 자산에 접근할 수 있고 기초지수의 구성 내역을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있어 투명성도 높다. 개인 투자자들이 ETF에 매력을 느끼는 이유다.상품 폭도 넓어졌다. AI(인공지능)·빅테크·방산·고배당 등 특정 산업이나 트렌드를 반영한 테마형 ETF가 속속 등장하면서 투자자들은 자신의 관심사와 투자 성향에 맞춘 선택이 가능해졌다. 특히 국내 시장은 리테일 투자자 비중이 높아 새로운 테마가 나오면 빠르게 자금이 몰리는 특징을 보인다.물론 지수를 추종하는 ETF의 특성상 하락 가능성도 존재한다. 시장이 상승만 하는 것은 아니어서다. 그럼에도 많은 전문가들은 지수는 장기적으로 우상향한다는 점에 주목한다. 지난 20년간 꾸준히 상승해온 S&P500이 대표적 사례다. 단기 변동성에 흔들리며 잦은 매매를 하기보다는 긴 호흡으로 ETF를 보유하는 편이 훨씬 유리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조언이다. 잦은 매매를 하게 되면 '고점 매수·저점 매도'의 가능성이 커지기 때문이다. 9월 한 달간 진행한 릴레이 인터뷰에서 자산운용사 ETF 본부장들 역시 같은 의견을 내놨다. ETF는 단기 유행을 좇는 자산이 아니라, 장기 보유할 때 진가를 발휘하는 투자 수단이라는 것이다. ▲낮은 운용보수 ▲높은 투명성 ▲손쉬운 분산투자라는 기본 장점에 ISA(개인종합자산관리계좌)나 연금 계좌와 결합하면 절세 효과까지 더해져 노후 자산을 불리는 핵심 도구로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장기 투자 전략의 대표 사례로는 '코어-새틀라이트 전략'이 꼽힌다. 코어엔 코스피200, S&P500 같은 대표 지수 ETF를 담아 안정적 수익 기반을 만들고 새틀라이트엔 성장성이 높은 테마형 ETF를 일부 편입해 초과 수익을 노리는 방식이다. 이는 안정성과 성장성을 동시에 추구하는 균형 잡힌 접근이다.투자 대가 워런 버핏은 "주식시장은 인내심이 없는 자로부터, 인내심이 많은 자에게로 돈이 넘어가도록 설계돼 있다"고 말했다. ETF 투자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예컨대 S&P500에 1000만원을 20년간 보유했을 경우 9500만원으로 불어나지만 단 10일간의 상승장을 놓치면 수익이 절반으로 줄어든다. 시장에 오래 머무르는 것 자체가 최고의 투자 전략임을 보여주는 사례다.ETF는 이제 단순한 투자 트렌드가 아니다. 저비용·투명성·분산투자라는 구조적 장점에 세제 혜택까지 더해져 장기적 관점에선 연금 자산의 핵심으로 자리 잡을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투자자들의 관점도 바뀌어야 한다. 트렌드에 흔들리는 단기 매매가 아니라 시간을 아군으로 만드는 꾸준한 보유가 ETF의 본질에 다가가는 길이다.
[기자수첩] 기대감만으로 '코스피5000'(?)… 시장은 '체력'을 원한다
"현재 코스피 상승세는 정부 증시 부양책에 대한 실망감이 기대감으로 원상복구 된 것에 불과합니다. 지금 상황에서 현재 코스피 레벨에 안착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입니다."최근 만난 모 증권사 리서치 센터장의 한마디는 큰 충격이었다. 최근 국내 증시가 역사상 최고가를 잇달아 돌파하는 등 고공행진을 이어갔지만 이런 분위기가 언제까지 지속될지에 대한 우려부터 꺼냈기 때문이다. 코스피는 정부가 주식 양도세 대주주 기준을 50억원으로 현행 유지한 것이 촉매제가 되며 지난 16일까지 11거래일 연속 상승세를 이어왔다. 날마다 사상 최고가를 갈아치우던 코스피지만 지난 17일 돌연 하락 전환했다. 업계는 이런 조정세가 예견됐다는 분위기인데 최근 국내 주식시장의 상승세가 기대감으로 부양된 영향이 적지 않다고 본 것.지난 7월 말 발표된 세제개편안은 내년 1월1일 이후 개시하는 사업 연도부터 적용 예정으로 현재 시행규칙과 시행령 등 후속 개정을 이어가고 있다.현재 국회와 정부는 자사주 의무 소각, 법인세율 인상, 종부세·상속세 완화, 배당소득 분리과세 등 주요 쟁점을 두고 논의를 이어가고 있다. 현재 세제개편안이 아직 껍데기만 마련됐을 뿐 핵심 사항들은 구체적으로 정해지지 않았음을 방증한다. 정부와 국회는 아직 뚜렷한 방향을 정하지 못하고 시장 눈치를 보며 논쟁만 반복하는데 이런 정책 불확실성은 향후 변수로 작용하며 주가 변동성을 키울 수 있다는 게 업계 우려다.대내외 불확실성이 산적한 상황에서 뚜렷한 실체 없이 기대감만으로 버티는 장세는 오래 지속될 수 없다. 정부는 정책에 대한 기대만 부풀리는 데서 멈추지 말고 실행으로 신뢰를 확보해야 한다. 근본적으로 한국 증시를 부양하고 코리아디스카운트를 해소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국내 기업들의 경쟁력이다. 궁극적으로 증시 체력은 기업이 키운다. 글로벌 무대에서 산업 경쟁력을 입증하고 실제 이익을 통해 가능성을 인정받을 수 있어야 한다. 다가올 올해 3분기 기업들의 실적 시즌은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지금의 증시 상황이 거품일지, 또는 도약을 위한 발판일지 가늠하는 시험대가 될 것으로 보인다. 금융정보업체 에프앤가이드에 따르면 8월 말 기준 올해 3분기 코스피 상장사 영업이익 컨센서스는 67조7190억원으로 집계됐다. 이는 지난 7월 전망치 대비 1.9% 하락한 수치다.지난 2분기 발표된 기업들의 실적이 예상에 미치지 못했기 때문에 3분기 실적 추정치 역시 하향 조정됐다. 3분기 국내 상장 기업들의 실적이 기대를 밑돌 경우 시장 충격이 불가피하다. 산업 경쟁력을 기반으로 한 실적이 담보되지 않는 한 현재 증시 고점은 쉽게 흔들릴 수 있다. 기업들의 성적표가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면 그간 쌓인 거품은 더 강한 충격으로 되돌아올 수 있다.거품이 사라지는 것을 막기 위해 정부는 증시 활성화 방안에 관한 논의를 조속히 매듭짓고 기업의 글로벌 경쟁력 제고를 뒷받침할 입법·제도 개선에도 속도를 내야 한다. 기업의 체력이 곧 시장의 체력이고 나아가 경제의 기반이 된다. 국내 투자자는 물론 외국인·기관투자자 관점에서도 한국 자본시장이 지속 가능한 매력을 확보하도록 일관된 정책과 실행이 요구되는 시점이다. 예측 가능성은 투자의 밑거름이라는 점을 잊어선 안 된다.
[기자수첩] 정치 논리에 휘둘리는 자사주 소각 의무화의 민낯
개인투자자들의 항의 전화가 빗발치자 하루 만에 법안을 뒤바꾸는 등 정치권의 조급함이 도를 넘었다. 지난 7월 발의된 상법 개정안에서는 '취득 후 3년 이하 범위에서 대통령령이 정하는 기간'으로 명시했는데 "3년이나 미루는 건 말이 안 된다"는 개인투자자들의 항의에 '즉시 소각' 법안으로 재발의한 해프닝이 벌어졌다. 법안의 급진성보다 정책의 일관성과 실현 가능성에 대한 냉철한 검토 없이 여론에 휘둘려 수정했다는 점이 문제로 지적된다.이런 졸속 입법에 대한 우려는 재계 간담회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났다. 9일 서울 중구 대한상공회의소에서 열린 민주당 코스피5000 특위와 경제8단체 간담회에서 박일준 대한상공회의소 부회장은 "상법뿐만 아니라 노란봉투법까지 동시다발적으로 법이 개정되다 보니까 기업들이 걱정이 많다"며 "1차 상법 개정될 때 이사 충실의무에 대한 걱정을 경제계가 많이 하니까 배임죄를 개정하겠다고 약속했는데 현장에서는 해석에 대한 논란이 있는 상태에서 또 2차 개정이 이루어지고 하다 보니까 기업들의 불안이 더 커지지 않느냐"고 토로했다.이는 순차적 검증 없이 정치적 효과만을 노린 졸속 입법의 전형이다. 오기형 민주당 코스피5000특별위원회 위원장이 "야구에 비유해 말하자면 이제 2회를 마치고 3회에 들어가는 상황"이라며 경제 입법에 적극 나서겠다는 의지를 피력했지만 마치 야구 경기처럼 정치적 성과를 쌓아가겠다는 인식 자체가 문제다.현재 상장사 가운데 자사주 보유 비중이 40%를 넘는 기업은 7곳이며, 자사주 보유 비중이 20~40%인 기업은 코스피에 33곳, 코스닥에 19곳이 있다. 롯데지주는 올해 초 기준으로 32.5%의 자사주를 보유했고, SK그룹도 지주사인 SK의 자사주 비중이 24.8%로 매우 높은 편이다. 이들 기업이 1년 내에 수십조원 규모의 자사주를 처리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진다면 그 과정에서 발생할 혼란은 고스란히 주주들의 피해로 전가될 가능성이 높다.더욱 우려스러운 것은 여론에 떠밀려 정책 방향이 하루아침에 바뀌었다는 점이다. 법안 발의 후 의원실에는 개인투자자들의 전화가 이어졌고 결국 소각 기간을 '시행령'이 아닌 '법안'에 명확히 하고 즉시 소각까지 의무화한 법안을 재발의하는 것으로 방향을 틀었다. 다만 항의 전화를 건 개인투자자들이 자사주 소각 의무화의 복잡한 파급효과를 모두 이해하고 있을지 의문이다. 자사주 소각이 곧바로 주가 상승으로 이어진다는 단순한 등식은 현실에서 작동하지 않을 수 있어서다. 삼성전자의 경우 지난해 자사주 10조원 매입 및 소각을 발표했지만 주가 변동이 미미했던 사례도 있다.해외 사례를 봐도 미국 기업들은 충분한 유동성과 안정적인 자본시장을 바탕으로 자사주 소각을 진행하지만, 한국 기업들은 여전히 대주주 중심의 지배구조 하에서 경영권 방어라는 현실적 필요에 직면해 있다. 이런 구조적 차이를 무시하고 단순히 '글로벌 스탠다드'를 들이대는 것은 현실을 외면한 탁상공론에 불과하다.자사주 오남용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분명 필요하다. 본래는 없던 '자사주 의결권'이 인적분할 시에는 생기는 일명 '자사주 마법'이라던가 주주가치제고 목적으로 취득해놓은 자사주를 최대주주에 우호적인 백기사를 확보하는 용도로 처분하는 행위는 분명 개선돼야 한다. 하지만 해결책은 무조건적인 소각 의무화가 아니라 자사주 보유 목적의 투명성 제고와 처분 과정의 공정성 확보여야 한다.현재 민주당은 자사주 소각 의무화와 관련해 경제계 의견 등을 수렴한 뒤 여러 관련 법안을 하나로 모으는 작업을 한다는 목표를 세워두고 있다. 하지만 개인투자자들의 즉흥적인 요구에 휘둘려 졸속으로 만든 법안이 결국 시장 전체의 혼란을 가져온다면 그 피해는 고스란히 모든 투자자들이 떠안게 될 것이다. 정치적 성과보다는 제도의 안정성과 지속가능성을 우선시하는 것이 진정한 주주가치 제고의 길이다.
[기자수첩] 비만약 열풍의 그림자
말 그대로 비만치료제 열풍이다. 비만이 아닌 사람도 비만치료제를 사용하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을 정도다. 운동과 식단조절로 살을 빼면 바보라는 소리도 심심찮게 들린다. 제약사들은 가격 경쟁에 나서며 비만치료제 대중화에 기름을 붓고 있다. 오남용과 부작용에 대한 우려와 경고는 점점 사라져 간다.국내 비만치료제 열풍은 노보 노디스크의 위고비(성분명 세마글루타이드)가 문을 열고 일라이 릴리의 마운자로(성분명 터제파타이드)가 불을 지폈다. 일론 머스크 테슬라 CEO(최고경영자)의 체중 감량 비법으로 유명했던 위고비는 지난해 10월 국내에 출시된 후 품절 대란을 일으켰다. 비만치료제에 대한 대중들의 거부감이 줄어든 순간이다. 지난달부터 국내에 유통된 마운자로는 위고비보다 뛰어난 체중 감량 효과를 바탕으로 일명 약국 '오픈런'을 재현했다.비만치료제로 체중을 감량했다는 주변인들의 후기를 듣는 일도 늘었다. 대체로 "비만치료제를 맞으면 식욕이 싹 사라져 크게 노력하지 않아도 살이 빠진다" "처음엔 약 가격이 부담돼 주저했는데 식비가 줄어드니 사실상 추가 지출은 없는 셈"이라고 한다. 단점은 찾아볼 수 없고 장점이 주를 이룬다. 비만치료제 가격이 기존 40만원대에서 최근 20만~30만원대로 떨어진 점을 고려하면 한동안 이 같은 후기를 더 많이 들을 듯하다.문제는 오남용이다. 위고비와 마운자로 모두 비만이라는 질병을 치료하기 위해 만들어졌지만 현장에서는 미용 목적으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처방 기준이 되는 BMI(체질량지수)와 관계없이 처방이 이뤄지기도 한다. 고용량 약을 처방받은 뒤 환자 임의로 용량을 조절해 맞거나 여러 사람이 나눠 맞는 사례도 흔히 볼 수 있다. 비만치료제를 사용 중인 30대 직장인 A씨는 '의약품을 환자 임의로 사용해도 되냐'는 기자의 질문에 "병원에서 의사가 그렇게 하라고 했다"고 설명했다.간과하고 있는 부작용에 대한 경각심도 필요하다. 비만치료제로 빠르게 체중을 감량하면 담석 등 부작용이 나타날 수 있다. 간에서 분비되는 콜레스테롤의 양이 증가하고 식이량은 감소하면서 담낭 수축 빈도가 줄고 담즙이 정체돼 담석이 생기는 구조다. 이 밖에 구토·설사·변비 등 위장관계 이상 반응, 저혈당증, 급성췌장염, 체액 감소 등도 비만치료제의 부작용으로 꼽힌다.비만치료제는 양날의 검이란 생각이 든다. 비만 환자가 의료 전문가 처방에 따라 허가된 용법대로 사용했을 때는 축복과 같은 의약품이 되겠지만 반대의 경우에는 건강을 해치는 주범이 된다. 스스로 자신을 향해 겨누고 있는 것이 비만치료제 주삿바늘이 아닌 건강을 갉아먹는 칼이 아닌지 다시 한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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