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노트
[기자노트] 정치 스타트업에 거는 기대
지난 3월9일 개혁신당 대회의실. 이준석 대표가 가리키는 TV 화면에 취재진 시선이 쏠렸다. 화면에는 AI(인공지능)가 인간 사무장처럼 유세 일정과 동선을 관리해주는 내용이 펼쳐졌다. 선거비용 절감 효과를 강조하는 대목에선 이 대표의 제스처와 목소리가 커졌다. 우려 섞인 질의엔 신뢰 제고를 위해 노력하겠다고 했다.AI 사무장과 챗봇 등은 돈과 조직이 부족한 정치신인을 돕겠다는 취지로 만들어졌다. 실력만 있다면 누구나 정치에 참여할 수 있도록 돕는 시스템이다. 개혁신당 싱크탱크 개혁연구원은 최근 5년간 전국 지방의회 회의록 19만7000여건을 데이터베이스화했다. AI로 데이터를 학습시켜 지역의 중요현안을 파악한 뒤 지방선거 참여자에게 맞춤형 공약까지 제공한다는 계획이다.3석에 불과한 스타트업 정당이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힘 틈새에서 불가피한 전략을 편다고 볼 수 있지만 새로운 정치 문화를 만들어간다는 점에서 거대 양당에 적지 않은 시사점을 준다. 영호남 등 거대 양당의 텃밭에선 공천이 곧 당선이다. 그만큼 공천받기가 어렵다. 당내 경선이 대한민국 양궁 국가대표 선발전이나 다름 없다.자연스레 본선을 위한 정책 개발은 관심과 노력이 떨어진다. 실력 쌓기보다 권력 아래 줄 서거나 세력 형성에 관심을 두는 경우도 적지 않다. 민주당과 국민의힘이 매일 발표하는 논평이나 브리핑은 상대방을 향한 비난 메시지가 8할이다. 상대가 있어야 내가 존재할 수 있는 '적대적 공생 관계'인 셈이다.분열의 언어 대신 AI로 개발한 정책으로 승부하겠다는 정치 스타트업의 포부가 신선하게 다가오는 이유다. 개혁신당의 정치 실험은 민주당 보다 국민의힘에 더 큰 잠재적 위협 요소가 될 수 있다. 기성 정치에 피로감을 느낀 보수 유권자의 표를 두고 개혁신당과도 싸워야 한다는 점에서다.물론 개혁신당의 한계는 분명하다. 한국의 정치사를 돌아보면 원내교섭단체(20석 이상)를 확보한 제3당의 성공 사례는 1996년 자유민주연합과 2016년 국민의당 등에 불과하다. 이마저도 지금은 모두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이준석 정당이란 이미지를 넘어 유능한 정치 집단으로 인식을 넓혀야 하는 과제도 있다.소수 정당이 갈 길은 최근 일본 중의원 465석 가운데 11석을 가져간 신생정당 '팀 미라이'(未來·미래)가 상상력을 제공한다. 팀 미라이는 선거 당시 주요 정당들이 앞다퉈 '소비세 감세' 공약을 내걸 때 유일하게 '현행 10% 세율 유지'를 주장했다. 미래 세대에게 국가의 빚을 떠넘기지 않겠다는 취지였다. 미래 세대를 위한 가장 확실한 투자로 자녀 수에 따른 양육세 감면 등도 약속했다.팀 미라이는 정치를 권력 투쟁이 아닌 시스템 설계의 관점으로 본다. 안노 다카히로 팀 미라이 대표가 "분열을 부추겨 표를 얻지 않겠다"고 강조한 배경이다. 새로운 시스템을 위해 AI를 정책 설계와 유세 과정에서 적극 활용했다.개인 역량은 몰라도 조직 자본에선 거대 양당에 확연하게 밀리는 개혁신당이 AI 등의 전략으로 그 격차를 메우고 6월 지방선거에서 만족할 만한 성과를 거둘 수 있을까. 정치 스타트업들이 기성 정치권에 긴장감을 불어넣어 한국의 정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리길 기대해본다.
[기자노트] 그 많은 대기업은 정말 충주맨과 협업하려 했을까
"여기가 취업 박람회보다 기업이 더 많다."충주맨 김선태 전 주무관이 개인 유튜브 채널을 개설한 지 3일 만에 구독자 100만명을 돌파했다. 누리꾼 사이에서는 100만 돌파 시점만큼이나 첫 영상 댓글창이 화제가 됐다.내로라하는 대기업 공식 채널들이 협업 제안 댓글을 앞다퉈 달며 댓글창은 순식간에 센스 각축장으로 변했다. 일주일 만에 5만8000개 이상의 댓글이 쏟아졌다."진로에 대한 관심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 진로 두꺼비" "딩동 김선태 고객님! 진심을 다하는 롯데택배입니다. 홍보맨의 새로운 채널 전국구 배송합니다" "선태님 유튜브도 식후경입니다. 오뚜기랑 밥 한끼 하시죠. 3분이면 됩니다" "에이블리도 선태 업고 튀러 왔습니다."누리꾼들은 "기업들 센스에 감탄했다"며 커뮤니티로 댓글을 퍼날랐고 이 소식이 공중파 뉴스에까지 진출했다. 취재 도중 만난 기업들에 물어보니 "진짜 협업을 제안했다기보다 트렌드에 올라타기 위한 대응이었다"는 답이 돌아왔다. 기아코리아는 아예 "뭐라고 쓸지 고민하다가 다섯 명이 야근 중"이라고 댓글을 달았다. 며칠 뒤늦게 등판한 기업들은 "본부장님 결재받고 오느라 지각했습니다" "회의하다가 이제야 왔습니다"라며 재치 있는 변명을 남겨 직장인들의 공감을 사기도 했다. 솔직함이 웃음을 자아냈지만 그 웃음 뒤에는 씁쓸한 현실이 있다.이러한 초단기 속도전은 단지 홍보·마케팅 부서만의 과제가 아니다. 소비자들의 끝없는 '도파민 갈증'은 유통·제조업의 본질인 상품 기획과 판매 지형도마저 바꿔 놓았다.트렌드 주기가 갈수록 짧아지는 것이 가장 큰 문제다. 숏폼에 익숙해진 세대는 그만큼 트렌드에 민감하고 지루함도 빨리 느낀다. 하루에도 몇번씩 새로운 자극을 찾아 쉬지 않고 움직인다.유통업계가 체감하는 변화는 수치로도 드러난다. 2024년 온오프라인 유통채널 전체 매출에서 백화점과 편의점이 차지하는 비중은 각각 17.4%, 17.3%로 불과 0.1%포인트 차이로 집계됐다. 당시 유통가는 편의점이 백화점을 턱밑까지 추격했다는 사실에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2025년 들어 백화점이 매출을 회복하며 격차를 벌리긴 했지만 언제 뒤집힐지 모른다는 불안감은 여전히 남아있는 상태다. 편의점이 이토록 성장한 이유는 단순하다. 소비자 니즈에 실시간으로 대응했기 때문이다. 짧은 주기로 트렌디한 신상품을 쏟아내며 '가까워서 가는 매장'이 아닌 '찾아가는 매장'이 됐다. 대기업 수장들도 이 흐름을 읽고 있다.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은 수년째 VCM(사장단 회의)에서 강도 높은 쇄신과 함께 '민첩함'(Agile)을 강조해왔다. 정용진 신세계그룹 회장은 올해 신년사에서 "한 발 앞서, 한 박자 빠르게 실행하라"고 주문했다. 정지선 현대백화점그룹 회장도 "빠르게 시도하고 신속하게 수정하는 기민한 실행 체계가 중요하다"고 역설했다. 이선주 LG생활건강 대표가 신년사에서 요구한 것 역시 다름 아닌 '민첩한 조직'이었다.문제는 실행이다. 복잡한 보고 체계, 길고 자세한 결재 보고서, 돌다리를 여러번 두드리는 옛날식 의사결정으로는 뒷북만 치게 된다. 지난주에 '두쫀쿠'(두바이 초콜릿+쫀득 쿠키) 유행이 지나 백화점 재고가 남아돌고 급기야 매장이 철수되는 것까지 봤는데 한쪽에서는 두쫀쿠 관련 신제품 보도자료를 보내오기도 한다. 과연 시장에서도 "결재받느라" "회의하다가" 늦었다는 변명이 통할까. 뒤늦은 출시는 애교나 읍소로 무마할 수 없다. 공들인 연구개발(R&D) 비용이 날아가고 공장 라인을 돌려 찍어낸 제품은 악성 재고가 될지 모른다.그렇다면 지금 소비자가 원하는 건 뭐일까. 정답을 찾겠다며 회의를 소집하고 보고서를 만들 생각부터 했다면 이미 늦었다. 소비자의 마음은 두쫀쿠와 봄동을 지나 이미 다음 페이지로 넘어갔다. 장고 끝에 '악수'가 아니라 '뒷북'인 시대다. 김선태 주무관이 충주맨이던 시절, "(이런 파격적인 내용으로) 시장님 결재를 어떻게 받아냈냐"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답했다. "결재받기 전에 먼저 올렸습니다."이제는 속도가 생존을 결정한다. 그러니까 '민첩' 주문하신 회장님들은 결재 라인부터 줄여주시길.
[기자노트] 달러보험은 '단타투자용' 아닙니다
"솔직히 처음엔 안 믿었죠. 보험으로 돈을 번다고 하니 좀 이상하잖아요. 그런데 친하게 지내던 설계사가 요즘처럼 고환율 시기엔 달러보험이 대세라고 하더군요. 속는 셈 치고 최근 20년 만기 상품에 가입했어요. 요즘 환율뉴스를 보면 괜히 마음이 뿌듯해져요. 잘한 선택이란 생각이 드네요."최근 기자와 만난 지인의 이야기다. 개인·기업이 '보장'을 위해 가입하는 보험이 일종의 새로운 투자처로 인식되고 있다. 달러보험은 보험료 납입과 수령이 모두 미국달러로 이뤄진다. 최근 혼잡한 중동정세 등과 맞물려 원/달러 환율이 큰 변동폭을 보이자 환차익을 노린 소비자는 달러보험으로 자산증식을 꾀하는 중이다.이같은 배경엔 '뉴노멀'이 된 고환율 시대가 자리잡고 있다. 환율이 1400원대에서 급등락을 반복하고 있으나 '언젠간 계속 오를 것'이란 시장에서의 기대감이 개인자산을 움직이고 있다. 특히 안전화폐로 인정받는 달러 관련 상품이라면 소비자의 호기심을 끌기엔 더 쉽다.달러보험은 주로 은행 방카슈랑스 채널을 통해 판매된다. 올해 1~2월 5대 시중은행(KB국민·신한·하나·우리·NH농협)에서 취급된 달러보험 판매액은 3297억원으로 전년 동기(2262억원) 대비 64.3% 증가했다. 지난해 전체 판매액은 1조7300억원으로 사상 최대치를 기록했다. 보험사에서 직접 판매한 수치를 합치면 규모는 더 커진다.은퇴 후 인생 '제2막'을 꿈꾸는 이들의 움직임도 감지된다. 특히 달러보험 일시납의 경우 일정 규모 이상의 외화를 보유해야 해 자본을 갖춘 퇴직자 등을 중심으로 가입이 늘고 있다. 한 보험업계 관계자는 "비교적 젋은층은 매달 보험료를 내는 월납을, 경제적 여유가 있는 중·장년층은 일시납을 위주로 가입률이 오르고 있다"고 설명했다.여기까지만 보면 달러보험 매입은 정상적인 투자행위로 보인다. 조금이라도 달러가 저렴할 때 미리 사둬 수익을 올리려는 건 당연하다. 문제는 판매현장에서 발생한다. 달러보험은 기본적으로 환테크 목적이 아닌 장기상품이다. 장기상품 특성상 중도 해지 시 해지환급금이 납입 원금보다 적을 가능성 역시 존재한다. 그러나 환차익에만 집중한 불완전판매가 최근 성행하고 있어 의가 필요하다."가입 10년 후 해지 시 124%의 수익이 날 수 있다는 말로 현혹했다." "연금·종신보험이란 상품 특성과 달리 환테크를 통한 수익창출이 가능하다는 점을 들어 계약을 유도했다." "환율이 오르면 추가 이자를 받을 수 있는 상품이라고 했으나 중도해지 시 해약환급금이 50%도 되지 않는 것을 가입 후에야 알았다."실제 금융당국에 접수된 달러보험 관련 민원들이다. 공통적인 건 상품의 특성을 제대로 설명하지 않은 채 환차익만을 강조했다는 점이다. 이에 금융감독원은 지난 1월 달러보험 취급 보험사 임원을 소집해 불완전판매 여부에 대한 자체 점검을 당부했다. 금감원은 보험사에서 제출한 점검 결과를 분석한 뒤 향후 현장검사 여부를 결정할 방침이다.시장 논리에 따라 발 빠르게 움직이는 개인을 나무랄 순 없다. 하지만 앞만 보고 달리다 보면 돌부리에 걸려 넘어질 수 있다. 금융당국이 올해 소비자보호를 재차 강조하고 있으나 무작정 이들을 지켜줄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금융당국이 '앞만 보고 뛰진 마세요'라는 경고문을 붙이면, 이를 잘 확인하고 천천히 뛸 때도 필요한 시점이다.
[기자노트] '생산적 금융'도 번호표 순
"지난해에는 과 전체가 '국민성장펀드'에 매달렸습니다. 이제 추진단으로 넘겼지만 사실 다른 과제는 아직 구체화할 틈이 없었습니다."최근 한 금융위원회 관계자는 이렇게 토로했다. 새 정부 출범 이후 '생산적 금융'이 핵심 정책 기조로 부상하며 당국의 역량은 인수위원회 시절부터 국민성장펀드 설계와 초기 세팅에 집중됐다. 지난해 12월 큰 틀을 잡아 추진단으로 넘긴 뒤에는 또 다른 과제들이 줄줄이 대기하고 있다. 말 그대로 정책도 번호표 순서대로 굴러가는 모양새다.정책의 우선순위를 정하는 일은 행정 효율을 위해 불가피할 수 있다. 제한된 인력과 자원 속에서 모든 토끼를 잡을 순 없어서다. 다만 새 현안이 연이어 쏟아지는 과정에서 정작 챙겨야 할 내실 있는 과제들이 손도 대지 못한 채 뒤로 밀리고 그 부담이 현장에 누적된다는 점이 문제다. 이른바 '선택과 집중'이 만들어낸 짙은 그늘이다.이 같은 흐름은 기술금융(기술신용대출) 영역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기술금융은 기술신용평가(TCB)를 기반으로 혁신·첨단기술 기업에 자금을 공급하는 제도로 담보가 부족한 유망 기업에겐 생명줄과 같다. TCB 체계를 고도화하고 은행의 리스크 부담을 낮출 정교한 유인책을 마련하는 일은 생산적 금융을 굴러가게 하는 핵심 퍼즐이다.정부의 독려 덕에 지난해 기술금융 대출 잔액은 3년 만에 반등하며 외형상 성장세를 기록했다. 하지만 현장에서 느끼는 분위기는 사뭇 다르다. 은행권에선 "숫자는 맞추고 있지만 리스크 분담 장치가 없어 적극적인 대출은 여전히 부담스럽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금융위는 기술금융 활성화를 위해 제도개선 과제를 점검하겠다는 구상이지만, 구체적인 실행 로드맵은 여전히 안개 속이다.잇따른 정책 과제 속에서 제한된 인력으로 모든 것을 추진해야 하는 실무진의 물리적 한계도 이해는 된다. 하지만 혁신 기업을 키우겠다는 생산적 금융을 전면에 내세운 상황에서 정작 그 핵심 엔진인 기업들에 대한 기술금융이 우선순위 밖에 밀려난 건 뼈아픈 대목이다.정책은 발표로 끝나는 이벤트가 아니다. 화려한 수식어를 담은 대책이 시장에 안착하려면 제도 설계 이후의 세밀한 조정과 현장의 목소리를 반영한 보완 작업이 필수적이다. 거대 담론의 설계만큼이나 중요한 건 이미 가동 중인 제도가 멈춰 서지 않게 기름을 치고 부품을 가는 일이다.혁신 기업들이 당장 원하는 건 기술력 하나로 금융의 문턱을 넘게 해주는 '디테일의 완성'이다. 이제는 번호표 뒤에 가려진 현장의 목소리에 응답해야 한다. 청사진은 이미 충분하다.
[기자노트] 부동산 정치와 정책 일관성
최근 이재명 대통령이 부동산 시장을 향해 연일 강도 높은 메시지를 내놓고 있다. 투기 수요를 억제하고 시장을 안정시키겠다는 의지는 분명하다. 오는 5월9일 양도소득세 중과 적용 등 다주택자를 겨냥한 세제·대출 규제 기조도 한층 선명해졌다. 등록 주택임대사업자도 규제 영향권에 들어섰다.그러나 임대사업자를 둘러싼 정책의 흐름을 되짚어보면 복잡한 질문이 남는다. 문재인 정부는 2017년 12월 '임대주택 등록 활성화 방안'을 발표하며 민간 임대 물량을 제도권으로 끌어들였다. 공공임대 공급에 따른 재정 부담을 덜고 세입자 주거 안정을 도모하겠다는 취지였다.정부는 임대의무기간 준수와 임대료 인상률 제한이라는 규제를 전제로 종합부동산세 합산 배제, 양도세 중과 배제, 취득·재산세 감면 등 인센티브를 제시했다. 정책 유인에 호응한 임대사업자는 2017년 말 26만여명에서 2019년 48만여명으로 급증했다. 당시 정부와 민간은 일정한 역할 분담을 한 '정책 파트너'로 기능했다.하지만 이 구조는 오래가지 못했다. 임대사업자 제도가 다주택자의 세금 회피나 갭투기(전세 낀 매수) 수단으로 이용됐다는 비판에 정책은 급선회했다. 2020년 7·10 대책을 통해 단기임대(4년)와 아파트 장기일반 매입임대(8년) 제도가 폐지됐다.이어 지난해 6·27 대출 규제와 10·15 대책을 거치며 규제지역 내 주택담보인정비율(LTV) 0% 적용, 종부세 합산 배제 제외 등 정부 기조가 임대사업자를 제한하는 방향으로 돌아섰다.최근에는 대출 만기 연장과 대환 시 임대사업자가 이자를 감당할 수 있는 지표를 나타낸 이자상환비율(RTI)을 강화하고 LTV 규제를 추가 적용하는 방안이 거론된다. 임대사업자의 신규 차입이 사실상 차단된 상황에서 기존 금융거래까지 조이는 셈이다.한때 정책 인센티브를 통해 투자에 뛰어든 임대사업자들은 제도의 역풍을 맞게 됐다. 정책 수정은 정권 교체나 시장 상황 변화에 따라 불가피할 수 있지만, 문제는 전환의 방식과 속도이다. 유인과 규제가 짧은 시간 안에 반복되면서 정책에 대한 신뢰는 땅에 떨어졌다.한 관계자는 "국가가 제시한 조건과 약속이 수년 만에 뒤집히는 일이 반복되고 있다"면서 "윤석열 정부에서 부활한 단기임대 제도도 등록률이 매우 저조했다. 언제 다시 정책이 바뀔지 모른다는 불안이 크다"고 말했다.전세사기 피해 확산과 고금리, 원자재 가격 상승 등 건설경기 침체 요인이 겹치면서 민간 임대사업자 수는 빠르게 감소하고 있다. 국토교통부에 따르면 임대사업자 수는 2020년 38만여명에서 2024년 23만여명으로 줄었다. 서울의 매입형 장기일반 민간임대주택은 80% 이상이 빌라·오피스텔 등 비아파트다. 이를 고려하면 주택임대시장의 공급 위축은 취약계층의 주거비 부담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정책을 따랐던 이들이 위험 부담을 예측할 수 없는 구조가 반복된다면 향후에도 민간의 호응을 이끌어내기는 쉽지 않다. 정부의 강한 메시지만큼 중요한 것은 정책에 대한 최소한의 예측 가능성과 일관성이다. 정책은 시험이 돼선 안된다.
[기자노트] 영풍 '환경투자 5400억' 산정 근거 제시해야
영풍이 꺼내든 석포제련소 '환경투자 5400억원' 카드가 논란의 중심에 서게 됐다. 거액을 투자했다는 입장만 내세울 뿐 세부 집행 명세를 공개하지 않아 의구심을 키운다. 그동안의 주장과 주요 회계 지표 간 괴리까지 포착되며 정확한 검증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영풍 주장이 사실과 다를 경우 시장 신뢰 훼손 등 파장이 커질 수 있다. 영풍은 2019년 환경개선 혁신계획을 발표한 이후 2020년부터 지난해 3분기까지 약 5년간 5400억원의 환경투자를 지속하고 있다는 주장을 강조하고 있다. 같은 기간 환경 복구충당부채 사용액·유형자산 취득액·수선비를 합산한 약 77000억원 중 상당 금액을 환경투자에 투입했다는 것이다. 해당 회계 지표가 설비투자와 유지보수 관련 지출을 포함하고 있어 이 중 일부를 환경투자로 분류해 5400억원이라는 숫자를 제시했을 수 있다는 가능성이 제기된다.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에 공개된 각 지표와 실제 주장 사이에 괴리가 감지된다는 문제다. 환경 리스크가 주목받지 않았던 2014~2019년까지의 6년과 환경개선 혁신계획 발표 이후인 2020~2025년 3분기까지 지출을 비교한 결과가 이를 뒷받침한다. 영풍의 유형자산 취득액(각종 설비투자 금액)은 2014~2019년 2219억원, 2020~2025년 3분기까지 3414억원이다. 통상적인 제련사업을 영위하면서 과거와 같은 유형자산을 취득했다고 전제하면 환경리스크 부각 이후 늘어난 유형자산 취득액은 1195억원이다. 여기에 2020년 이후의 복구충당부채 사용액 1566억원까지 더하면 과거 6년 대비 최근 6년간 추가 지출된 금액은 '2761억원'이다. 영풍이 주장한 5400억원과 상당한 거리가 있다. 이외에 2020~2025년 9월까지의 '회계상 당기 비용'(내용연수 1년 이하)으로 인식한 지출액 중 상당 금액도 환경투자로 분류했을 가능성도 있다. 일례로 대표적인 설비 관련 당기 비용인 수선비 중 1년 이하 성격을 지난 환경투자 지출액이 포함됐을 수 있다. 지난해 9월까지 최근 5개년 간 연평균 수선비는 451억원이다. 약 2700억원의 금액을 당기 비용으로 처리하는 게 업계에서 일반적이지 않은 만큼 그 내용을 정확히 살펴볼 필요가 있어 보인다. 다른 관점에서 보면 영풍이 2020~2025년 3분기까지의 총 유형자산 취득액 3414억원을 환경투자 비용으로 분류했을 수도 있다. 이 경우 본업 경쟁력을 소홀히 했다는 역풍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2014~2019년(2219억원)보다 훨씬 적은 비용을 썼다는 건 공장설비·기계장치 교체 등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았다는 의미로 풀이될 수 있다. 제련업은 대규모 장치 산업이라 설비 교체·보수 등의 지출이 상시 발생한다. 환경복구 의무 이행을 위해 마련한 복구충당부채가 상당액 남아있는 것도 의문을 키운다. 쌓아둔 충당부채 일부만 사용한 채 별도 추가 지출로 대규모 환경투자를 했다는 건 설득력이 떨어진다. 지난해 3분기 말 기준 영풍의 환경 복구충당부채 잔액은 2128억원이지만 실제 사용액은 1566억원에 그친다. 환경 복구충당부채 사용액이 아닌 전입액을 환경투자 금액 산정에 포함했다면 이 역시 논란의 여지가 있다. 전입액은 실제 지출한 금액이 아닌 지출 가능성에 의해 회계상 부채로 인식한 금액이라 이를 실제 투자액에 포함하는 것은 무리다. 2020~2025년 3분기까지 영풍의 환경복구 충당부채 전입액은 총 3695억원이다. 종업원 급여·광고 선전비·지급수수료·무형자산 취득·기타비용 등 또 다른 항목들이 환경투자 비용으로 계상됐을 수 있으나 실제 환경개선을 위한 투자 비용으로 적절한지는 검증해야 한다. 영풍은 얼마 전에도 환경오염 비용 과소계상 문제로 금융위원회 산하 감리위원회로부터 제재 심의를 받는 것으로 전해진다. 석포제련소 주민대책위원회는 앞서 영풍이 수조원대 환경복원 책임을 회계 장부에서 축소·은폐했다는 의혹을 제기하며 영풍과 장형진 고문 등을 자본시장법·외부감사법 위반 혐의로 검찰에 고발했다. 각종 구설에 휘말렸던 영풍은 '5400억원'이라는 숫자만 외치기보다 검증 가능한 데이터를 제시하는 책임 있는 모습을 보여 주길 바란다.
[기자노트] '코스닥' 수술은 이미 시작했는데 수혈은 언제 하나
지난 26일 코스피는 사상 처음으로 6300선을 넘었다. 3차 상법개정(자사주 소각 의무화)까지 국회를 통과하며 '코리아 프리미엄' 시대를 향한 기대감이 달아올랐다.하지만 코스닥은 아직 1100선에 머물고 있다. 1996년 7월 기준지수 1000포인트로 출범해 한때 2834포인트까지 치솟았으나 지금은 그 절반에도 못 미친다. 같은 기간 시가총액은 8.6배 올랐는데 지수는 1.6배 상승에 그쳤다. 몸집은 커졌는데 키는 그대로인 셈이다. 이 같은 역설의 답은 단순하다. 부실기업이 너무 많이, 너무 오래 살아남았다는 것이다. 지난 20년간 코스닥 신규 상장은 1353개사였지만 퇴출은 415개사에 불과했다. 진입은 넓고 퇴출은 좁은 '다산소사(多産少死)' 구조가 시장의 발목을 잡았다. 이에 대해 금융당국은 개인 비중이 지나치게 높고 기관은 없으며 증권사 분석 보고서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는 시장이라고 인정했다.현 정부는 이 구조를 정면으로 돌파하려 한다. 올해 1월 시총 상장폐지 기준을 40억원에서 150억원으로 올렸고 7월엔 200억원으로 추가 강화한다. 주가 1000원 미만 동전주 퇴출 요건도 7월부터 신설된다. 거래소 시뮬레이션 결과 올해 상장폐지 대상은 약 150개사 내외, 최대 220개사로 추산된다. 코스닥벤처펀드 세제 혜택을 평생 300만원 한도에서 연 200만원으로 확대하고, 연기금 기금운용평가 기준에 코스닥 지수를 반영해 기관 자금 유입을 유도하고 있다. 5년간 150조원 규모의 국민성장펀드도 AI·반도체·바이오 등 코스닥 주력 업종을 겨냥한다. 26일엔 재정모펀드 운용사 선정도 마쳤다. 방향은 맞다.문제는 체감이다. 정책의 방향은 옳지만 코스닥 투자자에게 먼저 도착한 건 '퇴출 명단'이었다. 150개사 상장폐지 예고는 코스닥 저가주 전반에 공포 매도로 번진 반면 국민성장펀드 자금이 실제로 기업 현장에 닿는 건 이르면 올 연말이다. 3차 상법개정도 마찬가지다. 자사주 소각 의무화로 주주 환원이 강화되고 지배구조 투명성이 높아지는 건 맞다. 하지만 혜택은 고르게 돌아가지 않는다. 강제 소각 대상 자사주 규모는 코스피 약 20조원, 코스닥 약 1조7000억원으로 10배 이상 차이가 난다. 자사주를 수십 년간 경영권 방어막으로 쌓아온 건 코스피 대형주들이었다. 이번 개정으로 가장 크게 움직이는 것도 결국 그쪽이다. 코스닥 입장에서 이번 상법개정은 남의 집 잔치에 가깝다. 치료는 시작됐는데 진통제는 아직 도착하지 않은 상황이다.이 공백을 어떻게 줄이느냐가 관건이다. 국민성장펀드 집행 일정을 앞당기는 것이 첫 번째다. 코스닥 우량주 중심 ETF를 확대해 개인에게 편중된 수급 구조를 바꾸는 것도 병행돼야 한다. 한국판 나스닥을 표방했던 코스닥이 나스닥과 달리 제자리걸음을 한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결국 기관 투자자의 부재였다. 부실을 걷어내는 작업과 살아남은 기업들을 키우는 작업은 동시에 진행돼야 한다. 한쪽 페달만 밟으면 자전거는 기울어진다.코스닥이 코스피 6300의 봄을 함께 맞으려면 이 공백이 너무 길어서는 안 된다. 수술은 이미 시작됐다. 이제는 수혈도 서둘러야 한다.
[기자노트] "절대선은 없다"…정교함 빠진 '메시지'에 흔들리는 시장
이재명 대통령이 다주택자 대출 만기 연장과 대환대출을 신규 대출과 동일한 수준으로 관리해야 한다는 취지의 메시지를 내놓으면서 금융권이 술렁이고 있다. 주택 임대사업자 대출 만기 연장과 대환까지 신규 대출과 같은 규제로 묶겠다는 취지다. 신규 대출은 막혀 있는데 기존 대출은 관행적으로 연장된다면 정책 효과가 반감될 수 있다는 지적도 일리가 있다. 하지만 '형평'이라는 잣대가 언제나 '균형'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특히 금융과 부동산 시장처럼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힌 영역에서는 더 그렇다.금융당국은 수도권·규제지역 내 아파트를 보유한 다주택자에 대해 대출 만기 연장을 원칙적으로 제한하는 '핀셋 대책' 방안을 검토 중이다. 신규 주택담보대출에 적용되는 LTV(담보인정비율) 0% 규제를 만기 연장에도 동일하게 적용하고, 임대사업자 대출에 대해 RTI(임대소득 대비 이자상환비율) 기준을 재심사 때 엄격히 적용하는 방안 등이 거론된다. 자본규제 강화까지 테이블에 오른 상황이다.문제는 연장의 성격이다. 신규 대출은 미래의 레버리지를 새로 일으키는 행위지만, 만기 연장은 기존 계약을 전제로 한 유동성 관리의 성격이 강하다. 가계 주담대의 경우 원리금 분할상환 비중이 높아 구조적으로 만기 일시상환 비중이 크지 않다. 은행권에서는 "다주택자에게 연장해야 할 가계 주담대 자체가 많지 않다"는 말도 나온다.실질적으로 영향권에 들어갈 가능성이 있는 영역은 2023년 이후 한시적 규제 완화로 취급된 주택임대사업자 사업자대출이다. 당시 LTV 30% 이내, RTI 요건 충족 등을 조건으로 일시상환 방식 대출이 허용됐다. 다만 은행권 설명을 종합하면 이 비중은 생각보다 크지 않다. 상당수가 아파트보다 빌라·오피스텔 등 비아파트 주거용 자산에 묶여 있다.여기서 또 다른 균형 문제가 발생한다. 서울 장기매입 임대주택의 상당 수가 비아파트다. 임대사업자는 원룸·오피스텔 등에서 전월세 공급의 한 축을 맡고 있다. 모두가 집을 소유할 수 없는 구조에서 누군가는 소유하고 누군가는 임차하는 시장이 형성된다. 임대사업자를 일괄적으로 '문제 집단'으로 보는 시각에 대한 반발이 나오는 이유다.연장이나 대환대출까지 신규 대출과 똑같이 묶어 제한하면, 그동안 성실하게 이자를 갚아온 차주들도 한꺼번에 돈을 갚아야 하는 상황에 놓일 수 있다. 갚을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당장 현금을 마련하지 못해 연체가 발생하는 경우도 생길 수 있다는 뜻이다. 이런 상황이 늘어나면 결국 은행의 건전성에도 부담이 된다.집을 급하게 팔아야 하는 사례가 늘면 매물이 쏟아지고, 가격이 내려가며 담보 가치가 떨어지는 악순환으로 이어질 가능성도 있다. 실제로 최근 서울 아파트 매물은 빠르게 증가하고 있고, 일부 단지에서는 가격이 낮아진 거래도 나타나고 있다. 정책 방향이 바뀌었다는 신호만으로도 시장은 이미 움직이고 있다.물론 가계부채 관리의 필요성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레버리지에 기대어 집값 상승을 추종하는 구조를 방치할 수 없다는 문제의식 역시 타당하다. '신규는 막고 연장은 허용'하는 구조가 정책의 빈틈으로 작용해왔다는 지적도 일면 맞다.그러나 정책에는 언제나 속도와 강도의 문제가 따른다. 형평성 확보라는 대의가 현실의 균형을 깨뜨릴 정도로 급격하게 적용될 경우, 그 충격은 다주택자에 그치지 않는다. 전월세 시장, 금융회사 건전성, 나아가 무주택 세입자에게까지 파급될 수 있다.은행권 관계자는 "정책 취지에는 공감하지만, 어떤 대상에 어떤 기준을 적용할지 명확해져야 시장 충격을 가늠할 수 있다"며 "단계적·선별적 접근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경제 정책에 '절대선'은 없다. 다만 충격을 최소화하는 설계는 가능하다.형평의 잣대가 시장을 바로 세우는 도구가 될지, 균형을 무너뜨리는 칼날이 될지는 세부 설계에 달려 있다. 지금 필요한 것은 강한 메시지보다 정교한 기준이다.
[기자노트] 거래소 시간 연장, 누구를 위한 개혁인가
한국거래소가 오는 6월 말 주식거래 시간을 오전 7시부터 저녁 8시까지, 하루 13시간으로 확대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글로벌 경쟁력 강화라는 명분을 내세우고 있으나 증권업계의 반발은 가라앉지 않고 있다. 전국사무금융노동조합은 지난달 두 차례 성명을 통해 "명분 없는 졸속 추진"이라며 강력한 반대 의사를 표명했고 증권사들도 시스템 준비 부족에 대한 우려를 쏟아내고 있다. 이재명 대통령이 '공정한 시장 구축'을 주문했음에도 거래소는 그 해법을 엉뚱하게도 '거래시간 확대'에서 찾고 있는 모습이다.거래소가 서두르는 배경에는 지난해 출범한 대체거래소 넥스트레이드에 대한 경계심 때문이다. 노조 측은 성명에서 "넥스트레이드의 오전 8시 개장으로 인한 거래소의 수익성 악화를 만회하려는 점유율 방어"라고 지적했다. 실제로 넥스트레이드 참여사가 늘어나자 거래소는 한 시간 더 빠른 '7시 개장'이라는 맞불을 놓은 셈이다. 거래 연장 명분으로 '글로벌 스탠다드'를 내세우지만 대표 사례로 꼽히는 미국의 24시간 거래는 동·서부 간 시차 해결이 목적이다. 단일 시간대인 한국에서 새벽 개장과 거래시간 연장이 과연 어떤 효용가치가 있을지 반문하지 않을 수 없다.촉박한 추진 일정 역시 문제다. 거래소는 3월 중순까지 시스템 개발을 완료하고 모의시장을 운영할 계획이지만 실제 개발 기간은 2~3개월에 불과하다. 증권사들이 HTS와 MTS 등 모든 채널을 전면 개편해야 하는 점을 고려하면 물리적인 준비 시간이 턱없이 부족한 상황이다.자금력이 취약한 중소형사들엔 더 가혹한 현실이 기다리고 있다. 수십억원의 비용이 투입된 과거 넥스트레이드 사례를 반추해보면, 이들은 이미 감당하기 버거운 '선택의 기로'에 내몰린 셈이다. 거래소 측은 '자율 참여'라고 선을 긋지만 업계가 선택할 수 있는 폭은 사실상 제한적이다. 초기 15곳에 불과했던 대체거래소 참여사가 치열한 경쟁으로 인해 현재 32곳으로 늘어난 사실이 이를 방증한다. 더 심각한 대목은 감시 체계의 허점이다. 노조는 성명에서 "지금도 인력 부족으로 이상 거래 징후 포착에 한계가 있는 상황에서 감시 시스템 고도화와 인력 충원 없는 새벽 개장은 투기 세력에게 활개 칠 시간만 벌어주는 꼴"이라고 비판했다. 현재도 거래소는 감시 인력 부족으로 이상 거래 징후를 실시간 포착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이런 상황에서 거래 시간을 연장하는 것은 사각지대를 넓혀 개인투자자의 피해를 방치하겠다는 것과 다름없다.대통령이 강조한 시장개혁의 본질은 불공정 거래 척결과 투명성 확보다. 주가 조작과 부실한 상장 심사 등 뿌리 깊은 적폐를 도려내라는 취지였지만 거래소는 이를 '영업시간 연장'으로 오독했다. 시장에 대한 신뢰는 '문을 여는 시간'이 아니라 '규칙의 엄정한 집행'에서 나온다. 서학개미들이 미국 시장을 찾는 이유 역시 긴 거래시간 때문이 아니라 시장 시스템을 믿기 때문이다.따라서 거래소가 진짜 개혁에 나서려면 방향을 바꿔야 한다. 불공정 거래 적발 시스템 강화와 상장 심사 기준 정비가 우선이다. 운영시간을 늘린다고 글로벌 경쟁력이 높아지는 것은 아니다. 현장의 준비 상태를 무시하고 일정부터 못 박는 방식이 과연 시장 선진화로 가는 길인지, 이제라도 거래소는 스스로에게 되물어야 할 때다.
[기자수첩] '소통 강조' 이 대통령, 외면받는 제약업계
"소통과 대화를 복원하고 양보하고 타협하는 정치를 되살리겠습니다."(지난해 6월4일 이재명 대통령 취임사)"산업 현장의 목소리를 외면한 산업 정책은 결코 성공할 수 없습니다."(지난 22일 약가 제도 개편 현장간담회 노연홍 한국제약바이오협회장 발언)이재명 대통령은 소통을 강조하며 임기를 시작했다. 이후 국무회의와 지역 타운홀 미팅을 생중계하는 등 소통 정치를 본격화했으나 정작 제약업계의 목소리는 듣지 않는다는 지적이 잇따른다. 제약산업 경쟁력 약화, 양질의 일자리 축소 등과 직결되는 약가 제도 개편에 대한 업계 우려를 고려하지 않는다는 게 핵심이다.정부는 약가 제도를 개편해 현재 오리지널 의약품의 53.55%인 제네릭(복제약) 약가 산정률을 40%대로 낮출 계획이다. 국민의 약제비 부담을 경감하고 제약사의 신약개발을 독려하겠다는 취지다. 약가 제도는 다음 달 건강보험정책심의위원회 의결을 거쳐 올 하반기 개편될 예정이다.정부의 약가 제도 개편 추진 소식이 들리자 업계는 즉각 반발했다. 제약산업의 근간이 흔들릴 것이란 이유에서다. 정부가 제네릭 약가 인하 취지 중 하나로 내세운 신약개발 투자 역시 되레 위축될 가능성이 크다고 업계는 평가했다.국내 제약사들은 제네릭에서 창출한 수익을 신약개발 R&D(연구·개발)에 투자하는 사업 구조를 갖고 있다. 제네릭 수익이 끊기면 R&D 투자 위축은 불가피하다. 정부의 약가 제도 개편안으로 인한 산업계 매출 축소 규모는 3조6000억원에 달할 전망이다. 한 대형 제약사 관계자는 약가 개편으로 순이익의 20% 정도가 증발할 것으로 내다봤다. 기업 수익이 1% 감소할 경우 R&D 활동은 1.5% 줄어들 것으로 제약업계는 예상한다.약가 제도가 개편되면 양질의 일자리가 감소할 것이란 걱정도 잇따른다. 제약업계 노동자도 약가 제도 개편에 반대하는 배경이다. 제네릭 약가 인하로 기업의 수익성이 꺾일 경우 대규모 구조조정은 불 보듯 뻔하다. 약가 제도 개편 시 산업 전체 종사자 12만명 중 10% 이상이 실직할 전망이다. 한국노동조합총연맹(한국노총) 화학노련 의약·화장품분과는 약가 제도 개편으로 인한 고용불안에 맞선 투쟁을 고려하고 있다.제약업계는 지난해 11월 '약가 제도 개편 비상대책위원회(비대위)'를 꾸리고 약가 제도 개편의 부당함을 호소하고 있으나 정작 정부는 귀를 닫은 모양새다. 언론 기자회견과 현장간담회를 진행해도 정부의 공식적인 반응이 없다. 업계 관계자는 "정부가 이미 답을 정해놓은 것 같지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고 토로했다.이 대통령은 평소 국민 집단지성의 중요성을 강조해 왔다. 바탕은 국민과의 소통이다. "급격하고 전례 없는 규모의 약가 인하가 그대로 시행된다면 전면적 투자 중단은 물론 생산, 연구, 품질관리 등 국내 제약산업 전 부문에서 일자리 감축 사태가 빚어질 것"이라는 비대위의 '의약품 생산 최전선에서 드리는 호소문'에 대해서도 귀를 열길 바란다.
[기자수첩] 국가대표 AI 재공모, 패자부활전 vs 패자낙인전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추진 중인 독자 AI 파운데이션 모델 프로젝트가 흔들리고 있다. 지난 15일 1차 평가 결과를 통해 SK텔레콤, LG, 업스테이지 컨소시엄만 남기고 네이버클라우드와 NC AI 컨소시엄을 탈락시키면서다. 당초 정부는 4강 체제를 전제로 사업을 설계했지만 3강 구도로 급선회했다.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과기정통부가 남은 한 자리를 두고 재공모 절차를 시작하겠다고 밝히면서 혼란은 더 커지고 있다.과기정통부는 네이버클라우드에겐 '독자성' 부분을 지적하며 국가대표 AI의 자리를 허락치 않았고 NC AI에겐 성능 미달을 이유로 들었다. 충격적인 결과를 발표하면서 과기정통부는 남은 한 자리를 두고 패자부활전을 제안했다. 자칫 기회의 문이 열리는 것처럼 들릴 수 있지만 기업들이 받아들이는 현실은 딴판이다. 개인 개발자나 소규모 업체라면 '도전정신'으로 포장할 수 있지만 대기업이나 중견 IT 기업에겐 '독이 든 성배'다. 국책 사업에서 미끄러지는 것은 곧바로 '실패한 기업'이라는 낙인으로 이어진다. AI처럼 기술력과 신뢰도가 브랜드 가치에 직결되는 분야에서는 한 번의 탈락이 갖는 상징성이 가볍지 않다.이미 탈락한 기업들이 난색을 표하는 배경도 여기에 있다. 이미 1차 평가에서 "기준에 미달했다"는 공식 판단을 받은 상황에서 다시 도전하는 것은 성공하더라도 부담이 남고 탈락하면 치명상이 될 수 있다. 두 번 연속 정부 평가에서 떨어진 기업이라는 꼬리표가 붙게 된다. 더 큰 문제는 재공모를 통해 이전보다 진일보한 아이디어가 나올 수 있느냐는 점이다. AI업계는 회의적으로 본다. 앞선 공모를 거치며 국내 주요 기업들은 보유한 기술력과 전략은 대부분 공개했다. 수개월에 걸친 준비 끝에 제출된 제안서들 가운데 우수한 아이디어와 현실적인 방안들은 1차 공모에서 상당 부분 소진됐다. 짧은 시간 안에 기존 제안보다 확연히 앞선 구상이 새롭게 등장하기는 쉽지 않다. 기존에 제출됐던 안을 일부 수정하거나 표현을 바꾸는 수준에 그칠 공산이 크고 이를 두고 '새로운 경쟁'이라고 부르기에는 무리가 있다. 한 차례 탈락했던 기업이 재공모를 통해 통과할 경우 이번에는 또 다른 형태의 공정성 논란이 불거질 수 있다. '처음에는 왜 떨어뜨렸느냐', '재도전에서 기준이 완화된 것 아니냐'는 의문이 뒤따를 수밖에 없다. 애초에 네이버클라우드와 같은 대형 사업자에 대해 조건부 합격이나 보완 기회를 부여하는 방식이 더 합리적이었을 것이라는 시각도 있다. 1차 평가 발표 전 중국산 AI 논란이 커질 때라도 기준을 분명히 밝혔으면 갑자기 달라진 3강 구도에 대한 의구심도 적었을 것이다. 독자 파운데이션 모델은 단기간 성과를 내기 어려운 사업인 만큼 기술력뿐 아니라 장기적인 투자 여력과 운영 역량이 필수적이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일정 수준의 체급을 갖춘 기업들이 대거 이탈한 상태에서 사업이 과연 실질적인 성과를 낼 수 있을지 의문이라는 목소리가 커진다. 현재까진 AI 스타트업 모티프테크놀로지스와 트릴리온랩스만 출사표를 냈다. 이에 재공모 논란은 '패자부활전'이 아니라 '패자낙인전'이라는 표현이 어울린다. 형식적으로는 다시 한 번 기회를 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기업 입장에서는 실패의 기억을 되살리고 추가적인 리스크를 떠안는 선택이기 때문이다. 이는 도전의 장려가 아니라 도전을 주저하게 만드는 구조다. 국책 사업은 무엇보다 예측 가능성과 일관성이 중요하다. 평가 기준이 어떻게 적용되고 탈락 이후 절차가 어떻게 이어지는지 명확해야 기업들도 전략을 세울 수 있다. 이번처럼 계획이 수시로 바뀌고 탈락 이후의 경로가 불투명하다면 향후 과기정통부가 추진하는 다른 국책 사업들 역시 신뢰를 얻기 어려울 수밖에 없다.중요한 사업일수록 국가의 백년대계가 걸린 만큼 잡음이 나와선 안 된다. 이번 독자 AI 파운데이션 모델 사업이 시작부터 '기술 경쟁'이 아닌 '절차 논란'으로 기억될 개연성이 크다. 그 부담은 정책을 믿고 뛰어든 기업들과 장기적인 국가 AI 경쟁력이 짊어져야 할 수 있다.
[기자수첩] 지역 인재 전형, 공기업 경쟁력 떨어뜨렸다
지역균형발전을 목적으로 도입된 공공기관의 지역인재 의무채용 제도가 대학 내 카르텔을 고착화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혁신도시로 이전한 기관들이 지역 대학 출신의 비율을 맞추는 과정에 인재풀은 더 좁아지고 특정 대학 중심으로 채용 쏠림 현상마저 심화돼 제도의 취지가 왜곡되고 있다.2018년 도입된 지역인재 의무채용은 지방에 양질의 일자리를 공급하는 지역균형발전을 목표로 설계됐다. 국토교통부 산하 한국토지주택공사(LH)·한국국토정보공사(LX)·한국도로공사·주택도시보증공사(HUG)·한국부동산원 등 주요 공공기관은 2022년까지 신규 채용의 30% 이상을, 이후에는 법 개정으로 35% 이상을 지역인재로 뽑아야 한다.LH의 지역인재 채용률은 2018년 19%→2020년 24%→2022년 35%→2024년 33% 등으로 증가세를 보였다. 한국도로공사와 LX도 해당 비율이 2018년 20% 미만에서 2024년 30% 이상으로 늘었다. 부산에 위치한 HUG는 30% 이상을 유지했고 부동산원은 2024년 기준 50%를 기록했다. 겉으로 드러난 지역인재 채용 달성률의 이면에 다양성의 붕괴라는 새로운 문제가 드러났다. 전문성 확보의 어려움, 지역 간 형평성 논란이다. 공공기관 내부에서 구조 문제로 지적돼 온 전관예우·카르텔이 신규 채용으로 내려와 더욱 견고한 그들만의 성을 구축했다는 우려도 나온다.특정 대학 인맥 중심의 폐쇄적인 네트워크가 형성되면 인사·승진·부서 배치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게 관계자들의 말이다. 이는 투명하게 운영돼야 할 공공기관의 경쟁력 저하로 이어질 수 있다.전북혁신도시(전주)의 전북대·전주대, 강원혁신도시(원주)의 강원대, 경남혁신도시(진주)의 경상대 등이 대표 사례다. 동일 지역 출신이라도 타 지역 대학의 졸업자가 채용 기회에서 배제되는 차별은 오래전부터 논란이 돼왔다. 이는 전문성 확보와 경쟁력 강화라는 공공기관 본연의 역할과는 충돌한다. 국토부 산하 기관들은 사업 특성상 기술·안전 분야와 부동산 분석 등 높은 전문성을 필요로 한다. 인재 수급의 다양성이 약화되고 있다는 우려의 소리가 거세다.혁신도시 기업의 한 관계자는 "전문직렬이 특정 대학의 커리큘럼만으로 수요를 채워선 안된다"며 "내부에서 필요 인재보다 비율을 채울 수 있는 인재를 뽑아야 한다는 자조가 나온다"고 말했다.지역 의무채용제도는 해마다 강화돼 지방대와 공공기관 간 인련 순환이 고착화되고 있다. 앞으로 부동산과 건설산업은 인프라 고도화와 재난안전 시스템, 미래도시 전략 수립 등 복잡한 업무를 수행해야 하며 지역 편향 채용에 대한 고민을 다시 해야 한다.공공기관이 우물 안 개구리가 되지 않도록, 혁신도시는 지역을 가두는 울타리가 아니라 더 폭넓은 인재를 끌어들이는 열린 플랫폼 되어야 한다.
[기자수첩] '컨트롤타워' 부재에 멈춰 선 현대차 자율주행
세계 최대 규모의 생산시설을 갖추고 수십 년간 자동차 산업을 이끌던 기업이 있다. 이 회사는 막대한 자본을 투입해 소프트웨어 전문 자회사를 세우고 수천명의 개발자를 영입해 자율주행 기술 개발에 나섰다. 더 이상 기름 냄새 나는 제조사가 아닌 '테크 기업'으로 거듭나겠다는 야심 찬 포부도 밝혔다. 결과는 처참했다. 부서 간 주도권 다툼 속에 소프트웨어 개발은 지연됐고 핵심 모델 출시는 수년씩 늦어졌다. 결국 경영진 교체와 수익성 악화라는 후폭풍으로 되돌아왔다.전기차·소프트웨어 전환 실패의 교과서로 불리는 독일 폭스바겐과 자회사 카리아드의 사례다. 하드웨어의 강자가 소프트웨어라는 낯선 영역에서 어떻게 침몰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이 이야기는 더 이상 남의 나라 얘기가 아니다.폭스바겐의 비극은 현재 대한민국 자동차 산업의 심장부인 현대자동차그룹에서도 반복되고 있다. 그룹의 미래 먹거리 SDV(Software Defined Vehicle) 전략을 총괄하던 핵심 수장의 자리가 공백이다. 네이버 최고기술책임자(CTO) 출신으로 기대를 모았던 송창현 사장이 물러난 이후 그가 이끌던 AVP(미래차플랫폼) 본부의 사령탑은 여전히 비어 있다.현대차그룹은 포티투닷(42dot)에 수조 원을 투입하고 있지만 그룹 전체 소프트웨어 아키텍처를 통합·조율할 실질적 리더십은 약화된 상태다. 하드웨어 중심의 기존 조직과 소프트웨어 중심의 신설 조직 사이에서 갈등을 중재하고 방향을 제시해야 할 구심점이 사라진 셈이다.인선이 지연되는 사이 글로벌 경쟁 구도는 빠르게 재편되고 있다. 테슬라는 통합 전자제어장치(ECU)와 자체 운영체제(OS)를 기반으로 차량 전체를 실시간으로 업데이트하는 OTA 체계를 이미 구축했다.더 위협적인 존재는 중국이다. 샤오미와 화웨이 등 빅테크가 가세한 중국 전기차 업계는 '바퀴 달린 스마트폰'을 구현하는 속도에서 전통 완성차 업체들을 앞질렀다는 평가를 받는다.중국차의 경쟁력은 단순한 가격이 아니다. 스마트폰 수준의 유연한 사용자 경험(UX)과 이를 뒷받침하는 소프트웨어 아키텍처에 있다. 현대차가 하드웨어 신뢰도를 쌓는 데 50년이 걸렸다면 소프트웨어 경쟁은 그 10분의 1 시간 안에 판가름 난다. 이 속도전에서 전략을 설계하고 진두지휘할 C레벨의 부재는 사령관 없이 전장에 나선 군대와 다르지 않다.OS 개발이 늦어지고 통합 플랫폼 구축이 지연된다면 현대차의 SDV는 겉모습만 스마트한 자동차에 머물 수 있다. 하드웨어 경쟁력이 정점에 이른 지금이 오히려 가장 위험한 시점이다. 한때 휴대폰 시장의 절대 강자였던 노키아가 구시대적 OS에 안주하다 아이폰 등장과 함께 몰락했듯 자동차 산업에서도 같은 장면이 재현되지 말라는 법은 없다. 폭스바겐이 카리아드 실패 이후 리비안에 수조원을 투자하며 외부 기술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사례는 현대차에도 중요한 시사점을 던진다.
[기자수첩] 무너진 사전청약, 공급 실험이 남긴 불신
사전청약 제도는 집값 급등기였던 문재인 정부 시절 공급 신호를 앞당겨 시장 불안을 잠재우기 위한 카드로 등장했다. 무주택 실수요자에게 청약 기회를 제공해 희망을 주고, 정부로서는 단기간에 공급 성과를 보여줄 수 있다는 판단이었다. 하지만 속도를 앞세운 정책 실행 과정에서 사업 무산 시 책임 구조와 리스크 관리 장치는 충분히 마련되지 못했다.급조된 정책의 위험 부담은 자연스레 수요자에게 전가됐다. 2021년 정부는 사전청약을 통해 99개 단지(5만2000가구) 공급 계획을 발표했지만 실제 본청약까지 이어진 단지는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입주 지연 등 부작용이 속출하자 정부는 지난해 5월 제도 도입 3년 만에 신규 사전청약을 사실상 폐지했다. 정책이 허술하게 설계됐다는 방증이다. 올 들어 사전청약이 무산된 경기 파주운정3지구의 재입찰 결과는 속도에 쫓긴 정책의 한계를 적나라하게 드러낸 사례다. 계약을 포기했던 기존 시행사의 관계사가 해당 공공택지를 다시 낙찰받는 과정은 현행 제도 안에서 가능했다. 인창개발은 동일 법인이 아니라는 점을 들어 특수관계 법인을 앞세운 우회 참여에 성공했다. 계약 포기에 따른 실질적인 제재가 이뤄지지 않은 것이다.당국은 '합법적 재입찰'이었다고 설명하지만 정책 신뢰는 크게 훼손됐다. 파주운정3지구의 사전청약 당첨자들은 "지난 10월 해약 처리가 끝났는데 불과 한 두 달 사이에 기업의 재무 상태가 얼마나 달라졌는지, 투자 여력이 실제로 확보됐는지 믿을 수 없다"며 "과연 사업이 끝까지 정상적으로 진행될 수 있을지 불안하다"고 우려한다. 당시 정부는 대규모 물량을 빠르게 확보하는 데 집중한 나머지 사업을 이끌 시행사의 재무 안정성에 대한 검증은 부족했다. 이행 보증 강화나 사업 포기 불이익 등 계약 이행의 실패에 대비한 책임 구조도 정교하게 설계하지 못했다. 가장 큰 문제는 정부의 청약 시스템이 청약자의 지위 상실을 너무 쉽게 감내하도록 설계됐다는 점이다. 사전청약은 수요자에게 기다림을 요구하는 제도다. 사전청약 당첨자는 입주까지 통상 5~7년 이상을 기다려야 한다. 이 기간 동안 다른 청약 기회를 포기하고 주거 계획을 유예한다. 그럼에도 사업 지연이나 시행사 변경 과정에서 발생하는 불확실성은 고스란히 개인의 몫으로 남는다.사전청약은 기다린 시간만큼 손해가 쌓이고 피해는 뒤늦게 드러나는 지연형 리스크다. 기다림이 비용이 되는 구조에서, 내 집 마련을 기대하며 기다린 이들로서는 제도를 믿고 선택한 시간이 손실로 돌아온다고 느낄 수밖에 없다. 정부의 주택 정책은 '공급 확대'라는 단일 목표에만 집중해왔다. 어떤 방식의 공급인지, 누가 어떻게 책임을 지는 공급인지 후순위다. 그 결과 사전청약은 청약 시점을 앞당긴 제도가 아니라 주거 선택권을 장기간 묶어두는 제도로 작동했다. 지금 필요한 것은 보다 촘촘한 정책 설계를 통해 시장 신뢰를 회복하는 일이다. 내 집 마련의 꿈을 지탱하는 국가 시스템 전반을 재점검해야 한다.
[기자수첩] 은행 달력이 사라지지 않는 이유
"은행 달력 있어?" 연말이 되면 어김없이 주변에서 이런 질문을 받는다.휴대폰 앱 하나면 일정 관리가 충분한 시대지만, 은행 달력만큼은 여전히 자리를 지킨다. 집에 걸어두면 돈이 들어온다는 말은 반쯤은 우스갯소리처럼 들리지만, 어쩐지 희망을 걸고 싶은 오래된 믿음이기도 하다. 연말이 되면 중고거래 사이트에서 은행 달력은 귀한 몸이 돼 웃돈을 얹어 거래된다.은행은 돈을 다루는 금융기관을 넘어 서민들의 거실과 책상 위까지 들어왔다. 연말이면 부지런히 새해를 맞이한 은행 달력이 가장 사적인 공간에 걸린다.이는 사회가 은행을 단순 금융기관 이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은행이 주는 안정감에 기대 한 해를 정리하고 다음 해를 준비하는 연말 풍경이 반복되는 이유다.내년 은행들의 달력을 채우는 건 다름 아닌 '생산적 금융'이다. 정부의 '생산적 금융 대전환'에 맞춰 은행들은 대규모 관련 투자 계획을 잇달아 내놓고 있다. 이제 은행은 '돈을 얼마나 벌었는가'보다 '돈을 어디로 흘러가게 했는가'로 평가받는다. 부동산 등이 아닌 자영업자와 소상공인, 혁신 기업과 미래 산업으로 자금이 흐르도록 만드는 생산적 금융은 은행의 선택이 아닌 역할에 가깝다.신한은행은 초혁신경제·국가핵심 산업 및 제조업 등을 대상으로 총 6조9000억원 상당의 '생산적 금융 성장지원 패키지'를 가동했고 하나은행은 신용보증기금과 기술보증기금에 98억원을 추가 출연해 4500억원 규모의 생산적 금융을 본격화한다.우리은행은 기술주도 신사업과 성장기반 분야의 중소·벤처기업을 지원하기 위해 기술보증기금에 50억원을 특별 출연하고 약 2000억원 규모의 대출을 공급할 예정이다. KB국민은행 역시 신용보증기금과 기술보증기금에 총 140억원 규모의 출연을 통해 협약 보증서를 담보로 약 4000억원 규모의 대출을 지원한다.다만 이를 둘러싼 환경은 녹록지 않다. 고환율 기조가 장기화되며 자금 조달 비용과 건전성 부담이 커졌고 경기 둔화 속에서 대출 리스크 관리에 대한 압박도 커지고 있다. 급격한 자금 공급 확대 역시 은행에겐 부담이다.하지만 은행을 향한 사회적 기대는 줄지 않는다. 은행은 이제 여신·수신 기능을 넘어 자금이 우리 사회 어디로 흘러가야 하는지를 보여줘야 하는 위치에 서 있다. 실적 방어는 물론 금융 생태계 관리까지, 내년 은행들의 달력은 그 어느 때보다 무겁고 빼곡하게 채워질 전망이다.내년 연말에도 사람들은 또다시 은행 달력을 찾을 거다. 은행이 지켜온 신뢰가 증명되는 한 해가 되기를 바란다.
[기자수첩] 법인 가상자산 시장 참여, 이번엔 놓치지 말아야 한다
업비트·빗썸·코인원 등 국내 가상자산 거래소들이 앞다퉈 법인 고객 유치 경쟁에 나섰지만 정작 이를 뒷받침할 정부의 가이드라인은 여전히 완성되지 않아 업계 혼선이 이어지고 있다.금융위원회 산하 가상자산위원회는 최근 반년 동안 공식 움직임이 없었다. 올해 초 1단계 법인 시장 참여를 허용한 뒤 지난 5월 제4차 회의가 마지막이다. 정책 논의가 중단되는 동안 시장의 불확실성은 커졌고 제도 공백이 지속됐다. 당국은 당초 올해 안에 가상자산 거래소의 법인계좌 운영 및 관리에 관한 가이드라인을 발표할 예정이었다. 올해는 한 달도 채 남지 않았고, 가상자산위원회는 여전히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다.법인의 가상자산 시장 참여는 거래소 입장에서 단순한 고객층 확대가 아니라 시장 구조의 질을 바꿀 기회다. 개인 중심 시장은 변동성이 커질 수밖에 없지만, 법인이 참여하면 거래 규모와 유동성이 늘어 가격 충격이 줄어들고 시장 안정성이 확보된다. 거래소들이 법인 서비스에 투자를 아끼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개인 투자자만 참여하는 건 가상자산 산업과 시장 성장에 한계 구조를 만든다. 닫힌 문이 열리면 바로 서비스를 활성화할 수 있도록 거래소들은 이미 준비를 끝냈다. 검찰·세무 당국·지자체 등 몰수 자산 처분 법인, 기부 코인을 처리해야 하는 학교·단체, 수수료로 가상자산을 수취하는 거래소 등 이미 현금화가 필요한 법인 수요도 꾸준히 존재한다. 전문 투자 법인과 기관투자자는 재무·투자 목적의 가상자산 활용 수요까지 갖고 있다.문제는 법인 참여가 막혀 있다는 점이 기업 경영의 활동까지 제약한다는 것이다. 블록체인 서비스 도입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발생하는 토큰 취득·처분이 제도적으로 허용되지 않아 회계·세무 처리에 혼란이 생기고 변동성 헤지 등 기본적 재무 관리도 불가능하다. 이는 결국 자본·기술·인재의 해외 유출로 이어져 기업들이 미국·싱가포르 등 법인 친화적 국가에서 사업을 전개하는 악순환을 초래했다. 대기업 투자와 스타트업 창업 모두 해외 중심으로 재편된 것도 이러한 구조적 제약 때문이다.나아가 법인 참여는 글로벌 규제 논의를 따라가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이기도 하다. 스테이블코인 이용자 상당수가 법인이고, 가상자산 현물 ETF(상장지수펀드) 도입을 위해서는 증권사·운용사가 기초자산을 보유할 수 있어야 한다. 즉 법인이 시장에 들어오지 못하면 ETF·기관투자·증권사 참여·외국인 유입 등 다음 단계의 산업 확장은 불가능하다. 여러 규제 과제의 시작점이 법인 참여라는 점에서 이를 제도권에 편입하지 못하면 한국 가상자산 산업은 글로벌 경쟁력 회복의 기회를 잃을 수밖에 없다.한국의 현실은 글로벌 흐름에 뒤처질 위험에 놓였다. 미국, EU(유럽연합), 일본, 싱가포르 등이 이미 법인 중심 규제 체계를 정비하고 ETF·스테이블코인 규율을 마련했지만 한국은 여전히 멈춰있다. 글로벌 가상자산 시장이 법인 중심 구조로 구성되는 가운데 정체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격차는 더 크게 벌어질 수밖에 없다.숫자로 보면 위험성이 더욱 도드라진다. 금융정보분석원(FIU) 조사에 따르면 가상자산시장 참여 일반법인 개수는 2021년 하반기 4500곳에서 2025년 상반기 220곳으로 줄었다. 이는 국내 시장에서 규제와 정책의 영향으로 법인들의 가상자산 시장 참여가 위축된 것을 보여준다. 업계가 일반법인 시장 참여 로드맵 완성이 시급하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현 정부의 가상자산 ETF 도입에서도 법인 참여는 핵심 전제조건이다.2017년 이후 7년 동안 이어진 부정적 규제 기조는 벤처 인증 제외, ICO(가상자산공개) 금지, 외국인·법인 진입 제한으로 이어졌고 국내 스타트업 생태계는 사실상 고사했다. 그 사이 코인베이스 등 해외 기업은 몇 단계나 앞서 나갔다. 업계 관계자들이 "또다시 같은 실수를 반복할 수 없다"고 말하는 이유다.정책이 산업 속도를 따라가는 것은 어렵지만 지금 한국은 따라가기 위한 시도조차 멈춰 있는 상황이다. 법인 참여 가이드라인 완성이 지연될수록 한국은 글로벌 경쟁에서 다시 한번 뒤처질 가능성이 커진다. 거래소도 기업도 준비를 마쳤다. 법인의 가상자산 시장 참여는 선택지가 아니라 글로벌 시장에서 살아남는 생존 조건이다. 이번엔 타이밍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기자수첩] 예금도 펀드도 아닌 IMA… 성공 열쇠는 '시장 신뢰'
"시장에 없던 새로운 상품이니까요. 당국도 업계도 투자자도 다 긴장하고 있죠."최근 만난 IB(투자은행)업계의 한 전문가는 종합투자계좌(IMA) 첫 상품 출시를 앞두고 이같이 말했다. 초대형 IB 육성제도가 국내에 도입된 지 8년 만에 국내 최초로 IMA 인가를 받은 한국투자증권과 미래에셋증권은 연내 첫 상품 출시를 앞두고 있다.IMA는 정부가 강조해 온 '생산적 금융'과 '모험자본 공급'이 제도권 안에서 처음 현실화한 사례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자기자본 8조원' 문턱을 넘은 초대형 증권사 신용을 바탕으로 하는 IMA 상품 출시로 국내 장기·모험자본이 안정적으로 흘러갈 수 있는 제도적 관문이 마련됐다는 평가다.하지만 새로운 제도를 받아들이는 시장의 경계심과 리스크도 적지 않다. IMA는 고객이 예탁한 자금을 증권사가 통합 운용해 수익을 나누는 구조로 예금도 아니고 펀드도 아닌 독특한 형태다. '원금보장형 실적배당 상품'이라는 장점이 있지만, 중도 환매 시 손실이 발생할 수 있는 구조적 특성도 함께 갖고 있다. 문제는 이 생소하고도 복잡한 구조가 시장은 물론 투자자에게도 너무나 낯설다는 점이다. 만약 투자자에게 상품 구조에 관해 완전히 고지되지 않고 고객이 온전히 이해하지 못할 경우 불완전판매 리스크로 이어질 수도 있다. '모험자본 공급 확대'라는 순기능이 희석될 우려도 있다.IMA는 2028년까지 조달액의 25%를 모험자본에 의무 공급해야 한다. 이는 분명 정부가 의도한 '생산적 금융'의 핵심 축이다. 하지만 '모험자본'이라는 명목 아래 무리한 위험자산 확대나 레버리지 조달이 이뤄질 가능성이 있다. 반대로 증권사가 '모험자본'이라는 목적을 잊고 안정적인 수익 확보에만 집중할 경우 제도 본연의 역할도 희석될 수 있다. 원금보장 구조와 수익 분배 모델은 자칫 보수적 운용으로 기울게 만들고 이는 IMA가 지향하는 '생산적 금융'과 충돌할 수 있다.이에 요구되는 것은 투명하게 공개되는 증권사의 내부통제 기준과 운용 원칙, 리스크 허용 한도다. 이 모든 내용은 시장과 고객에게 철저하게 고지돼야 한다. 실제 금융감독원도 IMA 사업자에 "성과보상체계부터 판매·사후관리까지 완전판매 시스템을 정비하라"고 주문한 상황이다. 금감원은 지정 다음 날부터 태스크포스(TF)를 꾸려 상품설명서·약관·리스크 문구를 하나씩 점검하고 있다. 첫 상품이 시장 기준이 되는 만큼 "깐깐하게 보겠다"는 입장이 분명하다. 시장에서는 한국투자증권이 연내 1호 IMA 상품을 출시할 것으로 전망했지만 상품구성·투자대상·리스크 문구 조율에 꼼꼼한 협의와 조정이 더해지며 출시 일정이 지연됐다. 다만 새로운 제도가 시장에 뿌리내리는 데 있어 '첫 단추'가 중요하기 때문에 신중에 신중을 거듭하겠다는 판단이다.IMA가 순기능을 하려면 결국 세 가지 조건이 충족돼야 한다. 복잡한 구조를 명확하고도 투명하게 시장에 설명하는 것, 레버리지·투자대상·운용전략에 대해 공개하는 것, 판매 단계에서 완전성을 확보하는 것이다.시장에 없던 새로운 제도를 성공시키는 힘은 결국 시장의 신뢰에서 나온다. IMA가 생산적 금융의 새 축이 될지, 기존 발행어음 제도의 변형 판에 그칠지는 지금의 설계·검증·설명 과정에 달려 있다.새로운 제도를 시장에 안착시키는 데 있어 '속도'보다 중요한 것은 '안전성과 투명성'이라는 점을 잊어선 안 된다.
[기자수첩] 1997년 외환위기의 데자뷔, 또다시 국민 탓인가
원/달러 환율이 1500원을 돌파할 것이라는 우려가 커지자 금융당국은 지난 21일 주요 증권사 9곳을 긴급 소집했다. 서학개미의 해외주식 매수세가 환율 상승 압력으로 작용한다는 이유에서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국내 개인의 해외 주식 순매수액은 10월에만 68억5499만달러로 통계 작성 이후 최대를 기록했다. 연초부터 11월까지 누적액은 43조원에 달한다. 하지만 이는 현상의 일부만 본 피상적 분석이다. 시장 전문가들은 진짜 원인은 오래전부터 누적된 해외투자 구조 변화와 금융계정 악화에 있다고 지적했다. 거주자의 대외금융자산이 3분기 말 2조7976억달러로 집계됐고, 증권투자 잔액은 분기 대비 890억달러나 증가했다. 작년부터 이어진 해외투자 확대가 환율 체력을 근본적으로 바꿔놓았다.더 심각한 것은 10월 이후 외국인 자금이 유출로 돌아섰다는 점이다. 그간 개인의 달러 환전 수요를 외국인 자금 유입으로 상쇄했다. 하지만 외국인이 국내 투자를 정리하면서 환율이 급등했다. 여기에 연말 자금 경색과 은행권 달러 조달 어려움, 기업들의 해외투자 패턴 변화까지 겹쳤다. 그 여파로 지난해까지 1364.38원이던 연평균 환율은 현재 1410원을 넘어섰다. 이러한 상황에서 서학개미들은 왜 해외주식에 투자하는가. 답은 명확하다. 수익률이 국내보다 월등히 높기 때문이다. 국내 증시가 코리아 디스카운트에 시달리며 제자리걸음을 하는 동안, 미국 증시는 연일 최고가를 경신했다. 투자자들이 수익을 찾아 해외로 눈을 돌린 것은 지극히 합리적인 선택이다.정부는 이런 구조적 문제는 외면한 채 서학개미 탓만 하고 있다. 국내 증시를 매력적으로 만들지 못한 정책 실패는 묻지 않고, 투자자들의 합리적 선택을 문제 삼으면서 서학개미를 환율 급등의 주범으로 몰아가고 있다. 코리아 디스카운트 해소는 뒷전이고, 외국인 자금 유입을 늘릴 근본 대책도 없다. 외환시장의 구조적 취약성을 개선할 장기 전략도 현재로선 보이지 않고 있다.1997년 외환위기 때 정부가 금 모으기 운동으로 위기의 책임을 국민에게 전가했던 것처럼, 28년이 지난 지금도 같은 일이 반복되고 있다. 하지만 국민들은 더 이상 정부의 책임 전가에 속지 않는다. 서학개미만 탓하기 이전에 정부가 먼저 자신을 뒤돌아봐야 할 때다.
[기자수첩] 같은 바이오, '극과 극' 주주 신뢰
한마디 말은 천금같이 무겁다. 자신이 내뱉은 말을 지켰는지 여부가 곧 그 사람의 신뢰도로 이어질 정도다. 오죽하면 일언중천금(一言重千金)이란 격언이 있겠는가. 기업을 이끄는 총수의 공식 발언이라면 더욱 그렇다.사업 청사진이 실현될 때 기업은 투자자들의 신뢰를 받을 수 있다. 회사 성장세를 예측해 안전하게 투자할 수 있고 성과에 대한 투자 보상 기대감도 커지기 때문이다. 최근 에이비엘바이오가 주식 시장에서 주목받고 있는 이유도 같은 맥락이다.에이비엘바이오는 지난 12일 공시를 통해 글로벌 빅파마 일라이 릴리와 이중항체 플랫폼 그랩바디-B 관련 총 3조8072억원 규모 기술이전 계약 소식을 알렸다. 지난 4월 영국 GSK에 4조1104억원 규모 그랩바디-B 기술이전 이후 조단위 계약을 다시 따내는 성과를 냈다. 이상훈 에이비엘바이오 대표가 GSK 기술이전 계약 후 온라인 간담회에서 "지속적인 기술이전이 가능할 것"이라고 말한 내용을 지키는 모습이다.반복된 기술이전 성과에 대한 시장 반응도 뜨거웠다. 에이비엘바이오는 지난 12일 12만6700원(이하 종가 기준)을 기록, 전 거래일(9만7500원) 대비 30.0% 상승했다. 상승세는 다음 날까지 이어지며 16만3000원(전 거래일 대비 29.0% 상승)으로 거래를 마쳤다. 연초(1월2일) 2만9750원과 비교하면 주가 상승률은 447.9%에 달한다. 일각에서는 반도체와 '조방원'(조선·방산·원전)에 집중됐던 투자심리가 바이오로 옮겨갈 것이란 기대감마저 나왔다.에이비엘바이오가 주주 신뢰를 강화한 가운데 셀트리온은 반대 상황에 직면했다. 소액주주들이 임시 주주총회 소집 등 단체행동을 예고하며 경영진을 몰아세우고 있는 것. 소액주주들은 셀트리온 주가가 수년째 박스권에 머무는 원인으로 서정진 셀트리온 회장이 제시한 목표와 실적 간 괴리를 꼽았다. "허언에 가까운 가이던스가 공매도 세력에 빌미를 제공했다"는 게 셀트리온 소액주주 비상대책위원회 관계자 주장이다.서 회장은 당초 올해 셀트리온 연 매출 목표를 5조원으로 잡았으나 지난 7월 간담회에서 목표치를 4조5000억원 수준으로 하향 조정했다. 자가면역질환 치료제 짐펜트라의 올해 매출 목표치는 1조→7000억→3500억원 등으로 낮췄다. 유통구조 판단 착오 등이 이유였다. 서 회장은 지난 5월 간담회에서 "경험이 미숙해 (상황을) 너무 낙관적으로 생각했던 것 같아 투자자들에게 죄송하다"고 했다.흔히 바이오산업은 믿음을 바탕으로 성장한다고 말한다. 미래 성과에 기대를 거는 경향이 많아서다. 사업 목표가 실현되지 않는 상황이 반복되면 투자자들의 신뢰는 저하되기 마련이다. 셀트리온이 주주들의 신뢰를 받기 위해서는 합리적인 목표를 설정하고 끝까지 이행하는 모습이 필요하다.
[기자수첩] 연임 포기한 김영섭 대표… AI 3강 시대 '위태로운 KT'
KT의 새로운 선장 찾기가 시작됐다. 월드컵처럼 돌아오는 익숙한 풍경이다. 이사회는 서둘러 후임자 물색에 돌입했다. 표면적 이유는 해킹 사태지만 근본적으론 정권 교체기마다 최고경영자(CEO)의 명운이 출렁이는 악순환이 반복되는 수순이다. 김영섭 대표가 해킹 사태에 대한 책임을 이유로 연임을 포기하면서 전임 대표 시절과 같은 혼란은 없지만 여전히 외풍에 휘둘릴 KT의 미래가 눈에 선하다. KT는 민영화 이후 '정권과의 거리'에 예민했다. 엄연히 민영기업인 CEO 임기와 경영 권한이 법적·제도적으로 보장되어 있음에도 실제론 달랐다. 새 정부가 출범할 때마다 정치권은 '우호적 인사'를 암암리에 요구하거나 이사회와 주요 주주의 의사결정에 신호를 보내는 방식으로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전문성과 역량보다 정권과의 코드 적합성이 생존의 핵심 요인이었다. 이 같은 구조에서는 장기 복안을 마음껏 구상하기 어렵다. 새로운 CEO가 수립한 전략이 정권 기류 변화에 따라 무력화될 수 있다는 불안감이 팽배하다. 신임 수장이 3~5년에 걸쳐 추진해야 하는 중장기 전략보다 당장의 정치적 신호를 관리하는 데 공력을 더 많이 들여야 한다. 수차례 성장 동력을 제대로 완성하지 못한 데엔 이유가 있었다. 김영섭 대표도 이러한 현실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전임 구현모 대표가 힘을 쏟던 AI '믿음'을 이어받기보다 방향을 180도 틀었다. 마이크로소프트(MS)와의 강력한 연대를 바탕으로 2조4000억원에 달하는 투자를 결정했다. 그 결과 정부 주도의 '국가대표 AI' 프로젝트에서 탈락하며 자존심을 구겼다. 이를 위해 한국형 AI를 추진하겠다며 '믿음2'를 급조하기도 했다. 변화하는 정치·산업 환경을 읽은 부분도 있겠지만 KT의 특수한 환경이 주효했다는 시각도 많다.다소 성급했던 MS와의 협력 확대는 김 대표에게 부메랑이 될 가능성이 크다. 이미 레임덕에 빠진 김 대표에게 사업 추진은 어려운 일이다. 오히려 안정적인 퇴임을 위해 해당 사업을 수습하는 데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AI 경쟁이 하루가 다르게 격화되는 상황에서 이러한 혼란은 치명적이다. KT는 'AI 3강 시대의 주역'이 되고자 하지만 실상은 CEO 불안정성과 정치적 간섭을 넘지 못하고 있다. 글로벌 빅테크는 장기 전략을 일관되게 추진하며 경쟁하는데 재계 12위이자 매출 26조원의 기간통신사업자 KT는 CEO 교체로 전략과 조직 구조가 원점으로 돌아가는 일이 되풀이됐다.KT가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또 한 번의 경영진 교체가 아니라 안정적이고 성숙한 거버넌스 체계다. 정권이 바뀌어도 흔들리지 않는 CEO 권한 보장, 정치적 간섭을 최소화하는 이사회 구조, 전문성 중심의 경영 승계 원칙이 마련돼야 한다. KT만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 공기업·준공공기업이 오랫동안 견뎌온 고질적 병폐이기도 하다.차기 대표에게 요구되는 자질 역시 분명하다. 정치와 일정한 거리를 둘 수 있는 독립성이 필요하고 AI·네트워크·디지털 인프라 등 KT의 핵심 사업 구조를 깊이 이해하고 장기적 비전을 세울 수 있는 기술 기반의 리더십이 요구된다. 전략의 일관성을 유지하면서도 시장 환경 변화에 대응할 수 있는 유연성을 갖춰야 한다. 과거 통신이 주업이었던 시절과 다른 획기적인 변화가 절실하다. 정치권 역시 반성해야 한다. KT의 대표 선임 과정에 공식적·비공식적 영향력을 행사해 왔던 관행에서 손을 떼지 않는 한 공기업·민간 기업 어디에서도 혁신은 기대할 수 없다. KT를 정권 친화 인사 교체의 장으로 삼지 않겠다는 약속을 행동으로 보여야 한다. 필요하다면 CEO 임기 보장 및 독립성을 강화하는 법·제도 정비도 검토해야 한다.한국 AI 산업의 경쟁력, 디지털 인프라의 안정성, 국가통신산업의 미래가 걸린 중대한 분기점이다. 더 이상 이해관계에 흔들릴 시간을 허비할 여유도 없다. 이번 대표 선임 과정이 KT의 오랜 고질병을 반복할지 아니면 환골탈태의 계기가 될지 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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