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노트
[뉴욕의 한국인] "보이는 것은 나인가, 내 자아인가"
탁월함은 때로 천재성 보단 결핍에서 출발한다. 뉴욕의 일루전 아티스트 윤다인은 집안의 둘째였다. 언니는 아빠를 닮아 공부를 잘해 엄마의 사랑을 받았다. 그런데 화가인 엄마는 자신을 닮은 둘째보다는 첫째를 더 아끼는 것 같았다. 일찍 철이 든 탓일까. 엄마에게 투정 부리기보단 실력으로 인정받고 싶었다. 그래서 미술을 시작한 이후 한 번도 일등을 놓쳐본 일이 없다. 하지만 엄마는 기대만큼 기뻐해 주진 않았다. 어쩌면 어떤 칭찬보다는 엄마가 언니를 바라보던 그 눈빛이 그리웠나 보다. 해소되지 않은 욕구가 항상 스스로를 지배했다. 중·고등학교 때까진 회화를 그리다가 상업 미술을 위해 대학에서 무대미술을 전공했다. 하지만 일할 곳이 마땅치 않았다. 아르바이트로 나갔던 영화 메이크업 아티스트 실습에서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주인공이 살짝 추락하는 신이었는데 그가 다칠 걸 염려한 스텝실장이 메트리스처럼 뒤를 받치라는 것이었다. 그게 농담이든 진담이든 들러리 취급받는 게 싫었다. 내 인생의 주인공은 난데 부속물이나 엑스트라로 살긴 싫었다. 주목은 내가 받아야 했다. 대학 공연장에서 일하다가 문득 연극을 위한 분장이 아니라 내 포트폴리오를 위한 결과를 남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객을 바꿔본 것이다. 영화 현장에 실습을 나갔을 때 유명한 실장도 그랬다. 이런 걸 어떻게 십년 넘게 버티냐고. 그러면서 '그럼 네가 한 번 바꿔봐'라고 했다.그래서 연기자 선배 오빠를 한 명 섭외해 PPT로 시안을 보여주곤 얼굴과 상체를 캔버스 삼아 순수작업을 시도했다. 그를 발판으로 나를 캔버스 삼아 남긴 습작들을 인스타그램에 올렸는데 갑자기 팔로워가 늘었다. 그리고 한 달 뒤엔 상업 제안이 들어왔다. 인생이 어떻게 한 번에 그렇게 바뀔 수 있을까. 8년을 사전에 없던 '일루전 아티스트'로 살았다. 사람들이 주목하는 캔버스는 이제 내 얼굴과 내 몸이 됐다. 점점 유명해져서 좋긴 했는데, 역시 경험해 보지 않은 것은 겪어보지 않으면 내막을 모르는 법이다. 아티스트가 되어 갈수록 외로웠다. 의뢰받은 것을 충실히 작업하려고 있는 힘 없는 힘을 쥐어짜고 나면 속 안은 텅 비어버리기 일쑤였다. 가장 감사한 분은 아빠다. 스스로 침잠할 때마다 묵묵히 옆에서 곁을 내주셨다. 진도가 안나갈 때면 아빠가 옆에서 참외를 깎고 계셨다. 어느 날은 피카소 노트를 사와서는 '우리 딸 화이팅'을 외치고 엉뚱하게 사라지셨다. 그게 멘탈을 붙잡은 힘이다. 2021년 여름에 거처를 미국으로 옮겼다. 어차피 이름도 생소한 일루전 아트를 한국에서 십년 더 설명하고 다닐 바에야 세계시장에 먼저 알리자는 생각으로 왔다. 십대에 잠시 와봤던 미국은 생각보다 더 낯선 도시였다. 미국이라고 해서 이름도 생소한 아티스트를 특별히 반기지는 않았다.대신 한 가지 수월한 것은 사는데 있어 더 이상 남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한국에서의 눈빛은 '아, 쟤는 왜 저렇게 살지'였다면 미국은 '저 친구는 그냥 저렇게 사는구나'하는 정도였다. 로스앤젤리스(LA)에서 2년을 지내다가 영감을 찾아 뉴욕으로 왔다. 맨해튼 어퍼이스트는 그런데 훨씬 고독했다. 메트로폴리탄 뮤지엄을 눈앞에 두고도 신이 나지 않았다. 창밖의 모든 전경에 불이 꺼지면 도시는 이따금 들리는 싸이렌 소리를 제외하면 적막했다. 마지막에 불을 끄고 가장 먼저 불을 켜면서 쓸쓸함은 배가 됐다.그러다가 시커먼 암흑이 날 삼키려 할 때쯤 깨달았다. 한국에서도 외롭지 않은 적이 있던가. '맞아 실은 이 예술적인 절망을 찾아온 것이었지'. 연고도 없던 이곳에 갑자기 옮겨붙어서는 언제나 그랬듯 결핍에서 에너지를 얻어냈다. 존재감 없이 스며들었지만 어느 새 이미 살이 차오른 혹덩어리가 되자. 속안의 자아와 다투는 동안 변화도 한 가지 생겼다. 팬데믹(세계적 감염병 대유행)이란 기제가 기다림이라는 반강제적 선물을 안긴 것이다. 페이스 페인팅과 아크릴 캔버스 위주로 속전속결하던 작법은 최근에 유화로 확장됐다. 마르는 데 걸리던 시간을 견디지 못하던 성정에 인내심이 자라났다. 주로 몸을 대상으로 했기에 동일시되던 작품과 스스로의 사이에 놓인 시간적 흐름도 이제는 다차원으로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됐다.윤다인이 아티스트로 치열하게 스스로와 분투한 결과는 작품과 명성으로 나타나고 있다. 1000건 이상의 작품이 만들어졌고 애플과 메르세데스벤츠 스냅챗 화이자 등이 상업물을 의뢰한다. 관심을 받아보려고 시작한 작업이 삶을 바꿨지만 지나친 관심과 기대는 스스로를 숨게 만들었다. 창의성을 이끈 것은 주목이 아니라 결핍이었기 때문이다. 작업 초기 신기한 마음에 상업작품을 많이 하던 그는 요즘 더 순수미술에 끌리고 있다. 어떤 목적보다는 순수한 자기표현 자체에서 해갈하기 때문이다. 그런 맥락에서 2월엔 LA에서 열리는 아트페어에 나섰고 개인전시도 시작했다. 특히 아티스트로서 그동안의 고민을 '불만'이란 체화된 화두를 가지고 퍼포먼스로 풀어볼 구상도 하고 있다. 예술가로서 소통과 불통 경계에서 고민하던 한동안의 결과를 내놓는 것이다. 윤다인은 "추상화를 그리던 엄마를 어릴 때는 잘 이해하지 못했지만 요즘에 '클래식은 영원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조금씩 알아가고 있다"며 "어릴 적 경쟁적인 분위기에서 미술을 하면서는 등수에 집착하곤 했는데 그랬던 내게 엄마가 왜 관심을 두지 않았는지 어쩌면 그 때문이 아니었을까 깨닫고 있다"고 했다.
[기자수첩] 기업대출 출혈경쟁, 부실 부메랑되나
"은행권 기업대출 출혈경쟁의 부작용에 대비해야 할 때입니다."기업대출 경쟁과 관련해 최근 만난 시중은행 고위 관계자는 이같이 우려했다. 금융당국의 가계대출 관리 강화 방침에 지난해부터 기업대출 경쟁이 제살깎아먹기식 과열 조짐을 보이면서 부실 우려가 커지고 있다는 얘기다.업계에선 지난해부터 은행들이 수익성 악화를 감수하고 무리한 기업대출 경쟁을 벌이고 있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는다. 시중은행들은 역마진(손실)을 감내하며 기업대출 점유율을 늘리는데 혈안이 돼 있다.우리은행의 경우 올해 중소기업 대출 증가액 목표를 지난해보다 대폭 높여 잡은 것으로 알려졌다. 중소기업 전문 국책은행과 시중은행 등과 치열한 경쟁을 벌이면서 안팎에서 목표 달성이 쉽지 않다는 관측도 제기된다.기업대출 잔액도 빠르게 늘었다. 5대 은행의 지난달 말 기업대출 잔액은 770조1450억원으로 전년 동월(707조6043억원)과 비교해 1년 새 8.8%(62조5407억원) 늘었다.기업 규모별로 보면 대기업 대출 잔액이 109조4832억원에서 138조9484억원으로 한 달 새 26.9%(29조4652억원)증가했다. 중소기업 대출 잔액은 598조1211억원에서 631조1966억원으로 5.5%(33조755억원) 급증했다.은행들이 기업대출 확대에 주력하는 것은 올해 가계대출 증가율을 1.5~2.0% 이내로 관리하기로 하면서 수익성을 개선하기 위해서다. 정부와 금융당국은 GDP(국내총생산) 대비 가계빚 비율을 2027년엔 100% 이하로 낮추겠다는 목표를 수립한 상태다.GDP 대비 가계빚 비율은 2017년까지만 해도 90%를 밑돌았지만 2021년 105.4%까지 치솟았다가 지난해 2분기 101.7%로 떨어졌다. 하지만 세계 4위 수준으로 여전히 높다.통상 은행들은 고객에게 예금을 받거나 은행채 발행 등을 통해 자금을 모은 뒤 이를 운용해 수익을 얻는데 가장 대표적인 자금운용 방법이 대출이다. 가계대출의 성장세가 제한적인 만큼 기업대출 확대로 수익성을 보완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 직면했다.은행 기업대출이 빠르게 늘면 한국 경제의 뇌관이 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각 시중은행은 부실 리스크를 감내할 수 있다며 기업대출 확대에 따른 우려를 일축하고 있지만 고금리 기조 속 기업대출 급증은 부실채권 증가로 이어질 수 있다.한국은행에 따르면 국내 예금은행의 기업대출 금리는 지난해 말 잔액 기준 연 5.31%로 2013년 3월(5.31%) 이후 약 10년 9개월 만에 최고치를 찍었다. 제로(0)금리 시대였던 2021년 7월(2.79%)과 비교하면 2년5개월 만에 1.9배 치솟았다.이러한 상황에서 기업의 자금 사정은 악화했다. IBK기업은행이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양경숙(더불어민주당·비례대표) 의원실에 보낸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 기업은행과 거래 중인 한계 중소기업은 1만5776개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발생하기 이전인 2019년(1만581개)과 비교해 49.1% 증가했다.같은 기간 기업대출 고정이하여신(NPL)은 7391억원에서 9294억원으로 38.0%(1903억원) 증가했다.부실이 수면 위로 드러나기 전까지 위기를 감지하기 쉽지 않다. 하지만 은행권은 이럴 때 일수록 저마진 기업대출 출혈경쟁보다 철저한 리스크 관리와 현장 점검 등을 통해 건전한 기업대출 자산을 확보하는 노력이 필요하다.정부의 노력도 필요하다. 운영자금이 필요한 기업들에 대출보다 투자를 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줘야 한다. 한국은행은 이달도 9차례 연속 금리 동결을 이어갔다. 기준금리 인하로 이자부담이 완화할 때까지 대출로 연명하는 기업의 금융비용 부담을 줄이기 위한 정책적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할 시점이다.
[기자수첩] 중국발 이커머스 저가 공세, 규제만이 답일까
"농협 에어침대 구입하실 분 지금 빨리 알리 들어가 보세요. 특가 떴어요."지난겨울 한 캠핑 커뮤니티에 올라온 글이다. 농협에서 만든 에어침대를 중국 쇼핑몰에서 판다는 소리가 아니다. '농협'은 캠퍼들 사이에서 캠핑용품 브랜드 '네이처하이크'(Nature Hike)를 뜻하는 은어 중 하나다. 영문 약자 'NH'가 농협과 같아서 우스개로 쓰이게 됐다. 네이처하이크는 중저 가격대의 가성비(가격 대비 성능) 브랜드이지만 국내 구입가격과 해외 직구가격이 꽤 차이 나는 편이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으로 해외 물류가 자유롭지 않던 당시, 인기 아이템 중 하나인 에어침대는 국내 판매가가 17만원대, 알리익스프레스(알리) 판매가가 8만원대였다. 두배 이상 가격 차이가 나니 소비자들은 자연스레 알리로 몰렸다. 코로나19가 풍토병화하고 해외 물류가 다시 활기를 띠자 글로벌 이커머스가 날개를 달기 시작했다. 국경 없는 직구를 뜻하는 '크로스보더' 세상이 된 것이다. 이로 인한 중국발 저가 공세로 유통업계가 몸살을 앓고 있다. 알리, 테무, 쉬인으로 대표되는 중국계 저가형 쇼핑 플랫폼이 국내 이커머스 생태계를 위협하자 업계에서는 정부가 나서서 국내 시장을 보호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목소리가 나온다. 특히 사업자가 아닌 개인도 구매가 가능한 도매 플랫폼 1688의 상륙 소문까지 더해지고 있어 불안감은 더욱 증폭되는 형국이다. 반면 저가형 쇼핑몰들은 짝퉁, 저품질 논란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약점이 있다. 드물지만 물건을 주문해도 제품을 보내지 않고 쇼핑몰을 폐쇄하는 판매자도 있었다. 이것은 비단 중국계 플랫폼만의 문제가 아니다. 최근 전북에 위치한 온라인 쇼핑몰 '웁스'에서 비타민·이어폰 등을 주문했다가 판매자가 연락을 받지 않고 잠적해 많은 소비자가 피해를 본 사건이 있었다. 소비자들은 "의심스러울 만큼 싸길래 주문할 때 살짝 불안했는데 역시나였다"며 분통을 터뜨렸다. 당장은 저가 공세가 무섭겠지만 소비자들은 생각보다 더 영리하다. 그들이 추구하는 것은 말 그대로 가성비다. 가성비가 좋은 제품을 선호한다는 것은 무조건 저렴한 제품만 찾는다는 뜻이 아니다. 성능이 좋지 않으면 가격이 아무리 싸도 구입하지 않는다는 뜻도 된다. 최근 K제품이 세계 시장에서 유례없이 인기를 끌고 있다. K라면은 지난해 최초로 매출 1조원을 돌파했고 중소기업이 만든 K뷰티 제품은 7조원을 넘어섰다. 이커머스 시장에서 국경이 사라진 만큼 K커머스의 경쟁력을 높이는 방법을 고민해야 할 때다.
[뉴욕의 한국인] 반세기, 미국인의 심장에 '태권도'를 심다
지금의 삼성과 LG가 없던 시절, 한국은 사람을 수출했다. 나라에 기술과 자본이 없었으니 몸으로 때워 외화를 벌고 본국에 보낸 이들이 적지 않다. 60년대 파독 광부와 간호사가 그랬고 70년대부터는 체격을 갖춘 태권도 사범들이 국위선양을 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국기'(國技)와 '극기'(克己)만 가지고 타국의 문을 두드렸다.박연환(72)은 1978년 박정희 정부가 공식적으로 파견한 태권도인이다. 고려대 재학 시절 선수권대회를 휩쓴 전력에 청와대 경호실에서도 합격 통지를 받았지만 동시에 부름을 얻은 정부 태권도 사범 해외파견 프로젝트에 응했다. 대상지는 아무도 가지 않으려 꺼리던 아프리카 남부 입헌군주국 레소토(Lesotho)였다.레소토는 당시 정부가 유엔 가입을 위해 북한과 교류경쟁을 벌이던 주요국이다. 당시 경제력이 한국에 밀리지 않던 북한이 물량공세를 하던 상황이어서 정부는 특수부대를 가르칠 무관사범 한 명과 의사 두 명, 모터싸이클 오십대를 레소토에 파격 지원키로 했다. 비슷한 맥락에서 우간다에도 두 명을 파견하려고 당시 안기부가 후보군을 훈련 시켰지만 독재자 이디 아민이 쫓겨나는 변수가 발생하면서 레소토 계획만 실행됐다.아프리카 남부에서의 2년은 뜨거운 시간이었다. 태권도를 배우려던 특수부대원들과 민간인들에게 무도정신을 먼저 가르쳤지만 초반엔 완력을 시험해 보려던 이들이 더 많았다. 몸집 큰 이들이 무턱대고 덤비는 경우가 많아 항상 긴장 상태였다. 젊은 혈기가 아니었다면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하지만 제자들이 늘면서 마음의 문도 열리기 시작했다. 박 사범은 무도는 정석으로 가르치면서도 당시 1200달러로 적지 않던 월급을 모두 쓰면서 한국인의 정(情)을 표현했다. 아이들에게 도복을 사주고 제자들에게 교본을 나눠주다보면 어느새 통장은 비었지만 마음은 꽉차 있었다.그렇게 1년 만에 자리를 잡고서 그나마 남겨뒀던 비상금을 털어 '레소토 전국태권도대회'를 열였다. 대회가 성황을 이루면서 현지에서 태권도 붐이 일었고 협회가 결성돼 국가대표단도 꾸릴 수 있었다. 부임 1년 후 감독을 맡아 출전한 아프리칸대회에서 레소토는 준우승을 차지했고 제자들은 한국을 알리는 무도인들이 됐다. ━아프리카에서 아메리카로━태권도 사범으로서 2막은 불의의 사고로 레소토를 떠나게 되면서 펼쳐졌다. 북한이 쿠바와 공조해 레소토에 큰 지원을 약속하면서 우리 정부와 연을 끊은 것이다. 오갈데 없던 그는 케냐로 추방돼 귀국길에 올랐지만 세계인들에게 한국의 무도를 전파하겠다던 사명감은 더 커졌다. 그래서 곧바로 택한 목적지가 미국이다.미국엔 친형인 박연희 사범(전미 태권도연맹 고문, 2019년 작고)이 이미 자리를 잡고 있었다. 사실 그에겐 태권도 자체가 열살 터울인 형님의 멋진 모습에 반해 시작한 무도였다. 두 형제가 뉴욕 동부의 핵심, 롱아일랜드에 자리를 잡고 태권도를 미국 주류사회에 전파했다. 그 전까지 유행하던 쿵푸와 카라데를 몰아내고 다른 무술과 달리 태권도는 싸움이 아니라 심신수련을 본질로 하는 무도임을 알리는데 힘썼다.한국인보다 덩치가 두 배 넘는 이들이 도장에 찾아와 싸움을 요구하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박 사범은 먼저 수업을 마친 후 가장 큰 친구와 대련 해주기를 반복했다. 수련 과정에서 상대의 주동작과 장단점을 파악해 곧바로 실전에서 적용해 승리하는 모습을 보여주면 제자들은 그제서야 눈빛이 달라졌다.반의반의하던 이들은 작은 체구의 한국인이 큰 덩치의 동네 불량배를 혼내줬다는 소문을 냈고 그때마다 도장은 인산인해가 됐다. 수련자가 늘면서 경찰서장과 판검사, 지역 상공인들까지 몰려왔다. 사회적 성취를 이룬 이들이 자신의 심신을 단련할 목적으로 제자가 되길 꺼리지 않은 것이다. ━88 서울올림픽서 미국 태권도를 세계 1위에 올리다━미국에서 그가 문화 외교관으로 남긴 족적 하나는 1988년 서울올림픽에서 미국 대표팀 수석코치를 맡은 것이다. 당시 시범종목이었지만 종주국에 온 미국 제자들과 함께 주눅들지 않고 여자단체 1위, 남자단체 2위라는 믿지 못할 성과를 냈다. 이 결과로 미국에서 태권도 붐을 일으켰고 롱아일랜드대학에선 체육학과 부교수를 맡기도 했다.3년 뒤 박 사범은 더 큰 도전에 나선다. 김운용 당시 IOC(국제올림픽위원회) 부위원장이 세계태권도대회의 미국 뉴욕 유치 미션을 주자 친형과 함께 스포츠 전당인 메디슨스퀘어가든(MSG)을 개최지로 정해두고 2년여를 몰두한 것이다. 빠듯한 예산과 시간에도 두 형제가 스스로의 가산을 탕진하면서까지 노력하자 길은 열리기 시작했다.우여곡절 끝에 대회는 1993년 수만명이 운집한 가운데 성황리에 열렸다. 미국 ABC방송의 생중계로 이 대회는 세계 곳곳으로도 전파를 탔고 태권도의 위상을 미국 프로농구나 미식축구급으로까지 올렸다는 평가를 얻었다. 이듬해인 1994년 파리 IOC 총회에서 태권도는 올림픽 정식종목으로 채택됐다.고국에서 대통령과 국무총리 표창을 받은 박연환 사범은 전미 태권도연맹 사무총장을 끝으로 미국 지역사회로 돌아가 헌신하고 있다. 지난해 50주년을 맞은 도장에서 그는 3000명에 달하는 블랙벨트(유단자) 제자들을 작고한 친형과 함께 배출해냈다. 도장은 이제 큰아들에게 가업으로 물려주고 현업에선 물러났다. 하지만 그렇다고 무인의 삶까지 은퇴한 건 아니다.지난해 그는 미국 태권도 지도자연맹이 주관하는 뉴욕 오픈 챔피언십 대회장을 맡아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팬데믹(세계적 감염병 대유행)으로 멈췄던 대회를 부활시켰다. 박연환 사범은 "다시 태어나도 대한민국의 국기를 세계에 알릴 수 있는 무인의 삶을 살겠다"고 강조했다. ━◆박연환 프로필1952년 6월 전라북도 정읍 출생1977년 고려대학교 사학과 졸업 및 해병대 복무 소집해제1978년 아프리카 레소토 공화국 태권도 사범 파견 및 레소토 국가대표 감독 역임1980년 미국 이주 및 뉴욕주 롱아일랜드 도장 개설1988년 서울올림픽 미국 국가대표 수석코치1993년 전미 태권도연맹 코치 및 사무총장 역임- 롱아일랜드 한인회 3대 회장, 롱아일랜드 대학교 체육학과 부교수, 뉴욕오픈태권도대회 대회장 등 역임 ━
[기자수첩] 중소기업에게 가혹한 중대재해처벌법
"총선을 앞두고 중대재해처벌법에 대한 관심은 뒷전이 됐어요. 실질적인 사고 예방을 위해서는 충분한 준비 기간이 필요한 상황인데 이를 몰라주는 것 같아요."중소기업계의 한 협동조합연합회장이 중대재해처벌법 유예 촉구 결의대회에서 한 말이다. 중대재해처벌법(중처법) 적용을 앞둔 중소기업계가 벌벌 떨고 있다. 중처법에 대한 대비가 전혀 안 돼 있는데 총선 이슈에 파묻혀 '악법'처럼 적용되게 생겼다.중처법은 사업주나 경영관리자의 안전·보건 조치 의무 위반으로 사업장에서 인명피해가 발생한 경우 사업주와 경영관리자를 처벌하는 법안이다. 안전보건 확보 의무를 소홀히 한 사실이 밝혀지면 1년 이상의 징역 또는 10억원 이하의 벌금에 처해진다.2022년 1월27일 근로자 50인 미만(공사금액 50억원 미만) 중소사업장에 대해서는 준비 부족 등을 이유로 2년간 시행이 유예됐다. 추가로 2년 더 유예하자는 안은 무산됐다. 지난달 31일 국회 본회의장 앞 기자회견에 3600명의 중소기업인이 모여 유예를 호소했으나 불발됐다.한국에서 5인 이상 50인 미만 사업장수는 83만여개에 달한다. 중소기업에서 안전사고가 발생할 경우 사업주의 책임으로 돌아가게 된다. 일부 대기업 CEO나 총수가 안전관리 담당 임원을 두고 처벌을 피해가기도 하는데 중소기업의 경우 이렇게 하기가 현실적으로 어렵다.중대재해가 발생하게 되면 중소기업 사업주는 꼼짝없이 처벌받게 된다. 이 때문에 일부 중소기업에서는 중처법 시행으로 언제 닥칠지 모를 시한폭탄을 안고 사업을 하느니 차라리 폐업하겠다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중소기업이 중처법으로 휘청인다면 중견기업-대기업 등 산업 생태계 전반에 연쇄적인 악영향이 불가피함은 물론이다.중소기업은 중처법 대응책 마련이 미흡한 상태다. 중소기업중앙회 조사에 따르면 중처법 대응과 관련해 50인 미만 사업장의 80.0%가 '아직 준비 못 했다'고 응답했다. 85.9%는 '유예기간 연장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았다.중소건설단체와 중소기업단체협의회 등 14개 단체는 지난 14일 중처법 유예 촉구 결의대회를 열고 현장의 혼란을 초래할 수 있다며 2년의 중처법 추가 유예를 요구했다.중소기업인들은 국회 본회의에서 중처법이 다시 논의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안전한 작업 환경을 조성하고 사고를 미리 막자는 법의 취지에 동의하는 만큼 준비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사업장에서 발생하는 불의의 사고를 예방하기 위한 합리적인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는 취지에는 공감한다. 중소기업이 준비가 안 됐다고 입을 모은 만큼 이들에게 시간을 더 주는 지혜가 필요하다. 중소기업이 살아야 중견기업과 대기업이 생존하고 발전한다는 점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뉴욕의 한국인] 한국계 오마바의 담대한 도전
어머니는 간호사였다. 아버지는 고아로 커서 소아마비까지 앓았지만 MIT(메사추세츠공과대학)와 하버드대에서 공부해 유전공학 박사가 된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경남 밀양에서 미국으로 건너온 부모의 악전고투 정착기는 말 그대로 드라마였다. 한국에서 태어나 부모를 따라 미국에 온 누나도 초기엔 영어에 어려움을 겪어 학교생활을 힘들어했다고 한다. 하지만 결국 예일대를 졸업하고 뉴욕대 교수가 됐다.이런 집안에서 나고 자란 둘째 남자아이는 어떤 중압감을 가졌을까. 부모는 필라델피아 인근 뉴저지 남부 체리힐에서 아이를 가르쳤다. 인구 10만명이 안되는 캠든 카운티는 치안이 좋고 학군이 우수하지만 90% 이상이 백인이다. 한국인은 3000명 이내. 키작고 왜소한 체구의 한국아이가 중등교육 내내 주눅이 들지 않았다면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그래서일까. 의외의 선택을 한다. 한국으로 치면 2년제 전문대라 할 수 있는 딥스프링스컬리지(Deep Springs College)에 들어갔다. 주변에 프린스턴과 유펜 등 아이비리그가 즐비했지만 그건 기득권들의 몫이었다. 하지만 이 전문대는 1년 5만달러의 학비가 전액 면제였다. 학교도 네바다와 캘리포니아 접경 사막에 있었다.그해 입학정원이 13명으로 아침에 일어나 전교생과 함께 우유를 짜고 가축에 사료를 먹였다. 미국 사회를 이끌 지도자 교육을 취지로 만들어진 학교에서 '언더독 정신'으로 꿈을 키운 것이다. 그렇게 2년을 노력해 시카고대로 편입했고 거기서도 로즈 장학생이 돼 영국 옥스퍼드대에서 국제관계학으로 박사학위까지 받았다.미국 국무부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한 그는 한국계 미국 하원의회 3선 의원 앤디 김(Andy Kim)이다. 처음엔 외교전략관으로 일했다. 미국이 이라크 전과 아프가니스탄 전쟁 등을 거치며 중동 정세에 깊이 관여하면서 전문가가 됐다. 능력이 탁월하니 초반 승진가도는 가팔랐다. 하지만 어느 날 분명히 존재하던 유리천정을 맞았다. 미국 정부가 한국 관련 업무를 수행하는 것을 서면으로 금지했다. 보스톤에서 태어나 본래적 미국인임에도 그의 성(性)을 보고 스파이 행위를 우려한 것이다. 아프가니스탄에서 근무할 때는 최고 등급의 비밀취급 인가도 받았지만 미국은 그가 한국에 충분히 기울어질 수 있다고 여겼다. 미국 정부의 업무배당 제한은 사실 공식적인 조치였다. ━바이든에 오바마까지 선거 도와━자신을 외국인 취급하는 정부에서 일하는 것은 더 이상 의미가 없다고 판단, 이를 고치겠다고 결심했다. 나토(NATO) 사령관전략참모와 미국 NSC(국가안전보장회의) 이라크 담당관을 끝으로 그는 정부 일을 그만두고 2018년 뉴저지 남부(3구)로 돌아와 하원의원에 출마했다. 백인 인구가 80% 이상이고 아시아계는 3%도 안되는 지역구에서 앤디는 4000여표 차이로 신승했다. 그는 "다른 누군가가 내가 성취할 수 있는 혹은 없는 일, 그리고 내가 이 나라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규정하도록 하고 싶지 않았다"고 했다.앤디가 출마하자 당시 조 바이든 대통령 당선인은 물론 오바마 전 대통령도 선거운동을 도왔다. 앤디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행정부를 이끌던 시절, 원내에 입성한 후 주한미군을 포함한 국방부를 관할하는 군사위원회를 배정받았다. 그는 미국의 대북정책이 북한과의 평화를 도모하는 방향으로 정해지는데 역할을 다했다.미국의 국익과 한반도의 평화가 서로 상충하는 가치가 아니라는 신념에 따라 소임을 다한 것이다. 하원의원이 된 이후에도 스스로는 유리천정을 깨뜨리기 위해 일하는 역할만을 바꾼 것일 뿐이고 여전히 민주주의를 위한 공직자(Public service provider)로 일하고 있다고 말했다. 앤디는 재선에서는 4만표 차이로 압승했고 지난해 9월에는 41세 나이에 3선에 성공했다. 그런데 한 달여 만에 그는 다시 담대한 도전을 시작했다. 상원의원 출마를 천명한 것이다. 상원은 한국계 정치인들에겐 미지의 영역이다. 2년짜리 하원에 비해 6년 임기의 상원은 스포트라이트의 비중이 다르다. 435명의 하원이 지역구라면 100명의 상원은 전국구다.재선 상원의원이나 주지사는 대통령 후보로도 자주 거론된다. 하원이 주로 예산 등의 돈 문제를 다루는데 비해 상원은 외교전략과 국제정세 등 초강대국으로서의 미국의 의사결정을 좌우한다.이런 의미에서 앤디가 상원을 목표한 것은 정치적 야망이기도 하지만 지금이 바로 적기라는 판단 때문이다. 같은 당 상원의원인 밥 메넨데스가 뇌물과 부패 혐의로 기소되면서 낡은 정치, 부패한 정치에 대한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는 자신감을 느껴서다.앤디는 지난 1월13일 뉴저지 포트리 한인유권자연대(KAGC) 사무실을 찾아 "3번의 선거를 치르면서 단 한 번도 우세로 평가되지 않았지만 이기는 방법을 알고 이겨냈다"며 "지난해 10월 이후 이미 270만달러의 자금을 모았고 이제 한국인 커뮤니티는 새로운 후보, 젊은 후보, 우리의 힘을 보여주고 우리 커뮤니티 목소리를 대변할 수 있는 대표를 원한다"고 강조했다. ━상원 도전… 6월 프라이머리가 시험대━그는 일단 올 여름(6월) 민주당 프라이머리(예비선거)에서 적격 여부를 시험받는다. 하지만 상대는 만만찮다. 필 머피 현 뉴저지 주지사의 아내 태미 머피가 민주당 카운티 의장들의 지지를 얻어 경선 출마를 선언해서다. 주지사로 차기 대통령 후보로까지 거론되는 필 머피의 입김이 작용하고 있다는 의미다. 미국 정치매체 폴리티코도 앤디를 오히려 '언더독'이라고 평가했다. 이에 대해 "물론 내가 상원의원이 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지금 이 순간이 아니라면 한국계나 아시아 커뮤니티의 힘을 보여줄 기회는 다시 오지 않을 것"이라며 "한국계로선 가장 높은 자리에서 한반도 정세에 대한 문제에 당당히 관여하겠다"고 말했다.이어 "상원에서 한반도 정책을 논의하면서 한인들의 목소리는 전혀 고려하지도 않음을 알게 됐다"며 "한·미동맹의 파트너십을 공고히 하고 아시아에 지정학적인 안정을 정착시키려면 가장 높은 자리에 그를 대표할 적임자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정치에 입문한 후 70여차례의 타운홀 미팅을 열어 시민과 유권자들의 의견을 경청한 앤디의 힘은 민주당에서도 좋은 평가를 얻고 있다. 최근 가상대결을 전제로 한 여론조사에서는 앤디가 42%, 태미 머피가 19%, 메넨데스 현 의원이 5%를 각각 얻었다. 뉴저지는 민주당 우세 지역이어서 예비선거 승리는 11월 상원의원 보증수표가 될 것이란 전망이다.지난 1월15일 마틴 루터킹 목사의 서거일을 기념한 날에 앤디는 소셜미디어에 다음과 같이 정치 포부를 밝혔다. "리더십이 무엇이냐고 그의 딸이 물었을 때 킹 목사는 공동체를 이루기 위한 중요한 덕목으로 사랑을 말했다. 지금처럼 혼란스러운 시절에 우리는 그 사랑이라는 단순한 진리에서 다시 힘을 얻을 수 있다. 봉사와 리더십, 적극적인 시민의식으로 정의롭고 강력한 민주주의를 만들고자 한다면 다시 되새겨야 할 진리다."━<프로필 >◆출생 1982. 7. 12. 미국 보스턴◆소속 미국 뉴저지주(하원의원)◆학력뉴저지 체리힐 고등학교 (Cherry Hill High School East)딥스프링스컬리지 (Deep Springs College) - 2년제 학교시카고 대학교 (University of Chicago) 정치학 학사로즈 장학금 선발 (Rhodes Scholarship)옥스포드 대학교 (Oxford University) 국제관계학 석사, 박사◆경력2019.01~ 미국 뉴저지주 민주당 하원의원2013~2015 미국 국가안전보장회의 NSC 이라크담당 보좌관2011 북대서양조약기구 NATO 사령관전략참모2009~2013 미국 국무부 외교 담당관━
[기자수첩] 안전한 아파트에 살 권리
"우리 아파트엔 철근이 있다."최근 온라인에 게시된 한 글이다. 지인끼리 각자 사는 아파트의 장점을 자랑하며 "우리 아파트는 커뮤니티 시설이 좋다", "우리 아파트는 조식을 사 먹을 수 있다", "우리 아파트는 조경이 좋다" 등의 말을 하자 20년 된 아파트에 사는 이가 "우리 아파트엔 철근이 있다"고 말해 웃음이 터졌다는 일화다.실제 사건일 수도 있고 지어낸 말일 수도 있지만 이 대화가 시사하는 바는 우습지 않다. 변두리 작은 건설업체도 아닌 최고 브랜드를 자랑하는 아파트 시공사들이 사회를 뒤흔든 부실시공의 원인을 제공했다는 점에서 절대 경각심을 잊어선 안된다.대형건설업체들을 조롱하는 에피소드는 또 있다. 어느 부부가 신축 아파트 입주자 사전점검에 나섰는데 아내가 내 집 마련의 기쁨으로 눈물을 흘리자 남편이 "그만 울고 빨리 하자 찾아"라고 말했다는 일화다.두 이야기를 가볍게 웃어 넘길 수 없는 이유는 분명하다. 일상에서 비싼 금액을 내고 구매하는 것 가운데 실물을 확인하지 못하는 대표적인 두 개가 바로 아파트와 자동차다. 하자 여부를 확인하지 못하고도 수천만원에서 많게는 수십억원을 지불해야 한다. 자동차의 경우 문제가 발생하면 시정조치(리콜)를 받아 수리에 들어가고 심각한 경우 교환도 받을 수 있다.무엇보다 자동차는 문제가 생겨도 렌터카나 대중교통 등 대안이 있다. 하지만 아파트에 문제가 생기면 일상은 거의 올스톱이다. 입주 일정에 맞춰 이사 준비 등을 계획한 가구는 최악의 경우 길거리에 나앉아야 하게 된다. 임시 거처를 마련하기 위해 인근 아파트나 빌라 등의 전·월세를 구하는 과정에 이를 악용한 시세 올리기 수법도 흔히 발견된다.마트에서 5000원을 내고 산 물건이라도 불량이 생기면 교환이나 환불이 가능한데 수억원 내지 수십억원 값을 지불한 아파트에 하자가 빈번하게 터지는데도 이를 제대로 책임 지는 이가 없다면 정말 심각한 문제다. 이 같은 문제를 해결하고자 아파트 공정률 후반부에 분양을 하는 '후분양' 확대 정책이 한때 추진됐지만 건설업체들의 반발로 사실상 무산 위기에 놓였다. 건물의 뼈대라고 할 수 있는 철근을 비용 감축 의도로 빼먹고 벽에서 물이 줄줄 새는 일도 빈번한데 부실시공에 대한 책임으로 영업정지를 받아도 행정소송으로 맞대응하니 보는 이들을 씁쓸하게 한다. 모델하우스의 화려함 뒤에 숨은 아파트 부실시공 문제를 이제는 더 진지하게 봐야 할 때가 됐다. 샤워도 안한 몸에 향수만 뿌린다고 향기가 날 수는 없는 법이다. 자사 브랜드 아파트가 최고라고 내세우는 대기업 시공사들은 그에 걸맞는 품격도 지녔으면 한다. 소비자는 '안전한 아파트'에 살 권리가 있다.
[기자수첩] "기업 살려달라" 아우성인데… 정쟁에만 매몰된 국회
"제 나이가 70이 넘었는데 자식들에게 가업을 물려주고 싶어도 세금부담 때문에 은퇴를 못하고 있습니다. 과도한 세율 때문에 세금을 납부하려면 결국 주식을 팔아야 하는데 경영권은 어쩌란 말입니까?"최근 기자와 만난 한 중소기업 대표 A씨의 하소연이다. A씨가 보유한 주식의 평가액은 180여억원. 현행 상속법상 30억원이 초과하는 지분을 자식들에게 상속하려면 50%의 세율이 붙기 때문에 이중 절반을 세금으로 내야 한다. 산술적으로 자식들에게 주어지는 지분은 부친의 절반 수준에 불과한 것이다. 대기업의 사정은 더하다. 대기업은 최대주주가 보유한 주식의 20%를 할증해서다. 지분을 지키려면 결국 연부연납 제도를 활용하고 금융권으로부터 막대한 자금을 차입해야 하는데 이 비용 또한 만만치 않다. 일부 중소기업이나 중견기업이 아예 승계를 포기하고 폐업하는 사례가 나오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정부와 여당이 상속세 개편에 군불을 지피고 있지만 국회 문턱을 넘어 법률이 개정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야당이 상속세 완화를 부자감세라며 반대하고 있어 향후 논의 과정에서 지리한 다툼이 예상된다. 기업들이 과도한 세금으로 성장과 생존을 고민하는 상황에서 정치권의 기싸움으로 아까운 시간만 흘러간다.상속세뿐만이 아니다. 국회의 정쟁으로 기업들의 염원이 좌절된 사례는 빈번하다. 최근 중대재해처벌 등에 관한 법률(중대재해법) 개정안이 여야 정쟁 끝에 국회를 통과하지 못하면서 지난 1월 27일부터 업종에 상관없이 5~49인을 상시 채용하는 모든 사업자에게도 제도가 적용되고 있다.제도 확대 시행의 적용을 받는 5~49인 사업장은 83만7000곳이다. 해당 사업장에 종사하는 근로자 수만 800만명에 달한다. 상당수의 중소기업과 소상공인들은 제대로 된 대응 체계를 갖추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중소기업계는 "현장에서는 감옥에 갈 위험을 안고 사업하느니 차라리 폐업하고 말겠다는 절규가 터져 나온다"며 2년 유예를 호소했지만 여야의 정쟁에 밀려 결국 법안 통과는 이뤄지지 않았다. 여야는 법안 통과 무산이 상대에게 있다며 '네 탓' 공방에 열만 올린다.법인세를 비롯한 각종 세제나 투자를 늘리기 위한 세액공제 정책도 부자감세냐 아니냐의 다툼 끝에 당초 발의된 법안보다 축소되거나 아예 논의조차 되지 못하고 국회에 계류된 사례도 여럿이다. 오는 4월 총선을 앞둔 시점에서 이 같은 일은 더욱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여야 모두 각자에 유리한 '표심'을 공략하기 위해 계산기를 두드리는 데 여념이 없기 때문이다.글로벌 경제위기 장기화와 저성장 고착화로 한국 경제는 올해도 녹록지 않은 환경을 맞이하고 있다. 지난해 1.4%에 그친 경제성장률은 올해 2%대 초반에 머물 것으로 예상된다. 경제 활력을 제고하려면 기업들이 투자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 미국과 유럽 등 주요국가가 기업에 대한 혜택을 확대하고 보호주의라는 비판에도 자국 기업 우선 정책 마련에 열을 올리고 있지만 우리 국회는 정쟁에 매몰돼 다툼만 반복하는 형국이다.2019년 한 경제단체장이 "우리 경제는 버려지고 잊혀진 자식이다. 경제 현안에 대한 논의는 실종 상태"라고 여야를 직격한 일화가 있다. 기업경영 환경이 날로 어려워지는 상황에서 경제현안 처리는 뒷전인 국회를 꼬집은 것이다. 당시 이 발언이 국회에서 회자 됐다는데 5년이 지난 지금도 변한 것은 없다. 대체 언제까지 기업의 목소리를 외면할 것인가. 불필요한 정쟁은 걷어치우고 위기 극복과 경제 회복을 위해 힘을 합칠 때다.
[기자수첩] 실효성 논란 휩싸인 보험 비교·추천 서비스
"보험 비교·추천 서비스를 이용하면 여러 보험상품을 한 눈에 보고 빠르게 가입할 수 있는 장점은 있지만 보험료가 비싸서 선뜻 내키진 않아요. 온라인으로 가입하는 이유가 '저렴한 보험료'인데 비싸면 매력 없죠." 지난달 19일 공식 출시된 보험 비교·추천 서비스를 직접 사용해본 업계 전문가의 말이다. 해당 서비스를 통해 자동차보험에 가입하려고 했더니 가입자가 수수료 3%를 추가로 부담해야 했다는 것이다. 반면 보험사 다이렉트채널을 통해 가입할 경우 타 보험사 보험료를 일일이 검색해야 한다는 번거로움은 있지만 수수료를 부담하지 않아도 된다. 이는 금융소비자들이 다양한 보험상품을 한 눈에 비교해 보험료 부담을 낮출 수 있도록 하겠다는 금융당국의 당초 서비스 취지와 다른 결과다. 보험 비교·추천 서비스가 출시한지 2주가 채 안 돼 실효성 논란에 휩싸였다. 이 서비스는 11개 핀테크사의 플랫폼을 통해 여러 보험회사의 CM(온라인 보험상품)을 비교해주고 소비자에게 적합한 보험상품을 추천해주는 것이다. 신용대출과 주택담보대출 등 금융상품을 플랫폼에 비교·추천하는 정책의 보험 업계 버전으로 볼 수 있다. 취급 상품은 1월 자동차·용종보험을 시작으로 3월엔 실손·펫보험, 4월 저축·여행자보험으로 확대할 예정이다. 금융당국은 온라인 판매비중이 70% 이상으로 높은 생활밀착형보험 위주로 상품을 구성했다. 금융당국은 보험상품의 경우 다른 금융상품보다 보험사·소비자 사이 정보 비대칭성이 높다고 판단, 이를 해결하기 위해 2022년 상반기부터 서비스 출시를 추진했다. 서비스가 수수료 논란에 휩싸일 조짐을 보이기 시작한 것은 2022년 10월부터다. 핀테크사들은 보험사들이 보험 비교·추천 서비스에서 제공하는 보험상품 가격을 자사 온라인채널 보다 저렴하게 제공할 것을 요구했다. 여기에 4% 이상의 수수료를 붙여 해당 수수료를 핀테크사들이 가져가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반면 보험사들은 핀테크사들이 단순 중개로 수수료를 4% 취한다는 데 동의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보험사들은 자사 온라인 채널과 동일한 보험료로 보험 비교·추천 서비스에 보험상품을 제공하겠다고 강조했다. 보험사들이 주장한 수수료는 2%대였다. 이 같은 상황에서 금융당국은 "보험료와 수수료 책정에 당국이 개입할 수 없다"는 태도를 유지했다. 결국 플랫폼과 대형 보험사의 신경전 속에 플랫폼 수수료는 3%로 책정, 보험사 온라인 채널에서 판매하는 보험상품 가격보다 3% 오르게 됐다. 그 결과 보험 비교·추천 서비스를 통한 자동차보험 계약건수는 출시 후 1주일 동안 950건을 기록하며 초기 흥행에 실패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통상적으로 온라인을 통한 자동차보험 계약건수가 주 평균 14만건이라는 것을 감안했을 때 보험 비교·추천 서비스를 통한 계약 비중은 불과 0.7%였던 것이다. 당초 예상했던 것보다 계약건수가 부진하자 서비스 출시를 주도했던 금융당국은 부랴부랴 보험사·핀테크사 실무진들을 소집해 수수료의 보험료 전가를 두고 다시 논의하기 시작했다. 보험 비교·추천 서비스가 성공적으로 안착하려면 이 서비스에서 판매하는 보험상품 가격이 보험사 온라인 채널보다 비싼 현 상황이 개선돼야 한다. 플랫폼에 제공하는 보험상품 가격과 수수료에 대해 원점에서 논의해 가입자의 편의성을 살리면서 보험사, 핀테크사가 상호 발전할 수 있는 정교하고 촘촘한 해결방안이 나올 것을 기대해 본다.
[기자수첩] 테슬라 메기효과에 웃은 완성차, 방심은 금물
미국의 전기차 기업 테슬라는 자동차 역사에 한 획을 그었다. 기존 자동차 제조사들이 고수하던 생산방식에서 과감히 탈피, 효율을 우선하면서 새로운 가치를 전달하는 데 집중했다. 그 결과 강력한 팬덤을 형성하며 각종 문제가 터져 나와도 전기차 시장 패권을 거머쥘 수 있었다.테슬라가 주목받은 건 높은 영업이익률 때문이었다. 현대자동차와 토요타 등 글로벌 완성차업체들이 5%대의 낮은 영업이익률을 개선하기 위해 힘겨운 싸움을 이어가는 상황에도 10%를 훌쩍 넘긴 테슬라 실적은 놀라웠다. 2021년 12.1%, 2022년 16.8%에 달하는 높은 영업이익률을 기록하는 사이 현대차는 같은 기간 5.7%, 6.9%에 그쳤다.지난해 들어 분위기는 반전됐다. 글로벌 완성차 발표 자료를 보면 지난해 테슬라 영업이익률은 연간 9.2%로 주저앉았다. 토요타 10.4%, 현대차·기아 합산 10.2%에 미치지 못한다. 테슬라의 '메기 효과'로 인해 기존 완성차업체들이 오히려 생존 능력이 강화된 상황이다.테슬라는 전년 대비 매출액이 늘었지만 영업이익은 악화됐다. 몇 년 전만 해도 딱히 경쟁자가 없었지만 현재는 가격을 낮춰 팔아야만 소비자가 관심을 갖는다. 테슬라가 아니어도 눈길이 가는 제품이 늘어서다.럭셔리 차종을 보더라도 메르세데스-벤츠는 EQS, BMW i7이 출시됐고 롤스로이스도 전기차 스펙터를 내놨다. 성능을 우선하는 포르쉐 타이칸, 아우디 RS e트론 등 전기스포츠카도 판매량이 꾸준하다. 일반형으로는 폭스바겐 ID.4, 현대 아이오닉5, 기아 EV6 등이 전 세계의 주목을 끌고 있다. 게다가 BYD를 필두로 중국업체들의 저가 공세도 본격화됐다.기존 완성차업체들의 강점은 내연기관차를 생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세계 각국이 전기차 숨고르기에 들어가면서 하이브리드차가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상황이다. 그동안 설계와 생산과정 등을 개선하면서 효율을 끌어올리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는데 수익이 많이 나는 차종 판매가 급증하면서 성과가 크게 개선된 것이다. 완성차업체들이 테슬라를 완전히 능가했다고 단정하긴 이르다. 테슬라의 영업이익률이 감소했을 뿐 판매량은 여전하다.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도 올해 신년사에서 "소프트웨어 경쟁에서 다소 뒤처지기 했지만 열심히 하면 따라잡을 수 있다"고 했다.테슬라는 SDV(소프트웨어 중심의 차) 선두주자로 꼽히는 만큼 앞으로 가능성은 충분하다. SDV의 장점은 자동차가 스마트폰처럼 꾸준히 업데이트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이는 곧 소프트웨어를 통해 새로운 수익 확보로 이어질 수 있다. 테슬라는 이미 여러 기능을 판매하고 있다. 게다가 SDV는 자율주행 빅데이터 확보로 이어질 수 있어 미래 자동차 경쟁에서 필수로 꼽힌다.현대차와 토요타 등 완성차업체들이 지난해 최대 실적을 거뒀지만 올해는 조심스럽다. 투자할 곳은 많은데 전기차 가격경쟁이 본격화되며 수익성 악화가 우려된다. 생산 측면에서 테슬라 메기효과에 웃었지만 소프트웨어 측면에서는 갈 길이 멀다. 제품을 넘어 소프트웨어를 통해 소비자의 마음을 열 방법부터 찾아야 하는 시점이다.
[기자수첩] 포스코그룹 차기 회장은 내부인이 맡아야
포스코홀딩스의 차기 최고경영자(CEO) 자리에 외부 인사가 거론되고 있다. 포스코홀딩스 CEO후보추천위원회는 차기 회장 후보로 내부(6명)보다 외부(12명) 인사가 두배 많은 롱리스트를 발표하기도 했다.다양한 의견이 있지만 현재의 포스코그룹은 회사 사정을 잘 아는 전문가가 필요하다. 외부 인사를 영입하는 게 능사는 아니라는 것이다. 포스코그룹이 최근 2차전지 소재사업 등으로 주목받고 있으나 회사의 뿌리는 철강이다. 철강을 중심으로 안정적인 포트폴리오를 확보해야 신사업 등에도 투자할 수 있다.철강업계는 2050년 탄소중립 달성이라는 지상 과제를 안고 있다. 글로벌 철강사들은 정부로부터 조 단위에 달하는 탈 탄소 기술 연구, 설비 투자 등을 지원받고 있으나 국내 철강사들은 스스로 살아남아야 한다. 탈 탄소 기술을 선점하는 국가가 모든 철강 기술을 선도할 수밖에 없는 만큼 철강사업에 꾸준하고 지속적인 투자가 필요하다. 이를 위해선 최고 경영자로 철강을 잘 아는 인사를 맡기는 것이 유리하다.회사 내부에서는 철강을 잘 모르는 외부 인사가 선임돼 회사의 본원 경쟁력이 악화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산업의 쌀인 철이 경쟁력을 잃으면 대한민국 경제 전체에 타격을 줄 것은 자명하다.하지만 외부 인사를 영입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은 포스코그룹이 자초한 일이다. 최근 후추위 위원들의 도덕성 논란이 도마에 오르면서 외부에서 CEO를 영입해야 한다는 여론이 생성되고 있다. 사외이사로 구성된 후추위 인사들이 전세기를 타고 해외에서 열린 이사회에 참석해 고가의 만찬과 호화 관광을 즐겼다는 의혹이다. 최정우 회장을 비롯한 후추위 위원 7명 전원은 캐나다 이사회 의혹과 관련해 업무상 배임 또는 청탁금지법 위반 등 혐의로 경찰에 입건되기도 했다.포스코그룹은 이를 바로잡고 개선하기 위한 노력을 경주할 필요가 있다. 문제가 불거진 인사에 대한 철저한 진상 조사와 합당한 처벌이 내려져야 하는 것은 물론 차기 CEO 선임 절차도 더욱 투명해져야 한다. 그동안 소수의 사외이사가 비공개로 후보를 선택하면서 '밀실 담합'이라는 오명을 얻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반복되는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누구나 납득할 수 있는 공정한 CEO 선임 절차를 확립해야 한다. 절차의 공정성을 문제 삼아 CEO 선임이 전면 백지화되는 사고도 사전에 방지할 수 있다.CEO 선출이 늦어지면 경영 공백으로 인한 피해는 회사와 주주가 입는다. 글로벌 사업을 영위하는 포스코그룹이 주는 타격은 클 수밖에 없다. 현재 철강과 2차전지 소재 등 각종 사업에서 활발하게 투자가 진행 중인데 의사결정이 지연되면 사업 계획에 차질이 생길 수 있다. 차기 회장 선임 과정에서 여러 인사가 거론되면서 이곳저곳에 줄을 대려는 사람도 생기기 마련이다.포스코그룹을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시킨 것은 결국 '철강'이다. 제철보국을 염원하던 박태준 명예회장으로부터 시작된 기적의 역사가 이어지길 바란다.
[기자수첩] 소비자 후생은 고려 않는 '오락가락' 플랫폼법
최근 공정거래위원회가 제정을 추진 중인 '플랫폼 경쟁촉진법'이 소비자 후생을 고려하지 않은 졸속 입법이 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입법 추진 단계부터 국내 사업자와 소비자들이 반대하고 나섰다.플랫폼법은 독과점 플랫폼을 미리 지정해 각종 행위를 하지 못하게 하는 사전규제 법안이다. ▲멀티호밍(경쟁 플랫폼 입점) 제한 ▲최혜대우(유리한 거래조건 요구) ▲자사 우대 ▲끼워팔기를 일삼는 독과점 플랫폼에 시정명령과 고강도 과징금을 부과하겠다는 내용이 골자다.공정위는 "소수 플랫폼 사업자가 시장을 독식하면서 소비자, 소상공인, 스타트업의 피해가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다"면서 플랫폼법 제정의 명분을 내세웠다. 하지만 이 명분은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하고 있다. 스타트업 단체인 코리아스타트업포럼과 플랫폼에 입점한 중소상공인 단체 '한국플랫폼입점사업자협회'가 각각 입장문을 내고 법 제정을 반대한 것이 방증이다. 수혜를 입을 것으로 예상되는 당사자가 반대하고 나섰다는 점에서 누구를 위한 법안인지 생각해 보게 된다. 민간 주도 플랫폼 자율 규제를 외치던 정부가 강력한 사전 규제 기조로 돌아선 것도 의아해 한다. 정책 일관성에 혼란을 줬기 때문이다. 정부 내에서도 의견이 갈려 구체적인 내용 조율도 시간이 걸릴 전망이다.대형 플랫폼의 독과점을 막겠다는 법안이 오히려 소비자에 불편함만 초래할 것이란 볼멘소리도 있다. 최고의 고객 경험을 제공하려는 혁신이 사전 규제에 막히게 되면 불편함은 이어지고, 서비스에 지불하는 비용 상승을 부추길 수도 있다.플랫폼이 제정돼 시행되면 국내 주요 플랫폼들이 제공하던 각종 혜택의 축소는 불가피하다. 네이버페이, 카카오택시, 쿠팡 로켓배송, 배달의민족 주문 등에서 받을 수 있던 혜택과 편의 등은 더 이상 받기 어렵다. 웹툰, 웹소설 등 플랫폼 내 자체제작 콘텐츠도 자사상품으로 규제받게 될 것이 자명하다.쿠팡이 '와우멤버십' 회원들에게 주던 쿠팡이츠 할인도 불법이 된다. 이는 소비자 불편을 넘어 미국과 중국 기업이 입지를 강화하는 이커머스시장에서 국내 플랫폼 기업들의 경쟁력을 약화시킬 것이다.작은 결점을 고치기 위한 수단이 지나치면 오히려 손실만 커진다. 교각살우의 교훈을 새겨야 할 때다. 국내 대형 플랫폼 기업은 물론 스타트업, 중소상공인까지 "생존을 위협하는 법안"이라고 호소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과거 섣부른 인터넷 관련 법을 시행해 토종 플랫폼이 몰락한 아픈 경험이 있다. 우리 기업이 안방 시장을 지키고 해외 플랫폼 기업과의 경쟁에서 이길 수 있는 최선이 무엇인지 다시 생각하자.
[기자수첩] 개와 늑대의 시간… K-배터리, 2024년 잘 넘겨야
'개와 늑대의 시간'이라는 말이 있다. 프랑스에서 유래된 이 구절은 황혼에 접어들며 빛과 어둠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때를 의미한다. 언덕 너머에서 다가오는 실루엣이 개인지, 늑대인지 구분할 수 없는 불확실한 상황이다. 글로벌 전기차 전환에 힘입어 고속 성장해온 국내 배터리업계에 수요 부진이라는 불황이 찾아온 현재와 겹쳐진다.최근 배터리업계에 어둠이 짙어지고 있다. 맏형 LG에너지솔루션의 매출이 꺾였고 아직 실적이 공개되지 않은 삼성SDI와 SK온 전망도 밝지 않다. 경쟁사 중국 업체들은 내수 시장을 넘어 글로벌 무대에서 약진하고 있다. 국내 업체들의 신규 미국 공장이 내년부터 가동 예정인 점을 감안, 올해 고비를 잘 넘겨야 성장에 탄력이 붙을 것으로 보인다. 품질·원가경쟁력 등 기본이 중요한 시점이다.LG에너지솔루션은 지난해 4분기 매출 8조14억원, 영업이익 3382억원을 기록한 것으로 잠정 집계됐다. 전년 동기 대비 매출은 6.3% 줄고 영업이익은 42.5% 늘었다. LG에너지솔루션은 2022년 1월 유가증권시장(코스피) 상장 이후 처음으로 매출이 2분기 연속 감소했다. 영업이익은 1년 전보다 개선됐으나 이는 미국 인플레이션 감축법(IRA) 첨단세액공제(AMPC) 덕분이다. AMPC를 제외한 영업이익(2023년 4분기)은 881억원에 그친다.삼성SDI와 SK온도 역성장이 우려된다. 삼성SDI는 지난해 4분기 매출 6조258억원, 영업이익 4798억원을 기록했을 것으로 증권가는 본다. 2022년 4분기 대비 매출 1.0% 증가, 영업이익 2.2% 감소다. SK온은 같은 기간 적자를 지속한 것으로 관측된다. 전기차 수요 둔화로 인한 판매량 감소와 니켈 등 핵심 원자재 가격 하락으로 인한 수익성 악화가 국내 업체들의 실적 부진 배경으로 꼽힌다.국내 기업들이 주춤하고 있는 사이 중국 업체들의 영향력은 확대됐다. 중국 CATL은 지난해 1~11월 중국을 제외한 글로벌 전기차용 배터리 시장에서 점유율 27.7%를 기록했다. 전년도 같은 기간(22.1%)보다 5.6%포인트 성장하며 1위 LG에너지솔루션을 따라잡았다. LG에너지솔루션 점유율은 같은 기간 29.1%에서 27.7%로 1.4% 포인트 하락했다. 시장조사업체 SNE리서치는 "중국 업체들은 내수 시장보다 비(非)중국 시장에서 성장률이 더 높다"며 "글로벌 시장 점유율을 빠르게 확대하고 있다"고 설명했다.국내 업체들이 중국과의 경쟁에서 확실한 우위를 점하기 위해서는 아직 시간이 필요하다. 핵심 시장인 미국에 건설하고 있는 신규 공장이 내년부터 순차 가동된다. LG에너지솔루션은 미국 애리조나에 총 43기가와트시(GWh) 규모 단독공장을 짓고 있다. 현대자동차·제너럴모터스(GM)·혼다·스텔란티스 등과도 합작 형태로 총 215GWh의 공장을 건설 중이다. 삼성SDI는 GM·스텔란티스와 합작공장 총 세 곳(97GWh)을, SK온은 포드·현대차와 합작공장 총 네 곳(164GWh)을 추진하고 있다.현재는 기본에 집중해 실적 악화를 최소화해야 할 때다. 제품·품질 우위를 유지하는 가운데 원가경쟁력을 확보하는 방식으로 고객들로부터 신뢰를 얻어야 한다. 김동명 LG에너지솔루션 사장, 최윤호 삼성SDI 사장, 이석희 SK온 사장 등 최고경영자(CEO)들이 연말·연초 각각 언급한 ▲경쟁사를 압도하는 기술 리더십 ▲글로벌 최고 수준의 원가경쟁력 ▲고객과 굳건한 신뢰 관계 구축 등이 실현되길 바란다.
[기자수첩]가계 통신비 절감의 지름길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통신비 절감을 위해 중저가 단말기를 선보이는 데 힘을 쏟고 있다. 프리미엄 제품군을 선호하는 한국에서 실효성이 떨어진다는 지적도 있지만 더 이상 새로운 요금제로 통신비를 인하하기엔 한계가 있어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내놓은 고육지책으로 보는 시각이 많다.현실성이 떨어지는 제4통신사 출범도 막대한 인프라 사업을 재정 여력이 부족한 사업자들이 소화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차라리 단통법(단말기유통구조개선법) 문제를 심도 있게 들여다보는 게 나아 보인다.과기정통부는 최근 중저가 단말기 출시를 독려하고 있다. 제조업체 삼성전자와 합을 맞춰 30만∼80만원대인 갤럭시S23FE, 갤럭시점프3를 작년 말 선보이고 올해 상반기 갤럭시A25를 시작으로 총 3~4종을 추가 출시할 예정이다.가계 통신비 부담을 낮추기엔 역부족으로 보인다. 갤럭시 점프3는 KT에서만 가입이 가능하고 갤럭시S23FE는 출고가 84만7000만원에 달해 중저가폰이라고 보기 어렵다. 44만9900원짜리 갤럭시 A25 5G가 나왔지만 프리미엄 단말기를 선호하는 국내 소비자들에게 중저가 단말기보단 플래그십 기기의 가격 자체를 내리는 것이 효과적이다. 과거에도 갤럭시 A 시리즈, LG전자 가성비 라인업이 있었지만 일부 소비자층들을 공략하는 데 그쳤다. 효도폰으로 불리던 가성비폰을 구매했던 소비자들마저 프리미업 제품군에 눈을 돌리고 있다. 이처럼 프리미엄 시장이 확대되는 가운데 중저가 라인업을 늘리는 것은 시장 논리를 역행하는 것이다.정부 역시 이러한 현실을 모르지 않을 테지만 출고가 200만원이 넘어가는 '폰플레이션'(스마트폰+인플레이션)을 방관만 할 수 없는 것이다. 5G 중간요금제에 이어 올해 1분기 내 3만원대 5G 요금제까지 나와 새 요금제 출시 여력이 줄어드는 상황에서 저렴한 단말기로 통신비 부담을 낮추려는 노력이다.발상의 전환이 중요한데 해법은 단통법에 있다. 단통법은 휴대폰 보조금 시장의 투명화를 목표로 고안됐지만 불법 보조금 단속 역시 유명무실해지고 성지를 둘러싼 소비자들 간 정보 격차만 커질 뿐이다. 통신사의 마케팅 노력도 정체되면서 통신비 증가로 이어졌다.개선책인 단통법 지원금의 한도 상향(기존 15%에서 30%)은 지지부진하고 단통법 위반 사례를 단속하는 '폰파라치' 부활을 검토하는 등 시대착오적인 정책만 논의되고 있다.문제점이 많았던 만큼 단통법 부작용을 최소화하면서도 단말기 가격 인하를 유도하는 방향으로 개선하는 것이 낫다. 단통법에는 통신 3사와 제조사 등 많은 곳의 이해관계가 얽혀 있다. 해결 방안을 도출하기 어려운 구조다. 불경기에 국민 효용을 증대시키려면 이만한 난제는 부딪쳐 풀어낼 용기가 필요하다. 다행히 정부가 최근 단통법 폐지를 고민하기 시작했다는 얘기가 들린다. 이제라도 가능성이 희박한 제4통신사를 유치하는 대신 성과가 보장된 방안을 마련하는 데 전념하길 바란다.
[기자수첩] 윤세영 회장, 악어의 눈물
시공능력 16위의 코스피 건설업체 태영건설이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대출금 상환을 감당하지 못해 지난달 워크아웃(재무구조 개선작업)을 신청했다. 시공능력 상위 업체의 워크아웃은 글로벌 금융위기 여파가 있었던 2013년 이후 10년 만의 사건으로 업계 전반에 불안이 확대되고 있다.태영건설이 워크아웃을 개시하려면 채권단 75% 이상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 하지만 최근 태영그룹이 채권단에 내놓은 자구안은 진정성을 의심 받고 있다. 태영건설을 지키겠다는 의지를 보이며 직접 채권단 설명회에 참석한 90대 노장 윤세영 태영그룹 창업회장은 눈물을 보이며 호소했다.지난 3일 서울 여의도 KDB산업은행 본점에서 열린 태영건설의 워크아웃 설명회에는 채권자 700여명이 참석했고 윤 회장은 경영 현황과 워크아웃 자구안을 설명했다. 윤 회장은 워크아웃 자구안으로 ▲태영인더스트리 매각대금 1549억원 ▲에코비트 매각 추진 ▲블루원 지분 담보 제공과 매각 추진 ▲평택싸이로 지분 62.3% 담보 제공 등을 내놨다. 윤 회장은 "자기 관리에 소홀한 탓에 뼈아픈 부도 위기를 몰고 왔다"며 "저를 비롯한 경영진의 실책이다. 간곡히 도움을 요청드린다"고 호소했다. 하지만 "어떻게든 피해를 최소화해 태영과 함께해온 많은 분들이 벼랑 끝에 내몰리지 않도록 같이 살 수 있는 길을 찾게 도와 달라"면서 계약자와 하도급업체 등의 피해를 암시했다. 윤 회장은 "국가 경제에 돌이킬 수 없는 치명상을 입힐까 봐 너무나 두렵다"면서 "협력업체와 투자해주신 기관, 채권단, 나라와 국민에게 큰 죄를 짓지 않도록 도와달라"고 말했다.하지만 정작 기대한 총수 일가의 사재 출연이나 핵심 계열사인 SBS 지분 매각 등은 자구안에 포함되지 않아 채권단의 반응은 싸늘했다. 해당 내용에 대한 질의가 이어지자 윤 회장은 "의견을 밝히기가 어렵다"는 답변을 내놔 채권단의 공분을 사기도 했다.태영건설의 PF 규모가 9조원으로 밝혀진 데 대해 윤 회장은 "실제 문제가 되는 우발채무는 2조5000억원 정도"라고 반박했다. 태영그룹은 채권단에 태영건설의 보증채무가 총 9조5044억원이고 이 중 우발채무가 2조5259억, 무위험 보증이 6조9785억원이라고 설명했다.오는 11일 채권단협의회는 태영건설의 워크아웃 개시 여부를 결정한다. 만약 태영건설이 채권단의 동의를 얻지 못하고 워크아웃에 실패하면 결국 기업회생절차(법정관리)를 밟아야 한다. 국민의 세금을 내 살려달란 눈물은 와 닿지 않는다. 실질적이고 현실화 가능성이 있는 대책을 내놓아야 할 것이다.
[기자수첩] 소주 출고가 인하로 이득 보는 건 누구일까
'서민의 술' 소주 가격이 내렸다. 하지만 이를 체감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식당·주점에 가면 소주는 6000원을 받는다. 많은 요식업주들은 소주 가격을 인하하긴 어렵다고 말한다.최근 국세청은 외국산 제품과의 세금 역차별을 해소하기 위해 국산 주류에 기준판매비율을 도입했다. 그동안 국산제품은 판매비용과 마진이 포함된 반출가격에 세금이 부과됐지만 수입제품은 이를 포함하지 않은 수입신고 가격에 세금이 부과됐다. 국산제품의 세금 부담이 더 컸다.이런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기준판매비율이 도입됐다. 기준판매비율은 세금 계산 시 세금부과 기준금액(과세표준)에서 공제하는 세금할인율 개념이다. 소주의 경우 22.0%로 정해졌다. 소주 등 국산 증류주는 2024년 1월부터 공장출고분 가격이 10.6%까지 내려간다.이에 따라 주요 주류업체는 선제적으로 소주 출고가격을 인하했다. 하이트진로는 지난 12월22일 출고분부터 참이슬, 진로 등 소주 출고가를 10.6% 내렸다. 롯데칠성음료는 12월27일부터 처음처럼과 새로 가격을 인하했다. 처음처럼은 4.5%, 새로는 2.7% 내린 가격으로 공급한다.소주의 출고가 인하로 편의점과 대형마트의 소주 가격이 내렸다. 지난 1일부터 주요 편의점에서 참이슬(360㎖) 가격은 2100원에서 1900원으로 인하됐다. 이마트에서는 1480원에서 1330원으로 조정됐다.소줏값이 내렸지만 소비자가 체감하기 어려운 것은 소주는 일반적으로 유흥시장에서 더 많이 소비되는 주종이기 때문이다. 식당에서는 소주 가격을 내리기 어렵다는 입장이 대부분이다. 앞서 출고가를 인상했다가 재인하한 경우인 데다가 인건비, 전기·가스요금 등 가게 운영비가 대폭 올랐다는 설명이다.서울시 마포구에서 식당을 운영하는 한 점주는 "소주 가격이 내려간다는 얘기가 계속 언론에 나오면서 상황이 난감하다"며 "재룟값과 운영비가 계속 오르는 상황에서 소주 가격을 내리려면 식당 메뉴 가격을 올리는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앞서 많은 사례를 보면 제조사가 제품의 출고가를 낮춰도 소비자가 구매하는 가격에는 크게 반영되지 않았다. 유통 과정상 이를 제재할 수 있는 수단도 마땅치 않다. 제조사가 정부 방침을 따라 출고가격을 내리더라도 도매업자와 요식업주의 마진만 늘려주는 상황이 될 가능성이 크다.이번 소주 출고가 인하는 국세청이 정한 기준판매비율 만큼을 빼고 나머지에 세금을 매기는 방식으로 사실상 세금을 깎아주는 것이다. 여기서 빠진 국세 수입(세수)은 어디선가 늘어나야 나라 곳간을 채울 수 있다. 세금을 깎아가면서 물가 안정을 좇은 셈이다. 물가 안정 드라이브를 걸기 전에 유통 과정 전반을 세심히 살펴야 한다.
[기자수첩] 카드 수수료율은 답정너?
"사실 답정너(답은 정해져 있고 너는 대답만 해)죠. 총선도 있잖아요." 카드 수수료율 재산정 전망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 한 대형 카드사 관계자는 이같이 말했다. 그는 기대감이 없다는 말도 더했다. 결말이 뻔한 영화를 보는 이의 표정이 이럴까. 그의 말대로 이번에도 카드수수료율이 내려가면 꼬박 15번째다.카드사에게 올해는 결전의 해다. 카드사는 여신전문금융법에 따라 3년마다 '적격비용'을 산정해 이를 바탕으로 가맹점 수수료를 결정한다. 직전 산정 해인 2021년 말 발표된 기준은 2022년부터 올해까지 적용되며 올해 말 발표되는 수수료율은 2025년부터 앞으로 3년간 유지된다.현재 연 매출 3억원 이하 영세 가맹점 수수료율은 0.2~0.5%, 연 매출 3억~30억원 구간은 1.1~1.5%(신용카드), 0.85~1.25%(체크카드) 등이다. 이는 2007년 이후 총 14차례에 걸쳐 하향 조정된 수치다. 직전 산정 일정이 3월 원가분석 회계법인 선정, 4월 컨설팅사와 방안 논의, 이후 11월 최종 개편안이 발표된 것을 고려하면 이르면 이달부터 수수료율 산정을 위한 사전 작업이 진행될 것으로 보인다.아직 백지상태지만 카드사들은 과거와 같은 흐름을 전망 중이다. 금융사들을 대상으로 당국의 상생지원 압박이 이어지고 있는 데다 고물가, 고금리로 여전히 소상공인, 서민의 어려움이 지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오는 4월 총선이 열리는 만큼 정치권에서 소상공인 지원을 내걸고 수수료율 인하를 압박할 수도 있다.카드사들은 더 이상 여력이 없다는 설명이다. 지난해 3분기 전업 카드사의 합산 순이익은 7369억원으로 전년 동기(8626억원) 대비 15% 감소했다. 수수료율 인하에 조달금리 상승 등으로 나갈 돈이 늘었다는 설명이다.카드사들의 입장이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지만 가맹점 수수료 수익이 늘어난 점은 "수수료율 인하로 적자를 면치 못한다"는 카드사들의 주장이 어딘가 겸연쩍게 느껴지는 부분이다.실제 금융감독원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9월말 기준 국내 7개 전업 카드사가 가맹점 수수료로 벌어들인 수익은 누계 기준 3조8669억원으로 1년 전(3조6048억원)과 비교해 7.3% 증가했다. 카드사들은 수익성 악화를 이유로 카드 혜택까지 축소하고 있어 소비자 피해로 이어지고 있다.당초 금융당국은 지난해말 '카드 수수료 적격비용 제도개선 TF(태스크포스)'를 통해 수수료율 산정 시기를 3년에서 5년으로 늘리는 등의 개선 방안을 발표할 예정이었지만 결국 해를 넘겼다.카드 수수료율 재산정은 표면적으론 금융당국과 카드사의 협상으로 보이지만 그 안엔 소상공인, 금융 소비자도 있다. 카드사들은 '답정너 프레임'에 빠지기 보다 수익 포트폴리오 다각화 등 자구책 마련에도 힘을 써야 할 때다. 합리적인 논의 과정으로 현실적인 수수료율 기준점을 기대해 본다.
[기자수첩] 사라지는 제약사 복제약 영업맨
수년 전 동네 의원에서 A제약사 영업사원을 만났다. 무척 더운 날씨에도 격식을 갖춘 정장 차림이었던 그는 의사와의 미팅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이었다. 제약 영업에 대한 궁금증에 지갑에서 명함 한 장을 꺼낸 뒤 인사를 나눴다. 무슨 약을 담당하는지 물었더니 간결한 답이 돌아왔다. 모두 제네릭(복제약) 제품이었다. 당시 제네릭에 대한 편견이 있었던 터라 막연히 "힘들지 않냐"고 물었는데 "할만하다"고 했다. 의외의 답변이었다. 그는 10년차 매니저였다.그의 제네릭 영업 비결은 간단했다. 의사와의 '라뽀'(감성영업)에다 프로모션을 더한 조화였다. 영업을 위해선 제품의 장점과 특색만으로 성공을 거둘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이는 현실과는 동떨어진 것이었다. 제네릭 자체가 복제약이어서 사실 중소 제약사와 대형 제약사의 제품의 특색을 비교할 수 없는 점을 간과했다. 제네릭 영업은 '사람'에 의해서 좌우된다는 얘기다.시간이 흘러 '제약사의 꽃'이라 불리던 영업은 제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분위기다. 실무자들 사이에선 과거 '젠틀'했던 감성영업은 끝이 났다는 볼멘소리도 나온다. 제약사 자체 영업이 아닌 ▲도매상 영업 ▲CSO(영업대행업체) ▲도도매(도매사 간 유통거래) ▲컨설턴트 등 변종영업이 등장하면서다.변종영업이 등장한 대표적인 원인은 수익성이다. 지난해에만 8000개에 가까운 제네릭의 약가가 인하됐다. 보건복지부는 2023년 9월 '기등재 의약품 상한금액 재평가'에 따라 지정한 요건을 충족하지 못한 7419개 의약품은 15%, 256개 의약품은 27.75%의 약가인하를 단행했다. 이른바 제네릭 규제다. 제약바이오 기업이 거둬들이는 수익의 상당 부분은 복제약 판매에서 나오기 때문에 약가인하는 실적 하락과 직결된다. 게다가 올해에는 '기등재 의약품 상한금액 2차 재평가'와 '실거래가 약가인하' 등 추가적인 약가인하 정책이 대거 예정돼 있다.정부의 지속적인 제네릭 약가인하 추세에 제약사는 영업사원을 '비용'으로 인식한다. 마진 구조가 좋지 않은 중소 제약사 사이에선 고비용의 영업부 인원을 대상으로 희망퇴직을 받고 회사 제품은 CSO로 이전하는 사례가 빈번하게 나타나고 있다. 이런 상황이 이어진다면 앞으로 정장을 입은 제약사 영업사원을 찾아보기 힘들 수도 있다. 제네릭 영업만 영위해 오던 제약사는 결국 도태되고 영업사원을 내보내는 곳은 더 많아질 것이다. 영업사원 입장에선 억울함도 있겠으나 수익을 좇아야 하는 기업의 선택지는 좁혀질 수밖에 없다.
[기자수첩] 불붙은 정치테마주, 대주주 배불리기는 그만
'여의도 증권가에서 한동훈 테마주 분석 급등 예상 종목 추천', '이낙연 대장주 무료공개'요즘 부쩍 늘어난 정치테마주 관련 스팸 문자를 볼 때면 선거가 다가왔음을 실감한다. 내년 4월 예정된 제22대 국회의원선거가 가까워질수록 스팸 문자는 늘고 내용은 더 자극적으로 변한다.정치의 계절이 돌아오면서 주식시장에도 정치테마주 광풍이 불고 있다. 최근에는 한동훈·이낙연 테마주로 엮인 종목들의 주가가 출렁거렸다. 정치테마주로 엮인 종목의 주가 롤러코스터는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정치테마주가 국내증시에 등장한 것은 지난 2007년 17대 대선을 앞두고 이명박 전 대통령과 관련된 테마주가 급등한 것을 효시로 본다. 15년이 넘게 흐른 지금도 정치테마주 투자 행태는 그때와 다르지 않다. 학연·지연이나 말 한마디 등 별다른 재료도 없이 기대감만으로 연일 상한가를 찍기도 한다. 최근 대상홀딩스의 보통주와 우선주는 모두 배우 이정재가 총선 출마설로 연일 화제를 모으는 한동훈 법무부 장관과 저녁 식사를 한 사진이 공개되면서 연일 상한가를 쳤다. 한 장관과 현대고 동문인 이정재가 임세령 대상홀딩스 부회장과 오랜 연인 사이라는 점이 부각되면서 '한동훈 테마주'로 묶인 것이다. 대상홀딩스 보통주와 우선주 주가는 각각 지난 19일 종가기준 1만4000원, 5만8400원까지 올랐는데 이는 11월 초와 비교하면 111%, 723% 급등한 수준이다. 남선알미우는 신당 창당 의지를 거듭 밝히고 있는 이낙연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 관련 테마주다. SM그룹 계열사인 남선알미늄은 계열사인 삼환기업의 이계연 고문이 이 전 대표의 친동생이라는 이유로 관련주로 꼽히며 주가가 상승했다.정치테마주 관련종목의 주요주주들은 주가가 오를 때마다 주식을 팔아 차익을 실현하는 사례가 빈번하다. 이에 뒤늦게 뛰어든 개인투자자들만 손실을 보는 일이 다반사다. 정치테마주는 정치인과의 인연만 부각되기 때문에 회사의 실적이나 펀더멘털(기초체력)과는 무관하다. 높은 관심 속에서 특별한 모멘텀 없이 급등세를 연출하던 정치테마주들은 대주주의 주식 매도, 즉 차익실현 매물이 나온 뒤 주가가 하락하는 일이 잦다. 주요주주의 지분 처분은 회사 성장에 대한 의구심으로 해석돼 주가 급락을 초래하면서 그만큼 뒤늦게 테마주 열풍에 편승한 개인투자자들만 피해를 보는 것이다.대상홀딩스우는 지난 8일 임창욱 대상홀딩스 명예회장이 갖고 있던 우선주 2만8688주를 전량 매도했다. 처분 단가는 4만6515원으로 약 13억3442만원어치를 현금화했다. 이후 대상홀딩스우는 임 명예회장이 주식을 매도한 날을 기점으로 5거래일 연속 하락세를 나타냈다.앞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 이후 주식시장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돌아온 정치테마주 장세에서도 펀더멘털의 가치를 아는 투자 태도를 통해 현명한 주식문화를 조성하길 기대해본다.
[기자수첩]포스코 수장 교체가 최선일까…공과 따져봐야
정권이 바뀌면 해당 분야 전문가가 아닌 인사가 주요 기관 수장에 선임되면서 논란이 인다. 포스코 회장도 같은 맥락으로 주목받는다. 포스코는 사기업이지만 태생 때문인지 아직도 공기업으로 알고 있는 이들이 많다. 내년 경제 전망은 밝지 않다. 전쟁은 계속 이어질 것 같고, 인플레이션 후유증도 쉽게 사그라지지 않을 것 같다. 전시에는 수장을 바꾸지 않는다고 하는데, 국내외 경제가 어려운 상황에서 그동안 잘해 온 기업 수장을 바꿔야 하는지 의문이다. 보는 시각에 따라서 공과는 다르게 보일 수 있기는 하다.최정우 회장은 회사를 철강 중심에서 2차전지소재 등 친환경 미래 소재 사업으로 전환하는 성과를 이뤘다. 2차전지 공급망 가운데서도 원료 분야의 부가가치를 높게 평가하고 선제적으로 투자에 나선 전략이 주효했다. 포스코그룹은 2030년까지 ▲니켈 24만톤 ▲리사이클 7만톤 ▲양극재 100만톤 ▲음극재 37만톤 ▲차세대 소재 9400톤 생산능력을 확보하는 등 '2차전지소재 풀 밸류체인'을 구축하겠다는 구상이다.철강 사업 경쟁력도 강화하고 있다. 포스코는 전기차 및 고급가전용 모터의 에너지 손실을 줄여주는 고효율 무방향성 전기강판(Hyper NO)을 개발했다. 앞으로 공장을 증설해 광양 30만톤, 포항 10만톤 등 총 연산 40만톤의 Hyper NO 생산 체제를 완성할 계획이다. 이는 전기차 약 500만대에 들어가는 구동모터코아를 만들 수 있는 규모다.회사 가치도 상승했다. 지난 5년간 포스코홀딩스, 포스코인터내셔널, 포스코퓨처엠, 포스코DX, 포스코스틸리온, 포스코엠텍 등 6개 상장사 시가총액은 최 회장이 선임된 2018년 7월27일 35조2000억원에서 지난 20일 기준 89조9715억원으로 2배 이상 증가했다.과오도 있다. 최 회장은 지난해 9월 태풍 '힌남노' 상륙으로 포항제철소가 침수 직전 주말 골프를 친 사실이 알려져 국정감사에서 질타를 받았다. 노조와의 관계 악화로 사상 최초로 포스코에 파업 위기가 불거지기도 했다.두 상황을 비교해 보면 과보다 공이 더 많다. 기업 수장을 바꾸면 많은 일이 부수적으로 이뤄진다. 후임자는 전임자가 잘 한 것보다 잘못한 것을 찾아내고 그것을 빌미로 조직 개편 및 인사에 나선다.이 과정에서 일을 잠시 접어두고 이곳저곳에 줄을 대려는 사람도 있고 '정중동'으로 상황을 지켜보는 이들도 생긴다. 필연적이다. 눈치를 보는 이들이 많아지면 회사는 제대로 굴러가지 않는다. 실적도 고꾸라진다. 작은 개인 기업이면 책임은 오로지 오너가 진다. 포스코는 작은 개인 회사가 아니다. 국가 기간 산업을 책임지는 대기업이다. 포스코발 혼란은 국민이 책임져야 할 수도 있다. '화무십일홍'. 한번 성한 것이라도 쇠하는 시기가 오지만 포스코에 핀 꽃은 시들지 않았다. 그동안 진행했던 미래 먹거리 준비도 가시화하고 있다. 우리가 포스코에 주문해야 할 것은 '주마가편'이다. 이왕 달리기 시작했으니 국가 경제를 위해서 잘 뛸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최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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